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어버이날 아침 집 앞 골목에서 폐지를 줍는 한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당시 할아버지의 연세는 95세. 아직 살아 계시면 딱 100세가 되었을 테다. 그는 젊어서 술, 담배 한 번 입에 안 대고 동대문에서 포목 장사를 하며 딸 6명을 키워낸 장한 아버지였다. 그런데 오랜 시간 암 투병하던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할아버지에게 남은 건 쇠약해진 육체와 할아버지와 함께 늙어버린 자식들뿐이었다. 할아버지는 굽은 허리로 자전거를 힘겹게 끌면서 폐지 줍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고 계셨다. 당시 폐지 1kg당 가격은 50원 정도. 그래도 약값이라도 벌기 위해 폐지 줍는 일을 안 할 수는 없다는 할아버지였다.
안타까운 마음에 인근 교회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으나, 할아버지는 웃으며 거절하셨다. 이미 2년간 인근 대형교회에 출석해 보았지만, 교인들의 무관심에 발길을 끊었다는 것이었다. 행색이 초라한 할아버지를 2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이다.
어버이날이 되면 이 할아버지가 불현듯 떠오르곤 했다. 떠올리면 의아했고 또 씁쓸했다. 할아버지가 2년간 출석했던 교회는 어버이주일이면 일정 연령 이상의 교인들을 대상으로 미용봉사와 식사 대접을 하고 용돈까지 드리곤 했다. 또 이웃돕기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을 자랑처럼 여기곤 했기 때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가정의 달을 맞아 교회들이 나눔 문화 확산을 위해 저소득층 어르신들에게 후원품을 전달했네, 음식을 나눴네, 하는 보도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한 개신교계 매체는 어버이날의 유래가 교회에서 시작됐다는 점도 강조했다. 하지만 그런 기사에 별로 감동은 없다. 이미 한국교회 내 많은 기부 또는 봉사가 얼마나 형식적인 겉치레가 되었는지, 자기 위안과 만족의 수단이 되었는지를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부나 봉사라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일부 교회들이 기부와 봉사, 이웃 돌봄을 양심 세탁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입막음용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2021년 세습을 드디어 완성했다는 정신승리를 이룬 명성교회(서울 강동구)의 한 장로는 “우리교회가 하는 좋은 일들을 기억해 달라. 홀 사모를 그렇게 많이 돕는 교회가 또 있느냐”며 읍소하곤 했다. 세습강행과 재정의혹을 비판하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교인들은 전혀 돌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또 취재나 시위에는 폭력으로 답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세습을 강행한 원로 목사가 얼마나 권력자와 친한 분이었는지, 전직 대통령 전두환 씨 내외 방문에 꽃다발을 안기고 국가조찬기도회에서는 박정희를 찬양하는가 하면 국정농단으로 성난 민심 앞에서 “박 대통령의 아빠와 엄마는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이 지상에서 그렇게 비참한 불행과 슬픔을 경험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5천만 민족 가운데 가장 큰 상처를 받았다”라며 권력에 대한 동정여론을 호소했다.
불우이웃에게 밥은 주지만 불평등 해소에는 관심이 없고, 아니 오히려 기득권의 권리 보장을 위해 협력하는 교회들, 스스로 기득권이 된 교회들이 내놓는 ‘우리가 얼마나 기부를 많이 하는데’라는 모순적 주장은 전형적인 한국 부자들의 레퍼토리다.
‘기부왕’ 위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의 둘째 아들인 피터 버핏이 2013년 8월 뉴욕타임즈에 “기부가 세계의 불평등과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했으며 부자들이 그들의 부에 대해 만족하게 만드는 데만 기여했다”고 비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그는 사회 불평등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이 기부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비판하는가 하면, 일부 기업인이 기부를 인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성공적인 투자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부가 불평등의 근본 원인과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으며 부자들이 그들의 부를 기쁘게 여기는 데에만 기여하고 있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딱 한국의 부자 교회들에 대한 일침으로 들린다.
하기야 얼마 전 마땅히 냈어야 할 상속세를 이제야 냈을 뿐인데, ‘통큰 기부’를 했다며 언론의 칭송을 받은 이건희 회장도 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래도 교회가 이 정도는 아니지?’라고 생각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교회는 세습을 해도 상속세 하나 내지 않는다.
종교는 한 사회의 축소판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나’를 완전히 내어줌으로써 부활의 영광에 이른 예수를 닮는 대신 사회적 책무를 저버리고 각종 꼼수와 탈법, 불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부자들의 모습을 닮고자 하는 건 우리 사회 전체의 불행이다. 그래서 교회에도 똑똑한 소비자와 윤리적 소비행태가 시장을 지배하는, 건강한 소비자들의 주권자적 마인드가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디자이너에 의해 만들어진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거나 쇄신시키기 위해 기부를 수단화하는 기업에게 더이상 속지 않고 가치를 보고 소비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난 것처럼 말이다. 비윤리적 기업의 물건을 불매하는 것처럼 헛소리 설교는 과감히 차단하고 기업의 윤리적 평가 비교 후 물건을 구매하는 것처럼 교회를 선택할 때는 운영 철학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단순히 복을 빌러 나가는 곳, 공동체 구성원들과 교제하는 곳으로 교회를 드나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얼마나 건강하게 사회참여를 하고 헌금을 유용한 곳에 쓰고 투명하게 관리하는지를 따져야 할 것이다. 또 윤리적 소비자가 생산자와 판매자에게 윤리적 필요에 대해 교육하도록 노력하는 것처럼 사역자들에게 교회의 본질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건강과 환경, 인권과 노동문제, 빈곤, 기업의 윤리문제, 지역사회의 경제 등 다양한 윤리적 관점을 가지고 함께 행복한 소비를 고민하는 윤리적 소비자와 같은 행동이 가장 필요한 곳은 어쩌면 오늘날 한국교회다.
그런데 당장 소비자들의 눈이 너무나 많이 가려져 있고, 길들이기에 익숙해져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는 상황이니,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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