[그림으로 세상읽기] 봄날은 간다

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며칠은 마치 초여름처럼 온도가 오르기도 했습니다. 서둘러 짐을 싸는 봄을 상상하니 2021년 봄도 이렇게 가는가 싶습니다. 풍경은 기억을 동반하기에 늘 머릿속에 남는 법이지요.

20세기가 시작되기 전 러시아에서 가장 사랑 받는 풍경 화가였던 이삭 레비탄(Isaac Ilyich Levitan/1860 ~ 1900)의 작품 속에는 서정과 철학 그리고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들어 있다고 평론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고요한 안식처 Quiet abode 1890 oil on canvas 87.5cm × 108cmⓒTretyakov Gallery

길을 따라 걷던 발걸음이 조그만 강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함께 왔던 길은 다리를 건너 건너편 숲으로 숨었고, 길이 사라진 숲 너머로는 지는 해를 받아 주황색으로 물든 성당이 서 있습니다. 강은 내가 서 있는 곳과 성당이 있는 곳을 나누고 있습니다.

다리는 세상과 나를 연결하고, 자연과 나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지금 내가 등에 지고, 팔에 안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않고 다리를 건널 수 있을까 하고 궁리를 해보지만, 중간중간 바닥이 낡아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다리는 나에게 짐을 벗어 놓고 건너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왔던 길을 돌아갈 것인가, 짐을 벗어 던지고 마음만 가지고 다리를 건널 것인가를 고민해야겠지요. 자연의 질문이기도 하지만 레비탄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레비탄은 지금의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지방의 가난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0세 때 모스크바로 이사 가 13세에 모스크바 종합 예술학교에 입학합니다. 그곳에서 공부를 잘했는지 물감 한 박스와 그림 붓 두 다스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그를 지도한 선생님은 서정 풍경화의 시조라고 불리는 알렉세이 사브라소프, 비판적 사실주의 작품으로 러시아 사회의 아픈 곳을 그렸던 바실리 페로프, 그리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외광파 기법을 처음으로 러시아 미술에 도입한 바실리 폴레노프였습니다. 정말 쟁쟁한 화가들이었지요.

이탈리아의 봄 Spring in Italy 1890 oil on canvas 19.5cm x 32cmⓒ기타

길 위에 부서지는 봄볕에 길은 하얗게 탈색 되고 있습니다. 길을 따라 서 있는 나무들은 차오르는 열기를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듯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있는 산 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봄도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요즘 보이고 들리는 것 대부분이 바이러스와 관련된 회색 이야기, 땅과 관련된 이야기들 뿐입니다. 모든 단어가 눈물을 담고 있다고는 해도, 요즘 우리 주위를 떠도는 단어들은 모두 눈물 항아리들을 하나씩 달고 있습니다. 올 봄이 이럴 것이라고 지난 겨울에 상상이나 했을까요?

레비탄은 15세가 되던 해 어머니가, 18세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납니다. 이후 그는 극심한 가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돈이 한 푼도 없어 친척 집이나 친구 집에서 잠을 잤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경우엔 학교의 빈 강의실에서 잠을 잤습니다. 학교 야간 경비원들이 그런 그를 보고는 경비원 숙소에서 재워주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학교는 그가 보여준 재능과 성취를 감안하여 학비를 면제해 줍니다.

들판의 저녁 Evening in the Field 1883 oil on canvasⓒTretyakov Gallery

해가 지고 난 하늘엔 미처 떠나지 못한 남은 빛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둠이 들판을 건너 오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쟁기질하는 농부는 아직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정리해 놓으면 내일 일이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지평선 위의 구름도 조금씩 빛을 잃어가고 어둠을 예감한 새들도 서둘러 잠자리를 찾고 있는 것을 보니 이제 일을 마무리할 때입니다.

레비탄의 초기 풍경화는 서정성이 가득 담긴 소위 무드 풍경화였습니다. 그렇지만 점점 자연과의 교감이 강해지면서 그의 풍경화엔 사람과 자연에 대한 깊은 사색이 담기기 시작했습니다. 레비탄의 풍경화가 단순히 풍경화에 머물지 않는 이유입니다. 시와 음악을 좋아했고 야외에서의 작업을 늘 고집했던 그는, 자연을 향한 그의 감성을 그림 속에 녹여 넣었습니다. 자연주의적인 화풍을 유지하던 레비탄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부터는 인상주의적인 화풍을 쓰기 시작했고 주제도 달빛이 비치는 풍경, 여명, 고요한 마을의 모습 등을 즐겨 소재로 다뤘습니다.

영원한 평화 위에 Above the Eternal Tranquility 1894 oil on canvas 95cm x 127cmⓒTretyakov Gallery

화면 정면에 거대한 검은색 구름 덩어리가 솟아 있습니다. 화면의 오른쪽과 왼쪽에서 흘러온 강물이 언덕 위 성당 앞에서 하나로 모였습니다. 언덕 밑의 바다처럼 넓은 회색 강물을 보면 얼마 전까지 많은 비가 내린 듯 합니다. 세상은 회색이 절반을 차지하지만, 풍경은 갓 씻어낸 과일처럼 맑습니다. 검은 구름이 다가오는가 싶어 하늘을 봤더니 그 뒤의 높은 하늘이 곧 날이 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넓은 지평선과 구름 그리고 거대한 물줄기를 보며, 레비탄이 이 그림을 통해 혹시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왜소한지 알고 있니? 자연 앞에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무상한지 알고 있니?’ 레비탄의 작품 중에서 가장 철학적인 작품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부터 레비탄은 자신이 심각한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그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말년엔 평생 친구였던 체홉의 집에서 지냈는데, 심한 감기와 열을 앓다 마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운명하기 전 동생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편지를 다 태워버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림 외에는 남길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1979년, 소련의 천문학자 류드밀라 바실리우나 주라울료바는 새로 발견한 소행성에 ‘3566 레비탄’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레비탄은 지금 하늘에 떠서 ‘가는 봄날’을 보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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