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용환의 역사로 생각하기]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왜곡할 때

“독재자의 장기 집권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민중 간의 투쟁”

반세기를 허비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전형적인 구도이다. 독재자는 국가 권력을 활용하여 민중을 억압하였고 민중은 운동이라는 방식을 통해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 후 이 구도는 근본적으로 깨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권력자는 권력을, 민중은 광장을 기반하여 ‘민주주의적 갈등’을 벌인다는 경험적 명제는 그다지 의심받지 않았다. 이런 ‘싸움의 기술’은 민주주의와 시민혁명의 교과서인 프랑스 대혁명(1789)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루이 15세를 비롯한 절대 군주의 잔혹한 통치 행위와 제3계급의 저항, 민중은 바스티유 습격 사건으로 군주제와 신분제를 무너뜨린 후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군대를 동원하여 군사 쿠데타(1799)를 일으키면서 공화국은 위기를 맞게 된다. 다시 7월 혁명(1830)과 2월 혁명(1848). 이승만과 4.19, 박정희와 부마, 전두환과 5.18. 유럽의 시민혁명과 한국의 민주주의는 상당히 유사한 과정을 띄었다고 할 수 있다.

민중의 욕구와 필요를 채우며 권력을 잡은 무솔리니

혁명 이후 유럽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의외의 인물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를 만나게 된다. 그들이 파시즘, 나치즘 같은 극단주의의 선봉장이라는 것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유태인 학살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그 전에 그들은 어떻게 권력을 잡았을까? 무솔리니와 히틀러 등장의 배경에는 새로운 사회 환경이 한몫했다. 무능한 민주주의. 19세기말, 20세기 초반 온갖 현실 문제 앞에 민주주의는 극도로 무능했다. 정상적인 절차적 민주주의가 운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법과 정책의 결과는 민중의 삶을 개선시키지 못했다. 자본가들과 대기업만이 나날이 번창할 뿐.

무솔리니와 히틀러ⓒ자료사진

더구나 1차 세계 대전(1914~1918)이 터졌다. 전쟁은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가. 전쟁을 방기한 기성세대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를 혐오했다. 기성세대는 후방에서 목숨을 지켰고 아무 책임도 없는 어린 청춘들만이 전선에 희생되지 않았던가.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파시즘에 경도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중산층이 돌아서기 시작했다. 소위 이탈리아 파시즘의 상징처럼 이야기되는 ‘포 계곡 사건’. 1920년 포 계곡 일대의 지방 정부는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하였다. 이들은 임금 인상, 작업 환경 개선 등을 강제하며 노동자들을 위한 농장 정책을 추진한다. 우파 민주주의자들 역시 선거에서 승리한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할 이유도 명분도 없는 상황. 농장주들은 파시스트들에게 의탁하기 시작한다. 파시스트 행동대는 1920년 11월 21일을 기점으로 폭력 행동에 나선다. 사회주의 진영의 사무소를 약탈하거나 신문사를 불태우고 운동가들을 위협하였다. 농장주들의 권리를 옹호하였지만 동시에 소작농들의 일자리와 농토를 구하면서 여러 계급의 현실적 문제에 기민하게 대처하였고 그만큼 파시스트 세력은 커져갔다. 이념적 무용성도 한몫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이 대안처럼 이야기했던 집단농장, 그 장기적인 비전은 당장의 먹고살기와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정치운동에 집중되었다. 초기 이탈리아 파시즘 운동은 좌파 사회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하지만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성격은 쉽사리 변모한다. 로마 가톨릭을 멸시했던 무솔리니는 ‘로마의 라틴 전통과 제국주의 전통’에 부합한다면서 종교를 옹호했고 ‘민주공화정’을 비난했지만 민족주의를 강조하면 민주공화정을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을 마다않았다. 그는 열렬한 대중적지지 가운데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이를 두고 통상 ‘대중 동원 쿠데타’라고 부른다. 대중 동원 쿠데타? 쿠데타는 군대가 하는 것이고 대중이 하는 것은 혁명 아닌가? 민주주의의 공식이 깨진 것이다.

중산층의 지지와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1당이 된 나치

비슷한 방식은 히틀러에게서도 반복되었다. 히틀러는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명쾌한 비전을 제시하였고 열광적인 지지 가운데 총선에서 제1당의 위치에 올라섰다. 그는 파펜이 주도하는 보수정당과의 연합을 통해 총리가 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이 계급 혁명을 이야기할 때 히틀러는 경제적인 풍요, 민족적 영광을 강조하였으며 동시에 유태인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였다. 당시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은 분열되어 있었다. 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가 붕괴한다는 믿음과 자본주의에 대한 적응 사이에서 오락가락했으며 심지어 노동자들의 이득을 위해 1차 세계 대전을 승인할 정도였다. 공산당은 오직 사회민주당을 공격했을 뿐이었으니 역동적인 야당사 그리고 극적인 집권은 히틀러가 이끄는 극우파 나치의 몫이었던 것이다. 보수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제학적인 논리에 근거하여 균형 예산, 재정 건전성, 통화 가치 하락 방어 등 원론적인 경제 행위에 집중하였을 뿐이다. 1932년 여름, 실업자는 620만명에 달하였고 그 중 대부분이 사회초년생이었다는 것 그리고 일시해고에 익숙한 블루칼라가 아닌 화이트컬러들 역시 실업 위기에 허덕이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보수주의자들의 정책은 피부로 와 닿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극단주의는 민주주의라는 토양에서 자란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에 관한 기억은 여전히 미국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극단주의자들이며 반유대주의자들이자 폭력을 선호하며 전쟁까지 불사하는 이해하지 못할 위협적인 인간들이라는 주장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근본적인 질문을 놓치고 있다. 왜 그러한 극단주의자들 곁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한쪽에서는 유사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총선에서 합법적으로 승리하는 왜곡된 민주주의적 결과가 이루어졌단 말인가.

2016년 11월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탄핵 5차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스마트폰을 켜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과거를 모르는 눈치 없고 투덜거리기만 하는 젊은 세대? 어차피 세월은 흐르고 각자는 자신들이 경험한 것 사이에서 새로운 기대를 품기 마련이다. 그것은 때로는 어리석음이고 위태로움이지만 그러한 단절이 없다면 역사는 여전히 구시대의 유산에 메여있을 것이다. 장기적인 비전이 없고 당장의 먹거리만 생각하는 감자 포대자루 같은 노동계층? 당장의 먹거리가 없는 상황, 경제적 지위에서 종합적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가장의 삶이 어떻다는 것을 정녕 모른다는 것인가?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말했듯 19세기가 ‘혁명의 시대’라면 20세기는 ‘극단의 시대’이다.

왜 극단적이 되었을까. 과거 100년간 만들어온 제도와 절차, 가치와 이상으로의 민주주의가 무용함을 넘어 새로운 세대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1987년을 기점으로 극적으로 성장해온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 이제 세대도, 입장도, 상황도 바뀌었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는 이상 민주주의는 충분히 부끄러운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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