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자라는 아빠] 아빠가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

양육자가 살아가는 모습과 태도가 아이의 삶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퇴근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아내가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햇살처럼 환한 아이는 없고 눈두덩이가 빨개진 아이가 소파에 앉아 있습니다. 울음을 막 그친 모양입니다. "아니, 수현아. 이게 무슨 일이야!" 옆에 앉으며 무슨 사연인지 물어봤습니다. 전기밥솥에서 '푸쉬~' 김이 빠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는 아까 어린이집 하원길에 마트에 들렀던 이야기를 해줍니다. 각자 원하는 걸 고르느라 엄마와 잠시 떨어졌나 봅니다. 그 몇 분 사이, 어떤 아이가 수현이를 가리키며 자신의 아빠에게 "아빠, 이 아이 여섯 살이야?"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빠는 "그런 것 같아"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를 들은 수현이가 '나, 일곱 살이야'하고 대답을 하려던 순간, 엄마는 다시 나타났고 그들은 카트를 밀고 코너를 돌아 가버렸습니다.

아이는 그게 얼마나 억울했는지 집에 돌아와서도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트에 돌아가 그 아이를 찾아 나이를 제대로 말하고 오겠다며 엄마에게 떼를 쓰고 울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아이는 또래보다 5~10cm 정도 키가 작아 종종 '여섯 살이냐' 혹은 '일곱 살치고는 작다'는 말을 들어오던 차였습니다. 나 역시 그 사실이 무척 신경 쓰이긴 했지만, 다른 아이와 키를 비교해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 신경을 써왔습니다. 그런데도 그간 당한 수모(?)가 이번 마트 일을 겪으며 터진 것이겠지요.

"아빠?" 아침에 늦잠 자고 일어난 수현이. 말로는 아빠 싫다면서, 끌어안고 자고 눈뜨면 제일 먼저 찾는다.ⓒ사진 = 오창열

나는 아이를 달랜 후, 다음에 이런 일이 있을 때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나, 일곱 살이야"를 말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속으로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엄마에게 좋은 점이 참 많지만, 키 유전자는 조금 미안하게 됐어. 우리 둘 다 학교 다닐 땐 키가 작아서 항상 1, 2번이었거든. 그게 뭐냐고? 불주사도 먼저, 악기 발표도 먼저, 숙제 검사도 먼저였다는 뜻이야'

이후 동네 약사님께 "어떡하면 아이 키가 잘 자랄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받은 조언에 따라 매일 밤 성장 마사지를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유전자가 허용하는 성장의 최대치에 도달할 수 있도록, 어쩌면 그 이상이 되기를 기대하면서요.

이제 아이는 마사지에 맛을 들여 매일 밤 자기 전 아빠를 찾습니다. 아이와의 유대감이 두터워진 것은 물론 아이가 더 빨리, 더 깊이 잠듭니다. 그런 아이를 보며 한편으론 '진작 해줄 걸'하는 후회도 듭니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이미 유전자는 선천적으로 배송 완료입니다. 이젠 후천적으로 물려줄 것에 대해 생각할 차례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에게 무언가 전해주고 싶다면, 이미 내게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물질적 유산이야 내가 죽은 다음 아이가 누리게 되니, 그것의 영향력이 어떨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바라는 건, 내게서 건너간 무언가가 아이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걸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라는 양육자가 살아가는 모습과 태도가 아이 삶 속으로 지금도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 어머니가 가진 가치관의 일부가 어린 나에게 전해져 온 순간이 기억납니다. 몇 살이었는지 모르는 언젠가의 크리스마스 이브. 그때 어머니와 나는 기다란 교회 예배 의자에 앉아있습니다. 저녁 8시쯤 되었는데, 창밖은 아주 캄캄해서 깊은 밤처럼 느껴졌습니다.

성탄 전야 예배 후 성경 OX 퀴즈가 진행되었습니다. 나는 성경 내용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지만 어쩌다 정답 쪽에 손을 들어 계속 살아남았습니다. 최종 생존에 가까워지니 사회자 옆 경품대에 올려져 있던 쌀 포대는 이미 내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찍기 운이 다해 곧 탈락하고 말았는데,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큰 목소리로 낙심했습니다. 그때 왼쪽에 앉은 어머니가 나를 위로했습니다.

"너무 아쉬워할 것 없다. 우리보다 더 필요한 사람한테 갈 거니까."
"엄마, 저거 우리 집이 제일 필요한 거 아냐?"

그때 복잡한 심경에 눈물이 찔끔 났는데, 퀴즈 탈락에 대한 아쉬움 때문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내 안에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고, 양보를 할 수도 있다는 개념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연못에 돌멩이를 던지면 '퐁당'하고 동심원이 멀리 번지듯, 어머니의 그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의 지름을 넓혔습니다.

그 일이 없었더라면, 훗날 고등학교 저소득층 PC 지급 대상으로 선정되었을 때 주변을 돌아보고 가정 형편이 더 어려운 친구에게 기꺼이 양보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아무도 몰라줘도 난 스스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욕심이 날 때 더 어려운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 어머니께 물려받은 유산입니다. 굳이 주려고 해서 준 것이 아니라, 어머니 안에 있던 반짝이는 불씨가 내게 저절로 옮겨왔던 것입니다.

아이의 첫 생일, 돌잔치를 열어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았던 날입니다. 돌잡이 접시라는 메뉴판 위에 판사봉이니 청진기니, 부모들의 희망사항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수현이가 세상과 연대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뜻을 품고 있던 아내는 이날 받은 축의금 전부를 아이 이름으로 시민사회단체에 기부했습니다. "조금은 남기지" 아내의 과감한 행보에 나는 아쉬워 입맛을 다셨지만, 이젠 그 뜻을 이해합니다. 이렇게 아내 마음속 불씨가 아이에게 옮겨가는 것이겠지요.

앞니 빠진 7살 수현이ⓒ사진 = 오창열

그래서 당사자에게 물어봤습니다. 엄마, 아빠의 어떤 면을 닮고 싶은지. 노란 수면등을 켜고 잘 준비를 마친 안방으로 아이를 불렀습니다. 마사지 받을 시간이라고 하면 '아빠, 더 놀래~', '이제 잘 시간이야!'하고 옥신각신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전에 받는 마사지가 최고니까요. 마사지를 받으려고 바르게 누운 아이의 발부터 꾹꾹 주물러주며 물었습니다.

나:수현아, 너는 엄마의 어떤 점을 닮고 싶어?
아이:천사 같은 모습을 닮고 싶어.
오~~ 좋아. 그렇다면 아빠에게선 어떤 점을 닮고 싶어?
못생기고 뚱돼지 같은 점?
아니, 진짜! 장난치지 말고.
아빠처럼 마사지를 잘하는 점.
오~~ 아빠한테 해주려고?(기대)
아닌데? 나중에 내가 낳은 아기한테 해줄 건데?

옆에 누워 대화를 듣고 있던 아내의 웃음이 빵빵 터집니다. 다시 물어봐도 아이는 아빠한테 마사지해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군요. 너무나 당당하고 굽힘이 없어서 또 한 번 귀엽습니다.

수현이가 아빠가 되어 자신의 아기에게 마사지해주는 상상을 하니 흐뭇합니다. 그렇게 되면 3대째 내려온 우리 집안 최초의 문화유산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아나요. 성장 마사지가 대대로 전승되면 작은 키 유전자의 한계를 조금씩 갱신하게 될지. 유전학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요.

오늘의 마사지 끝~!
오늘도 고마워~ 그런데 말이야, 나 태권도하고 와서 발 안 씻었다?
으악 뭐라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니?
이제 생각났어. 키득키득. (웃겨서 숨넘어감)
아, 참! 마사지 덜 끝났네. 얼굴 마사지해 줄게요 손님~
(다급히) 으아악~오창열 씨! 얼굴은 만지지 마세요, 오창열 씨!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뚱돼지라니요! 아이에게 각종 튀김과 맥주와 고기를 좋아하는 뚱돼지 같은 식습관을 그만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번번이 나의 의지력은 작고 귀엽습니다.

수현아, 아빠의 좋은 면만 골라 닮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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