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성문 밖 사람들

학교 근처에 ‘성문밖교회’라고 있었다. 노동사목과 민주화운동으로 유명한 곳인데 어렴풋이만 알았다. 종교를 믿지 않지만 일종의 교외활동으로 기웃거리던 청소년단체에서 희년이란 말도 그때쯤 접했다. 세상의 불공평함이 풀리는 ‘정의구현의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가 생긴 것도 그 시절인 듯 하다. 그래서인지 성문밖교회 이름을 들으면 외화에서 본 머리 풀어헤친 예수님이 부패한 성문 안을 때려부수는(?)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물론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공평과 정의라는 따사로운 햇볕도 창문 커다란 아파트와 마당 넓은 저택을 오가는 것이지 쥐구멍에 드는 것은 아니라는 이치를 깨달았다. 아파트도 저택도 아닌, ‘기생충’의 반지하 같은 곳이 오늘의 성문 밖이다. 냉소를 새삼 곱씹게 하는 것은 요근래의 이재용 사면론이다. 이명박, 박근혜는 강력한 불가론이 버티고 있고, 언론도 사면의 근거를 별달리 내놓지 못하니 제쳐두자. 이재용 삼성 부회장에 대해서는 사면 안 하면 나라 망할 것 같은 ‘보도 폭격’이 자행되고 있다.

이재용이 없어 반도체 전쟁에 패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더니, 부족한(?) 백신을 구해오기 위해서도 그의 글로벌 인맥이 필수란다. 동정론도 빠질 수 없다. 옥중에서 맹장염을 앓은 그가 의료진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둘러 수감생활로 복귀했다는 보도가 나오더니, 재판 날에는 ‘이재용 수척’기사가 포털을 덮었다. 하나하나 거론하기도 거시기한 기사가 산처럼 쌓였다. 저런 기사를 쓰면 두고두고 부끄럽지 않을지 걱정인데, 눈에 띌수록 ‘마일리지’가 더 쌓이는지 언술이 경쟁적이다.

줄이어 올라오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 관련 기사들. 2021. 04.28ⓒ사진 = 포털사이트 네이버 뉴스 검색 화면 갈무리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삼성 일가의 상속세 납부와 사회 환원 발표. 상속세 액수야 유산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고, 똑바로 안 내면 처벌 받을 것인데 구국의 결단인양 헌사가 난무한다. 감염병 대응과 어린이 환자 치료를 위해 1조원을 내고, 수조원에 이르는 국보급 미술품을 기증하기로 했다는 소식에는 칭찬일색이다. 상속세와 전혀 별개의 사회환원을 묶어서 발표한 속내가 뻔하지 않은가. 그러나 기사를 읽다보니 내 인식과 감정이 고장난 것인지 의심이 들 지경이다.

이재용이 왜 벌을 받아야 하는지는 판사님이 길게 정리해놨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회계조작이라는 또 한 건의 중대범죄에 연루돼 재판 중인 것도 공지의 사실이다. (안할 도리가 없는 상속세 납부를 제외한) 이번 선행은 과연 앞의 두 범행의 처벌과 무관한,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것일까. 이재용 부회장이 실행을 통해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나를 비롯한 이들의 착각과 무지를 깨우쳐주기 바란다.

만약 삼성의 이번 언론플레이가 사면을 위한 ‘대국민 로비’라면, 그래서 이 시도가 성공한다면 어찌 되는가. 돈으로 쌓은 성채 안과 밖 전혀 다른 세상에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산다는 것이 확인되는 셈이다. 준엄한 법집행과 행위에 따른 처벌은 성문 밖 사람들 전용이 된다. 성 안의 사람들에게는 상속세 납부와 미술품 기증이 횡령죄와 뇌물죄의 처벌 수위를 대폭 낮춰준다는 규칙이 적용된다.

아직도 삼성의 매출과 수익 실적이 좋다는 것과 이재용 사면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다. 어쩌면 21세기 한국의 대다수 서민은 ‘삼성문 밖’의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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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철 기자 응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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