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화 칼럼] 유랑하는 노동과 삶

장소 상실의 시대

“장소 상실placeless은 한때 특정한 범주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상황으로 인식되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물론 원래의 장소에서 뿌리 뽑혀 내동이쳐지는 경험은 근대가 무수한 이들의 기억 속에 남긴 근본적인 충격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대는 역으로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시대가 열렸다고 선전함으로써 이 외상적인 경험을 효과적으로 은폐하였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중

미국에서 대공항 이후, 도시 실업자들과 날씨 영향으로 농사를 망친 농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서 캘리포니아로 이동한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대농장의 극심한 착취였다. 이러한 사회 문제를 잘 표현한 소설이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다. ‘분노의 포도’의 노동자들 이주가 21세기에 재현되고 있다. 2008~2009년 경제 위기는 노동자들의 정주적 삶을 중단시켰다. 노동자들은 단기 일자리를 찾아서 미국을 이동한다. 이들 대부분은 안정된 일자리에서 제외된 취약한 노동자들이다. 이들을 일자리로 연결하며,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밴이다. 그래서 이들을 van-dweller라 부른다.

존 스타인벡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분노의 포도’ⓒ자료사진

이러한 밴 생활자를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는 숙연하게 담고 있다. 영화는 주인공 펀이 밴을 타고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남편과 일하던 공장이 폐쇄되고, 그들이 살던 광산촌은 우편번호가 없어질 정도로 텅 비어갔다. 결국 혼자 남게 된 펀이 알바 일자리를 찾아서 떠난다. 누구도 자유와 해방의 이름으로 그녀의 출발을 축복하지 않는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정주할 수 없는 여행이다. 영화 초반에 지인의 딸이, 펀에게 아줌마는 homeless(노숙자)냐고 묻자, 펀은 자신은 노숙자가 아니라 houseless라고 답한다. 어쩌면 그녀의 밴 생활은 집 없는 홈을 찾아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펀의 첫 일자리는 아마존의 물류 창고이다. 아마존은 성수기인 연말연시에 일할 단기 노동자를 고용한다. 펀은 아마존이 제공하는 주차 장소에 밴을 주차하고, 아마존으로 출퇴근을 한다. 그녀는 오랜만에 일자리를 갖게 되어 기쁘다. 거기서 활기를 느낀다. 친구도 사귄다. 그녀는 불만이 없다. 페이도 좋다고 말한다. 펀은 아마존에서의 단기 알바 일을 마치고, 또 다른 일을 찾으러 고용센터로 간다. 하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2차세계대전 이후 성장과 안정을 가져온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직장이 제공하는 사회적 보장제도는 차치하고, 장기간 일자리를 지속하는 것조차 기대할 수도 없다. 중고령의 노동자인 경우는 알바도 찾기 힘들다. 예전에는 노동조합이 있고, 지역공동체가 있었다. 이런 것들이 있었던 물리적인 장소로부터 그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장소를 상실한다는 의미는 안정된 일자리와 익숙한 관계, 문화로부터의 단절이다.

노매드랜드는 21세기 미국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얼굴, 평생 노동하여 퇴직 후 연금으로 살아가리라 믿었던 미국인의 꿈이 깨어진 후의 모습, 중산층의 상징인 집이 없는 나이든 노동자들의 생활을 이야기한다. 연금으로는 부족하여 생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 이들은 아마존 물류 창고, 비트 농장, 국립공원, 패스트푸드점 식당 등에서 알바로 일한다.

이주노동자라는 개념은 한국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나, 특정한 범주의 노동자 즉 건설노동자, 계절농업노동자 등으로 한정지어 사고해왔다. 그러나 ‘분노의 포도’와 ‘노매드랜드’처럼 경제 위기가 올 때마다 많은 노동자들은 이동을 강요당한다. 자본도 이주를 하지만 그들 자신의 장소와 지위를 만든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은 자신의 장소를 만들기 힘들다. 영화는 장소 상실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심스럽게 묻고 있다. 이 영화는 노동문제를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는, 밴에서 유랑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인생 후반기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영화다.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 스틸컷ⓒ영화 스틸

중년 여성 노동자가 찾은 비전통적 관계

펀의 성격은 내성적이며, 흥분하는 적이 없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녀가 유일하게 화를 내는 장면이 있다.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라 할 수 있는 동생 집에서 일어난다. 밴이 고장나서, 수리비가 필요한 펀은 캘리포니아의 동생에게로 간다. 돈을 빌리기 위해서이다. 중산층이 모여 사는 지역은 펀이 태어났고 자란 곳이었다. 노동자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살던 곳이었다. 동생은 여전히 중산층으로서 삶을 살아간다. 식사자리에서 동생과 친구들은 ‘부동산 투자, 대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주 가벼운 대화다. 우리나라 중산층의 대화와 다를 게 없다. 그것을 듣고 있던 펀이 흥분해서 말한다. “사람들이 평생 모은 돈을 투자하라고 하고, 그것도 빚을 지어서. 갚지도 못할 집을 사라고 하고. 그래서 집도 잃고.”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자살까지 생각했던 유랑인 동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때 식탁에 있던 한 명이 “우리가 너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나라는 거냐”고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캘리포니아 가족과 그 친구들에게 펀의 밴 생활이 모험적이면서도 동시에 무책임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들은 일자리를 찾아서, 대출 때문에 집을 잃고 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고충을 모른다. 그녀는 같이 살자는 동생의 제안을 거부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으로서 그 제안이 유혹적이긴 하지만 거부한다. 거부한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삶과 맞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영화 중반을 넘으면서 펀의 변화가 눈에 띄게 일어난다. 연말이 되어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다시 일하게 되지만 처음처럼 활력이 넘치지 않는다. 다른 알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노동이나 삶의 비참함에 집중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름답게 포장도 하지 않는다. ‘분노의 포도’처럼 저항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녀 주변에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들은 노동운동의 외곽에 있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그녀가 친밀함을 느끼는 곳은 유랑인들의 모임이다. 애리조나에 있는 유랑인들의 공동체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녀는 방관자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두 번째 방문에서는 그녀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 속에서 동료의식을 갖게 되고, 길에서 떠나고 다시 만나는 유랑인들의 관계에 진심으로 다가간다.

유랑인 모임 이후 그녀는 자신이 살았던 네바다 광산촌으로 돌아온다. 영화 초반에 보이지 않던 주인공의 집이 보인다. 외양은 괜찮아 보이지만 텅 빈 집. 뒷마당 너머의 사막이 보인다. 그녀가 그리워하던 풍경이었다. 마치 마지막 의식을 취하러 들른 것처럼 집을 돌아보고 그녀는 다시 떠난다. 그녀가 처음 떠날 때와 다른 이별이다. 펀에게는 몇 번의 정주 기회가 있었으나, 밴 생활자로서 삶을 선택한다.

밴을 타고 이동하는 생활자로서의 길은 중산층처럼 자발적으로 낭만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생존하기 위한 강제적 선택이었다. 그러나 펀은 그 생활을 긍정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이제는 다른 삶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제는 임시가 아닌 항상적인 밴 생활자로 의지가 보인다. 마치 자신을 내팽개친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대한 작은 저항의 표시를 하는 듯하다. 이동하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사막, 황량함은 종교적 분위기까지 풍긴다. 나이 60을 훌쩍 넘은 여성이 혼자 달린다. 어쩌면 나이가 주는 용기인지 모른다. 불안하지만 나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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