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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열전④] 정년 앞둔 소방관 박해근, ‘소발협’에서 노조 건설까지

민중의례도 팔뚝질도 낯선 소방관들, 전국공무원노조와 함께 하는 까닭은?

지난 5월 11일 열린 민주노총 공무원노조 소방본부 준비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는 박해근 준비위원장ⓒ공무원노조 관계자 제공

“국민의례는 국가에 행사가 있을 때 하는 거고요. 노동조합에 행사가 있을 땐 민중의례를 하는 겁니다. 각각 그 상황에 맞게 의식을 하는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제일 어색해하시는 게 그거에요. 노래하거나, 구호를 외칠 때 팔뚝질을 하게 되는 데 처음엔 다들 어색해 하거든요. 팔뚝질이 무슨 특별한 기원이 있을까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엇을 외치고, 요구가 있으면 하는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삼삼오오 모여든 대전지역 소방관들은 행사를 앞두고 민중의례와 민중의례를 하며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노래를 부르거나 구호를 외칠 때 팔뚝질은 왜 하는 것인지 사회자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야간 근무를 마친 뒤 쉬지도 못한 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참석한 소방관들도 졸린 눈을 비비며 집중했다.

어색한 팔뚝질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민중의례를 마친 뒤 단상에 오른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소방본부 대전지역 준비위원회 준비위원 대표 최영재 소방관(대전 둔산소방서)은 동료 소방관들에게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하고, 팔뚝질할 때 아마 여러분들은 굉장히 어색하셨을 것이다. 저도 그랬다”고 고백하며 “우리에겐 단결권이 있고, 교섭권이 있다. 투쟁해서 우리 조합원 여러분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동료 소방관들이
민중의례에 대해서 처음엔
조금 거리감이 있었지만,
민중의례의 의미를 알고 난 뒤엔
대부분 반응이 긍정적이에요.”

지난 27일 오전 대전 동부소방서 4층 강당에서 전국공무원노조 소방본부 대전지역 준비위원회 출범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민중의례도, 팔뚝질도 낯설어했던 소방관들은 한목소리로 “소방관도 노동자다”라고 외쳤다. 이날 출범식 현장에 함께한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소방본부 준비위원장 박해근 소방관은 “동료 소방관들이 민중의례에 대해서 처음엔 조금 거리감이 있었지만, 민중의례의 의미를 알고 난 뒤엔 대부분 반응이 긍정적”이라며 소방 현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29년 경력의 소방위 박해근 소방관을 만나 소방관들이 노동조합 건설에 나선 배경과 소방관으로 살아온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27일 오전 대전 동부소방서 4층 강당에선 전국공무원노조 소방본부 대전지역 준비위원회 출범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민중의례도, 팔뚝질도 낯설어했던 소방관들은 한목소리로 “소방관도 노동자다”라고 외쳤다.ⓒ민중의소리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소방발전협의회 회장을 8년 간 하면서 많은 경험을 해왔습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과 초과 근무수당 소송도 함께 했습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협조해서 좋은 성과를 거뒀습니다. 2017년 ILO 사무총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소방공무원의 국가직 전환, 노동조합 건설, 인력 충원 문제와 관련한 공동제안문을 내주었습니다. 그 성과가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조직은 20%가 이끌어가지만, 그 조직을 지켜주는 80%가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부터 각 현장에 들어가 한 사람, 한 사람 조직에 나서겠습니다. 직접 제가 발로 뛰겠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73년 동안 무시됐던
소방관들의 노동권을 되찾다

지난 11일 정부세종청사 행정안전부 소방청 앞에서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소방본부 준비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서 박해근 준비위원장은 소방공무원 노동조합 건설을 위해 발로 뛰겠다며 각오를 밝혔다. 소방공무원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73년 동안 헌법에 명시된 노동 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보장 받지 못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소방관도 노동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당당하게 찾겠다는 선언의 자리였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박해근 소방본부준비위 위원장, 전호일 공무원노조 위원장이 5월 11일 기자회견에서 손을 모으고 있는 모습.ⓒ공무원노조 관계자 제공

소방공무원이 노동조합 건설에 나설 수 있게 된 건 지난해 말 관련법이 개정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9일 공무원노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소방공무원도 노조에 가입할 수 있게 됐다. 개정된 공무원노조법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기준에 따라 소방공무원의 노조 가입을 허용했다. 다만 소방공무원만의 별도 노동조합 건설을 허용한 것은 아니어서 공무원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형태로 노조 조직이 건설된다.

오는 7월 6일 법 시행을 앞두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공노총(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이 각각 조직을 건설해 소방관 노조 가입을 독려하고 있다. 전국공무원노조는 그동안 소방본부 건설을 위해 전국의 소방 직장협의회와 소통하며 광역단위 워크숍을 10여 차례 개최하는 등 준비위원을 모집했고, 지난 11일 공식출범을 선언했다. 지금은 광역별로 준비위를 띄우며 본격적인 조직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소방공무원의 평균수명
국민 평균수명 82세에
한참 못 미치는 69세…
소방관들에게 노조 건설은 생존권 투쟁

소방공무원들의 노동조합 건설은 생존권 투쟁이다. 소방공무원들은 그동안 노동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헌법에서 정한 노동3권이 보장되지 못하면서 열악한 처우를 개선할 기회가 없었다. 11일 열린 준비위 출범식에서 소방관들이 “해마다 수많은 동료들이 공무 중에 목숨을 잃고, 다치거나 외상후 스트레스로 쓰러져도 순직이나 공상을 인정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소방공무원의 평균 수명이 국민 평균 수명 82세에 한참 못 미치는 69세에 불과하다는 것이 우리의 엄혹한 현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며 “우리의 일터를 안전하고 존중받는 일터로 만들어나갈 것을 이 자리에서 엄숙히 선언한다”고 외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민주노총 공무원노조 소방본부 준비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서 출범 선언문을 읽고 있는 소방관들. 사진 제일 오른쪽이 박해근 준비위원장이다.ⓒ공무원노조 관계자 제공

“우리 소방공무원의 근무 환경과 대우는 다른 공무원과 비교해 열악해요. 그런데 이런 열악한 환경을 당연한 줄 알고 일해왔어요. 일반직 공무원은 노동조합이 있어서 고충 상담도 하고, 개선도 합니다. 하지만, 소방공무원은 그런 혜택을 누리지 못했어요. 소방공무원은 상명하복 조직이고, 제복공무원이다보니 명령에 불복하면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랐어요. 이젠 이걸 바꿔야 합니다. 우리 소방공무원은 그동안 조직이 없었어요. 직장협의회가 있지만, 한계가 많습니다. 이 한계를 넘는 조직은 바로 노동조합 뿐이에요. 그동안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왔어요, 이제 시작입니다.”

소방공무원 스스로 현실을 바꾸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졌다. 박해근 준비위원장은 “소방발전협의회 등이 노력한 덕분에 아직 미흡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개선을 했다”고 말했다. 소방공무원은 그동안 국립묘지에 별도의 묘역이 없었지만, 지난 2012년 법 개정을 통해 묘역이 설치됐다. 아울러 화재, 구급, 구조 과정에서의 순직 외에는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했던 것도 개정돼 대민 출동, 소방관 활동과 연관 있는 질병이 포함되는 등 개선이 이뤄졌다.

노동자로서 당연한 권리인 노동조합 건설을 위한 권리 확보도 소방관들의 오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불과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직장협의회조차 소방관들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2019년 12월 그동안 직장협의회 가입이 금지되었던 경감 이하의 경찰공무원(해양경찰 포함), 소방경 이하의 소방공무원, 그리고 자동차 운전업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은 새롭게 가입을 허용하는 내용의 ‘공무원직장협의회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지난해 6월부터 시행됐다. 직장협의회 가입이 허용된 뒤 불과 6개월여 만에 공무원노조법이 개정되면서 소방관들의 노동조합 가입도 허용되는 등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박해근 준비위원장은 이런 변화가 전현직 소방관들의 모임인 소방발전협의회가 노력해온 결과라고 강조한다.

소방발전협의회 2008년 일간지 광고
“소방공무원 인권 사수를 위해
노동단결권을 보장하라”

박해근 준비위원장이 소방발전협의회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건 지난 2009년 소방공무원 미지급 초과근무수당 소송을 하면서부터다. 당시 전국의 소방관들이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의 초과 근무 수당을 받지 못했다면서 소송에 나섰다. 이 소송을 앞서서 지원했던 단체가 바로 소방발전협의회였다. 박해근 준비위원장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소방발전협의회 회원들과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2016년 동료 소방관들과 함께 있는 박해근 소방관.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 주황색 옷이 박해근 소방관이다.ⓒ박해근 소방관 제공

“소방발전협의회 모임에 나가고,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방공무원의 현실을 알게됐어요. 그때부터 우리 소방공무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서 힘닿는 데까지 노력해야겠다는 각오로 활동했고, 2012년 소방발전협의회 회장을 맡았습니다.”

소방발전협의회는 지난 2007년부터 소방공무원의 직장협의회 설립 허용을 요구해왔고, 2008년부터는 노동조합 허용을 요구해왔다. 2008년 11월 24일 소방발전협의회는 일간지에 의견 광고를 내고 “소방공무원 인권 사수를 위해 노동단결권을 보장하라”며 소방관들의 노동조합 조직 허용을 촉구한 바 있다.

소방발전협의회, 2012년 국제공공노련 가입
한국 소방관들의 열악한 환경 국제사회에 알려…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하면서
2020년 법 개정을 통해
소방관들의 노조 가입 허용

박해근 준비위원장은 2012년 소방발전협의회 회장이 된 이후 소방관의 단결권을 보장을 위해 노력해왔다. “소방공무원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선 시급한 거는 노동조합이라고 느껴왔어요, 회장직을 맡으면서 절실해졌습니다. 그때부터 국회 문도 두드리면서 소방관도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걸 알려왔어요, 2012년엔 국제공공노동조합연맹(Public Services International, PSI)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소방발전협의회는 직장협의회도, 노동조합도 아니었지만 가입했어요, 우선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나서줘서 PSI 한국가맹조직협의회에 가입할 수 있었어요, 이후 국제조직에도 가입하게 된 겁니다. 한국가맹조직협의회의 건의를 국제조직이 받아들인 겁니다, 이후 국제회의에 참석해 여러 차례 한국 소방관들의 열악한 환경을 알렸습니다.”

2018년 5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PSI 동아시아 회의에 참석한 박해근 소방발전협의회장. 사진 제일 뒷줄 왼쪽에서 4번째가 박해근 회장이다.ⓒ소방발전협의회

ILO는 지난 2006년, 2007년과 2009년 소방관 노동자들의 단결권 보장을 권고한 바 있고, 한국이 ILO 비준 핵심협약을 비준하면서 지난해 법 개정을 통해 소방관들의 노조 가입이 허용된 것이다. 법은 개정돼 노조 가입이 허용됐지만, 민중의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낯설듯 소방관들에겐 노조도 여전히 낯선 대상이다. 여기에 더해 보수 매체를 중심으로 소방관 노조를 허용하면 파업으로 인해 화재진압이 힘들어 것이란 일종의 유언비어와 아직은 보수적인 사회적인 분위기가 더해지면서 주저하는 소방관들도 있다.

“소방관이 건강해야 한다.
소방관이 건강하게 일하면
그 혜택은 국민에게 돌아간다”

“이제는 인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공무원도 노동자예요. 하지만, 동료 소방관이나 국민 가운데는 여전히 노조에 부정적 인식을 가진 이들도 있습니다. 소방관들은 대부분 우리의 현실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현실을 바꿀 방법은 노동조합밖에 없습니다. 처음엔 꼭 필요하냐고 머뭇거리던 소방관들도 상황을 설명하면 대부분 노조 가입 필요성에 공감합니다.”

아울러 소방관 노조 건설은 격무에 시달리며 각종 질병과 사고로 고생하는 소방관들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방안이기도 하다. 박해근 준비위원장은 “소방관이 건강해야 한다. 소방관이 건강하게 일하면 그 혜택은 국민에게 돌아간다”면서 “소방관들의 노동조합 가입을 응원해달라”고 호소했다.

지난 2019년 8월 6일 오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한 생활용품 제조공장에서 폭발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화재진압을 하고 있다. 2019.08.06.ⓒ사진 = 뉴시스

소방관 노조가 성공하기 위해선 국민적 지지와 성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방관들이 10년 넘게 요구해왔던 ‘소방공무원 국가직화’가 지난해 이뤄지게 된 것도 국민적 성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2019년 4월 강원도 대형 산불 당시 전국의 소방관들이 강원도로 달려와 활약하면서 ‘소방공무원 국가직 전환’ 논의가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2019년 4월 강원도 대형 산불 당시
소방공무원 국가직 전환 공론화
“국민적 공감대 커지면서 법 개정”

“소방발전협의회에선 지난 2007년부터 국가직 전환을 요구했어요. 세월호 참사 뒤에 소방과 해경이 국민안전처로 통합될 때도 국가직 전환을 요구하며 119명이 1인 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지방정부에 의해 소방관의 인사와 예산을 통제받다 보니 광역자치단체 별로 대우가 천차만별이었어요, 국회의원을 통해 법률안을 내는 등 꾸준히 싸웠고, 문재인 대통령 공약에도 들어 있었지만, 쉽지 않았어요, 그러다 강원도 대형 산불 당시 강원도 소방차 만이 아니라, 전국 소방차가 모였을 때 국민이 국가직 전환의 필요성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어요. 국가가 이렇게 위기에 처하면 전국의 소방관들이 이렇게 함께 대응한다는 것을 보면서 국민적 공감대가 커졌습니다.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법 개정이 이뤄지게 됐습니다.”

화재 진압복을 입은 윤홍원 노원구 소방장이 2014년 6월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소방관 국가직 전환 촉구피켓을 든 채 릴레이 1인시위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오랜 염원이던 국가직 전환을 이뤘지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박해근 준비위원장은 지적했다. “어떻게 보면 허울 뿐이에요. 국가직이면 모든 걸 국가가 맡아야 하는데, 인사와 예산은 여전히 지방이 맡아요. 그래서 소방공무원 처우가 여전히 지방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우리도 경찰처럼 완전한 국가직을 원했지만, 급하게 하다 보니 인사와 예산은 지방정부에 그대로 뒀어요. 앞으론 인사와 예산까지도 국가에서 담당하는 온전한 국가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전국의 소방관이 같은 대우 받았으면 해요.”

부모님 권유로 서른 살 넘어 시작한 소방관
“아주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해근 준비위원장은 올해로 소방관으로 일한 지 29년째다. 1992년 경주소방서에 첫 발령을 받았고, 1993년 영천소방서로 발령이 된 이후 영천소방서에서 주로 근무했다. 포항, 의성 등에서도 근무했지만, 영천 이외 지역에서 근무한 건 총 3년 남짓이다. 지금은 영천에 살면서 포항 남부소방서로 출퇴근하며 일하고 있다.

그가 소방관을 시작한 건 부모님의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서른 살이 넘었고, 결혼도 이미 한 상황이어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92년에 소방관이 됐어요. 그 전엔 마산에서 운수회사 사무실에서 일했습니다. 1년 정도 소방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합격했어요. 솔직히 당시는 소방공무원은 물론 다른 공무원도 인기가 별로 없던 시절이었어요. 부모님이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했지만, 솔직히 별로 생각은 없었거든요. 하지만, 시험 합격도 하지 않고, 못한다고 이야기하기 뭐해서 시험을 봤어요. 근데 합격하고 나니 아내가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일할 결심을 했지요. 지금은 아주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 1996년 동료 소방관과 함께 있는 박해근 소방관(사진 오른쪽)ⓒ박해근 소방관

그는 처음 소방관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소방관은 불만 끄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방관 업무를 시작하고 나서 화재, 구조, 구급은 물론 대민 봉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았다. “그동안 주로 화재 파트에서 활동했어요. 구조 파트에서도 5년 근무했고, 구급 파트도 2년을 일했습니다. 지금은 관련 자격증과 경력자들을 특채로 채용해 구급, 구조, 행정 등에 배치하는 경우가 많아요. 화재 진압을 주로 하는 일반 소방은 공채를 통해 들어오는 경우가 많고요. 하지만, 특정 분야 특채로 들어와도, 업무는 화재, 구조, 구급 등 전 업무를 지원해야 하기에 다른 분야도 알아야 해요.”

“온몸에 피멍이 들며 물에서 구한
청년들 기억에 남는다”

29년 동안 소방관으로 일하면서 소방관 권리 향상을 위해 힘써 왔던 그는 법률이 개정돼 소방관들의 현실이 하나둘 바뀌는 것을 보며 뿌듯했다. 물론 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을 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가장 기억나는 임무로 소방관 2년 차이던 1993년 수난사고 출동을 꼽았다.

“당시엔 구조대가 따로 없어서 일반 화재 소방관이 구조까지 했어요. 장비도 미흡했고요. 영천에 있는 계곡에서 청년 4명이 야영을 했는데, 밤새 비가 왔습니다. 그런데 계곡에 물이 급격하게 불어나면서 물은 청년들이 야영하던 곳 주변으로 두 갈래로 갈라져 흘렀고, 마치 섬처럼 갇혀 고립되고 말았어요. 신고가 들어왔는데, 구조 장비라고는 구명의와 보트가 전부였습니다. 청년들을 살리기 위해선 열악한 장비를 들고 소방관들이 몸을 던지는 수밖에 없었어요. 구조 과정에서 급류에 보트가 뒤집히는 등 위험한 상황이 많았지만, 끝까지 버티며 구조를 했어요. 구조를 마치고, 나중에 보니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었어요. 그래도 생명을 살렸다는 생각에 보람이 컸습니다. 하지만, 온몸에 피멍이 들어 돌아오니, 아내는 ‘당신 목숨이 더 중요하다’며 걱정을 했어요. 앞으론 너무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고 해서 그렇게 하겠다곤 했지만, 소방관 옷을 입고 있는 이상 그런 상황이 되면 똑같이 나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소방관들의 열악한 환경 문제를
개선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손을 잡아주고 도와준
단체가 바로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에요.
지금까지 자기 일인 양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어요.”

국민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겠다는 각오로 일하는 소방관들은 노동조합 건설을 통해 이제는 국민과 가까워지는 조직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지난 27일 열린 대전지역 준비위 출범식 현장에 함께한 소방관들도 그러했다. 노동조합을 통해 이젠 침묵하지 않고, 할 말은 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 그렇게 변화된 조직은 국민의 안전을 지켜나갈 것이란 기대가 가득했다.

대전 유성소방서 준비위원장 송현대 소방관은 “이 자리가 축제의 자리, 즐거운 자리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소방관들은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젊은이들이 흔히 줄여 쓰는 말로 ‘할많하않’이었다. 그랬던 시절이 이제 끝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난 시절 말을 숨기고,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것이다. 이제는 연대해 같이하면 우리도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색소폰 연주를 하고 있는 박해근 소방관. 박해근 소방관은 틈 날 때마다 양로원이나 요양병원 등을 찾아 연주 봉사를 하고 있다.ⓒ박해근 소방관

소방관들이 할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소방관 조직 사회의 불평등도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대전 대덕소방서 준비위원장 박계우 소방관은 “자기들만의 리그를 이어왔을 때 그것은 동반자 관계가 아니라, 상하 불평등 관계다. 이제 상하 불평등 관계를 깨뜨릴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변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 조직이 필요하겠나. 바로 전국공무원노동조합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바로 공무원노조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현직 소방관들의 모임인 소방발전협의회는 내부 논의를 거쳐 운영진들의 만장일치로 ‘전국공무원노조’와 함께 소방관 노동조합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박해근 준비위원장은 “소방발전협의회 활동을 하다 보니 소방공무원 처우 개선 등을 위해 독자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이 약했어요. 처우 개선을 위해선 다른 단체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 부분이 많았어요. 그래서 2008년부터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을 찾아 도움을 요청했어요. 소방관들의 열악한 환경 문제를 개선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손을 잡아주고 도와준 단체가 바로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에요. 지금까지 자기 일인 양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어요. 그런데, 지금 노조 조직을 함께하는 건 단순히 그동안 도와줬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앞으로가 더 중요해요. 앞으로도 어떤 조직이 우리를 위해 가장 열심히 뛰어줄 것인가 생각해볼 때 꼭 필요한 단체가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라고 강조했다.

박해근 준비위원장은 지금은 한국노총 전국소방공무원노조 준비위,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소방노조설립준비위와 경쟁하고 있지만, 노조 설립 이후엔 이들 단체와 연대에도 힘을 쏟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노조 가입은 개인의 자유예요. 법률에 따라 어느 조직이든 나중에 교섭 때는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어느 단체에 있다고 해서 배제, 경쟁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어느 단체든 합심해야 합니다. 교섭, 처우 개선을 위해 한목소리를 내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내는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과거 투쟁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해직되는 걸 봤기 때문에
혹시나 하고 우려도 해요.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안심을 시킵니다.”

노동조합 건설을 위해 앞장서는 그를 두고 가족과 동료들은 응원을 보내면서도, 한편으로 걱정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가족들은 걱정이 많아요. 아들만 둘인데 그래도 아들들은 아빠를 뿌듯하게 생각하며 응원을 해줘요. 하지만, 아내는 시간을 많이 뺏기고, 금전적으로도 피해가 갈 수 있고, 외부 활동을 하면 가정 생활에 소홀해질 것을 우려해요. 전국공무원노동조합 과거 투쟁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해직되는 걸 봤기 때문에 혹시나 하고 우려도 해요.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안심을 시킵니다.”

지난 5월 27일 열린 전국공무원노조 소방본부 대전지역 준비위원회 출범식에서 동료 소방관들과 함께 노동조합 가입신청서를 들고 있는 박해근 소방관ⓒ민중의소리

이제 소방공무원 노동조합 공식 출범까지 한 달 정도가 남았다. 박해근 준비위원장은 전국 주요 지방과 자신이 일하고 있는 경북 전역을 돌며 노동조합이 왜 필요한지 알리고 있다. 그는 “7월 6일 이전까지는 최대한 전국을 돌 계획이에요. 저 뿐 아니라 준비위원 9명이 자신이 소속된 광역을 순회하면서 설명회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노조 설립 뒤엔
완전한 국가직 전환,
일과표, 근무체계 개선
근속연한 단축 등 산적한 소방 현안에 집중

마지막 한 달 동안 온 힘을 다해 뛰겠다는 각오로 전국을 돌고 있는 박해근 준비위원장이지만, 노동조합 출범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노동조합 출범 이후엔 소방발전협의회가 그동안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소방관들의 근무 여건 개선과 복지 향상 등과 관련한 각종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전망이다.

앞서 이야기한 지방마다 차이가 없는 온전한 국가직 전환과 함께 우선 인사와 예산을 담당하는 인사혁신처나 기획재정부의 결정 없이 소방청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부터 개선하는데 집중한다는 구상이다. 박해근 준비위원장은 “근무체계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현재 근무 체계는 크게 3조2교대와 3조1교대로 나뉜다. 3조2교대 체계에서 소방관들은 한 주는 낮 근무, 한 주는 야간 근무, 한 주는 야간 근무와 당직을 돌며 근무한다. 3조1교대에선 24시간 근무 후 이틀을 쉬는 이른바 ‘당비비 체계’로 일하는데, 둘 다 근무시간은 차이가 없다. 소방관 대부분은 3조2교대 방식으로 일하고 있지만, 대체로 3조1교대를 선호한다. 하지만, 근무체계 선택이 자유롭지 않아 현장에선 불만이 크다. 박해근 준비위원장은 “근무체계는 소방관들의 건강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휴식이 부족한 야간 근무와 교대 근무는 심혈관계 질환을 불러오기도 한다”며 “근무체계 선택에 제약을 두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2019년 4월 4일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의 도로변 전선에서 불꽃이 일어나, 고성군에서 속초시 지역까지 산불이 발생하였다.사진은 속초시 영랑호 인근 마을에서 화재를 진압하고 있는 소방관들.ⓒ뉴시스

일과표 개선도 시급하다. 소방청은 지난 2018년부터 전국의 소방공무원을 대상으로 마치 초등학생 방학계획표처럼 시간대별로 교육훈련 등 할 일이 정해진 일과표를 도입해 적용하고 있다. 긴급출동 등을 제외하고 일과표를 어기면 징계를 받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정해놓은 일과표는 긴급 상황과 외근이 많은 소방관의 업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란 지적과 함께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컸다.

일반 공무원과 차이가 있는 근속 승진 연한 단축도 중요 이슈다. 일반직 공무원은 근속으로 6급 승진까지 23년 6개월이 걸리는 반면에 경찰과 소방공무원은 6급인 경감과 소방경까지 25년 6개월이 걸려 승진이나 연금 등에 있어 형평성에 차이가 있다. 박해근 준비위원장은 “처음엔 시험을 통해서만, 진급이 가능하다가 근속 승진이 도입됐다. 그리고, 일반공무원과 차이가 지금보다 훨씬 심했는데 조금씩 좁혀졌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소방공무원들은 특별한 대우를 원하는 게 아니다. 다른 공무원과 차별만 두지 말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퇴직해도 활동을 계속할 거에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소방관들과 함께할 겁니다.
색소폰 봉사 활동도 계속할 거에요.
아마도 퇴직하면 더 바빠질 것 같아요.”

박해근 준비위원장은 정년을 2년 6개월 정도 앞두고 있다. 그는 퇴직 이후에도 소방공무원의 권리를 향상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퇴직해도 활동을 계속할 거에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소방관들과 함께할 겁니다. 아울러 색소폰 봉사활동도 계속할 거에요. 그동안 양로원이나 노인 요양병원 등에서 연주를 해왔어요. 그런 곳을 방문해 짧은 시간이지만, 연주를 통해 즐거움을 주려고 해요. 예전엔 단체에 가입해서 봉사활동을 했는데, 지금은 영천에서 품바장구 음악학원과 함께 공연하고 있어요. 코로나19 때문에 지금은 공연하지 못하고 있지만, 기회가 되면 기회가 되면 활동을 꾸준히 할 계획이에요. 아마도 퇴직하면 더 바빠질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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