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의 종말] 개방 농정의 함포 소리 ‘우루과이 라운드’

1993년, 한국 정부가 받아 온 UR협상 농업 부문 성적표는 참담했다

1980년 노풍 피해로 국내 식량 사정이 극도로 악화일로를 걷게 되자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쌀 수입을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한국의 쌀 수급 균형이 깨졌음을 이미 알고 있는 곡물 메이저 회사들은, 그해 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과 지속적 수입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국내 수급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했던 정부는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쌀을 국제 가격보다 세 배 높은 가격으로 수입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국내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쌀을 수입했다. 그러자 쌀이 남아 돌게 된다. 이것이 '국내 쌀 생산 과잉'이라는 빌미가 되었고, 이후 국가가 쌀 수급 조절을 포기하는 수매제 폐지에 이르게 한다.

이 시기 농민들은 '함평 고구마 수매 투쟁'을 거쳐 '노풍 피해 보상 투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자주적 의식을 높이고 농민이 농정에 적극 개입하는 행보를 펼쳤다. 이런 실천 속에서 한국 농촌·농업·농민의 모습은 서서히 변해갔지만, 글로벌 자본에 의한 폐해는 피해갈 수 없었다. 외국산 연초 수입은 국내 담배 농가들의 몰락을 불러왔고, 이는 고추 과잉 생산으로 이어져 고추 투쟁이 진행됐다. 쌀농사 외 시설 채소나 과수, 축산을 병행하는 '복합 영농'을 주창한 정부 정책은 '수입소 파동'을 일으켰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농민들은 '수세 폐지 운동'을 통해 농민 권익 향상과 전에 없던 농민 운동의 성장을 일궜다.

이런 와중에 1986년 시작된 '우루과이 라운드'(UR, Uruguay Round)는 농민들에게 "우르르~꽝 라운드"라 할 만큼 충격적인 사안이었다. 모든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는 '개방 농정'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김영삼 정권은 대통령 직을 걸고라도 '쌀 수입' 만큼은 막아내겠다고 장담했다. 국민들의 충격도 대단해서 1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쌀 수입 반대 서명에 동참했다. 농민들은 국민적 동의를 얻어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한국 농민들은 새로운 무역 체계에 대한 논의는 알지도 못했고, 민주화 과정에서 진행된 농민 투쟁은 대부분 농업 내부 구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는 사이 세계화와 개방 농정이 발밑에 이미 도달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무역체제는 미국 주도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체제로 고정 되었다. GATT는 자유무역을 촉진시켜 세계 경제의 번영을 꾀할 목적으로 1947년 창설됐다. 선진국 간 공산품의 관세율 인하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농산물과 서비스, 지적재산권 등 공산품 이외 분야의 교역 비중이 크게 늘자 이런 분야를 포괄하는 새로운 다자 간 협상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념적으로는 냉전 해체 후 미국이 자본주의 승리를 바탕으로 세계 경제를 재편하는 과정이었고, 경제적으로는 당시 미국의 경제 불황과 쌍둥이 적자를 해결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특히 경쟁력 있는 농산물로 세계 농업을 재편하려는 것이 UR 농업 협상이었다. 그리하여 1986년 9월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Punta del Este)에서 새로운 다자 간 무역협상 개시를 위한 GATT 각료 회의 선언이 이루어졌다.

원래 우루과이라운드는 1990년 타결을 목표로 했지만 농산물, 지적소유권, 서비스무역, 섬유, 긴급수입 제한 등의 분야에서 각 국이 첨예한 대립을 보여 1991년이 되어도 타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특히 농산물 협상은 각 나라가 안고 있는 여러 특성과 협상 당사국 사이의 기본적 견해 차이로 인해 더 어려웠다.

교착 상태에 빠진 협상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1991년 12월 GATT 사무총장 둔켈(Dunkel)이 나섰다. 그는 7개 부문 별로 최종 의장안을 제시해 UR의 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1992년 11월 20일에 미국과 유럽공동체(EC)가 백악관 블레어하우스에 모여 UR의 최대 쟁점 중 하나인 보조금 감축 등에 대해 수정 합의에 이르렀다. 이어 1994년 4월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각국 간의 각료급 회의가 개최되어 세계무역기구(WTO) 설립, 정부 조달협정 등을 포함한 '마라케시 합의문'을 채택하며 최종 협정문이 조인되었다. 이로서 몇 년 간 끌어온 UR은 완전 타결되었다.

UR에서 타결된 내용은 모든 수입 제한품목의 자유화, 농업보조금 폐지, 이중곡가제 폐지, 영농자금 융자 중단, 수출보조금 철폐 등이었다. 그리고 세계무역기구의 설립에 대한 협상도 이루어져 'GATT 체제'를 대신할 ‘WTO'가 1995년에 출범했다. WTO는 GATT 체제가 포괄하지 못했던 농산물, 섬유, 무역 관련 투자 조치, 서비스 교역 등을 국제 무역 규범 내로 흡수하였고, 무역과 관련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법적 구속력을 대폭 강화하였다. UR을 끝으로 GATT의 활동은 끝이 났다.

WTO가 출범하면서 한국은 서비스 교역 성장, IT제품 수출 증가 등의 성과가 있었지만, '농산물 개방'이라는 초유의 사태도 맞이했다. 농사만 잘 지으면 그럭저럭 살아갈 것이라고 믿었던 농민들은 이 초유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망연자실 했다. 그래도 맥을 놓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투쟁을 준비했다. UR협상의 과정과 결과물들을 공부해, 대처해야 할 과제를 정리해 냈다. 생소한 무역 관계를 공부하니 그 말이 그 말 같고, 거기서 거기 같은 단어들에 주눅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기본은 투쟁의 정당성을 찾고 사회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1993년 2월 15일 서울 동국대학교에서 열린 'UR 협상 거부 및 쌀 전량 수매 쟁취를 위한 전국농민대회'의 모습.ⓒ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냥 앉아서 죽을 수 없었던 농민들은 서울로 모여들었다. 1993년 2월 15일, 동국대학교에서 'UR 협상 거부 및 쌀 전량 수매 쟁취를 위한 전국농민대회'가 열렸다. 농민들과 학생, 시민 등 2만여 명이 참가한 이날 대회는 'UR협상 거부'를 걸고 열린 최초의 대규모 대회였다. 당시 정부의 UR협상은 농민들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언론은 UR의 일부 측면만 보도하는데 그쳤다. 한국이 해외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만 강조하고, 농업 피해에 대해선 입을 다물거나 역 선전을 해댔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제는 쌀을 먹는 시대가 지났다'는 취지의 칼럼으로 UR을 지지하고 나섰다.

농민들은 이날 대회 결의문에서 '농가소득의 40%를 차지하는 쌀 시장을 개방하는 것은 600만 농민들의 생명줄을 끊는 것'이라고 선언한 뒤, 대통령에 취임하는 김영삼에게 취임식 전 쌀 시장 개방에 반대한다는 분명한 입장을 표명할 것을 요구했다. 이 날 대회엔 유럽과 미국의 농민 대표도 참석했는데 이들은 한국 농민을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미국 대농들만의 이익을 위한 UR은 유럽은 물론 미국의 소농까지 몰락시킬 것이며 지구 환경 보전을 위해서도 쌀농사를 늘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민들은 대회 이후 장충단 사거리와 동대문을 거쳐 동숭동까지 평화 행진을 벌이며 시민들에게 결의문을 나누어주는 등 심각한 상황을 알리는 활동을 벌였다. 이 날 대회는 경찰과 별다른 충돌 없이 끝났지만 사태는 지속적으로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전농은 단식투쟁과 토론회, 지역 대회 등을 통해 꾸준히 투쟁 역량을 높였고, 그해 11월에는 쇠사슬로 몸을 묶은 농민들이 청와대와 국회로 진격하는 처절한 투쟁을 벌인 후 전원 연행되기도 했다. 그 무렵 187개 시민·사회단체와 농민단체, 학계가 연합해 '우리 쌀 지키기(UR 반대) 범국민 비상대책회의'를 꾸렸다. 12월 8일 전농은 농산물 수입 개방에 앞장선 정부 여당 인사 5인에게 '계유 5적' 딱지를 붙였다. 한국 농업 기반 붕괴를 초래한 이들을, 나라를 일제에 팔아넘긴 '을사5적'에 빗댄 것이었다. 대상은 민자당 대표 김종필, 국무총리 황인성, 부총리 이경식, 농림수산부장관 허신행, 외무장관 한승주였다. 실제 당시 협상 과정에서의 정부 대응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총리와 장관 두 명을 경질하는 것으로 책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은 이후에도 UR 반대 투쟁을 이어갔다. UR로 한국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분야가 농업이었기 때문이다. 평택 농민들도 그해 가을 추수를 앞두고 투쟁의 대열을 꾸렸다. 평택 서부지역이며 당시 평택군 중심인 안중 장날 장터에 모여 성명서를 낭독하고 삭발을 하고 손가락을 찔러 혈서를 쓰며 투쟁의 수위를 높였다. 300여 농민들이 시장에서 안중 농협까지 행진을 하며 개방 농정에 항의하고 농사의 종말을 예고하는 제사상을 차리고 축문을 낭독했다.

농민들의 걱정과 분노는 그 어느 때 보다 높았다. 지역에서의 집회는 낯선 것이었지만, 도무지 농업 정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종잡을 수 없는 상황 인지라 다들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 정책에 대한 항의도 항의지만 서로 간의 안부를 묻고 분노를 공유하기 위해, 해가 서산을 벌겋게 물들이는 순간까지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시위와 기자회견, 항의 방문, 삭발, 단식, 농성을 거듭하며 농민들이 저항할 때, 정부는 무엇을 했던가. 당시를 떠올려 보면 정부가 UR 협상을 우려한다는 뉴스는 1989년에야 비로소 등장한다. UR협상이 1986년부터 진행됐음에도 정부의 대처는 어정쩡한 것이었다. 협상장에서 제대로 의견을 개진하지 못한 한국 정부는 UR에서 가장 낮은 성적표를 받았다고 비아냥 대는 소리나 들어야 했다. 1991년이 되자 부랴부랴 농업 후계인력 매년 1만명 선정, 농지의 기계화율 상승, 대도시 근처에 도매시장 13개소 정비·개소 등을 하겠다고 나섰다. 황인성 국무총리는 1993년 12월14일 삼청동 총리공관서 UR 협상 관계 장관 조찬간담회를 갖고, 농촌에 대한 강력한 구조조정안을 내놓았다. 이 안은 이후 농촌의 급속한 인구 감소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바로 다음 날인 15일이 UR 협상 타결일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1993년 12월 9일 쌀 개방 관련 특별 담화 발표를 보도한 기사ⓒ사진 = 당시 경향신문 지면 갈무리

김영삼 대통령은 쌀 개방을 막지 못했으니, 결국 대국민 사과를 하기에 이른다. 1993년 12월 9일 발표된 청와대 춘추관에서 발표된 특별 담화 일부와 이에 대한 보도를 보자.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그동안 우리 쌀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으로써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그러나 국민에게 한 저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데 대하여 그 책임을 통감하면서 국민 앞에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동안 우리 쌀을 지키기 위하여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성원해 준 국민 여러분께 더욱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쌀 시장 개방에 불가피성을 설명한 이후) 쌀을 지키기 위해 'GATT를 탈퇴하고 국제적 고아로 혼자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GATT 체제를 수용하면서 세계화·국제화·미래화의 길로 나갈 것이냐'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저는 과연 국가 이익이 무엇인지를 놓고 대통령으로써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두 가지 길 가운데서 고립보다는 가트 체제 경쟁과 협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쌀 시장 개방에 따른 획기적인 농촌 대책을 수립하겠다고 밝히고 농산물 개방과 관련한 이익을 농민에게 돌리고 농가 보상과 농지를 비롯한 농업 관련 제도와 구조 개혁 등 종합적인 대책을 세워 실제로 우리 농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우리의 농업 우리 농촌 우리 농민 대책을 철저히 세워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쌀 시장 개방을 통해서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 무서운 각오로 우리 경제를 살리고 농촌을 새롭게 일구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우리 농업의 끝이 아니라 우리 농업의 새로운 출발이 되도록 하자고 강조했습니다"

1994년 2월 1일, 농민대회가 다시 열렸다. 그날의 농민대회는 필자의 기억에도 생생히 남아있다. 전농 등 9개 농민단체 회원과 학생, 시민 등 4만 여 명이 모여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UR 재협상쟁취, 국회비준거부와 농정개혁을 위한 전국농민대회'를 개최했다. 대회에서는 8개 항의 주요 요구 사항이 발표됐다. 협상 무효 선언, 이행계획서 제출 중단, 사대 매국 내각과 민자당 지도부 사퇴, 거국 내각 구성 등이 요구사항에 포함되어 있었다. 상황이 국가비상사태에 준한다고 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농민 뿐 아니라 시민들의 분노 또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의 집회에선 경찰과의 충돌이 있었다. 종로가 완전히 시위대에 의해 점거됐고, 일부 순찰차와 전경 버스가 불에 타기도 했다. 행진을 막는 전경들과 몸싸움이 붙어, 시위대가 전경 대열을 무력화 시키고 무장 해제 시키기도 했다. 시위는 저녁 늦게까지 산발적으로 이어졌고 흥분한 참가자들에 의해 일부 취재 차량과 청소차도 불에 타고 파손되었다.

이날 투쟁은 이후 신자유주의 개방농정에 맞서 농민들이 벌여야 할 기나긴 싸움의 서곡이었다. 소위 문민정부가 시작한 세계화라는 이름의 제국주의와 자본의 미친 질주에 맞서는 긴 싸움이 예정되어 있었다. 농민들은 투쟁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을 들이키고는 땅으로 돌아가 또다시 땀 흘려 씨앗을 뿌렸다. 농지가 남아있는 한 그만두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듬해에도 농사를 짓기 위해 또 힘겨운 투쟁을 계속해야 했다.

한국 정부가 받아 온 UR협상 농업부문 성적표는 참담했다. 개도국 지위를 얻어내며 치러야 할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15개 기초농산물을 전혀 지켜내지 못했고 개방 조건도 엄청나게 불리했다. 15개 비교역품목(NTC, Non-Trade Concerns, 수입 개방에 따른 요구를 수용할 수 없는 농수산물의 품목) 중 쌀과 곡물(보리, 고구마, 감자, 콩, 옥수수)만 관세 상당치(Tariff Equivalent, TE, 비관세 조치된 물품에 다시 관세를 부과할 때, 그 과세액으로 삼기 위하여 정한 금액) 개방으로 인정받았을 뿐이다.

일부 유제품(유장분말, 버터, 전지·탈지분유)과 고추, 마늘, 양파, 참깨 등은 한도양허(Ceiling binding, 일반적인 관세상당치 계산 방법 대신 협상에 의해 결정되는 특정세율로 양허하는 방식) 관세로 개방하고 쇠고기, 감귤, 돼지고기, 닭, 치즈 및 조제 분유(5개 기초농산물)는 실행 관세(Applied Tariff, 통관당국에 의해 국경에서 실제로 부과하는 관세)로 개방하도록 결정되었다. UR 협정문 대로 해도 관세상당치로 부과할 수 있으나, 미국과의 쌍무 협상에 실패해 이 같은 결과가 발생했다. 결국 한국 농업은 그야말로 뿌리째 뽑혀나가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 외 50여 개 국제수지(BOP, Balance of Payments, 일정 기간 동안 한 나라가 다른 나라와 행한 모든 경제적 거래를 체계적으로 분류한 것) 보호 품목은 1995~97년 사이 일반 관세로 완전 개방하는 것으로 협상했다. 이는 일본보다도 훨씬 불리한 조건으로 개방 압력에 굴복한 것이다.

또 민족 내부 간 거래 원칙을 GATT로부터 공식 허용 받지 못했다. 남북 간 '기본합의서'에서 합의한 민족 내부 간 거래 원칙을 명문화하지 못해, 남북한 농산물 거래, 특히 쌀의 교류에서 장애를 초래하였다. 이는 미국에 대해선 사대적으로 접근한 것이었으며 EC에 대해선 적절한 대응을 못한 것이었다. 협상의 전 과정에서 미국 눈치보기에 급급해 수출 보조금에 대해 삭감은 요구하지도 못했다.

정부는 UR 협상 초반 6년 간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정부는 통상 전문 지식과 경험이 부족했고, 통상 관료의 전문성은 결여됐다. 협상에 대한 전략적 대응방안도 마련되지 않았다. 시종일관 미국 등 협상주도국에 끌려 다녔다. 문민정부 자체적으론 긍정적 평가를 내렸지만, 외국 언론에서는 '한국이 UR 협상에서 가장 실패한 나라 중 하나'로 보도됐다.

UR협상은 이렇게 국민적 저항을 받았지만 무능한 정부에 의해 타결 됐다. 이후 본격적으로 밀려온 개방의 파고를 넘어야 하는 농민들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일부 언론의 협상 과정에서의 군불 때기, 기득권 수호에 앞장선 일부 경제 학자들의 '비교우위론'은 우리 농사의 종말을 고하는 데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 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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