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 정치판 엎으러 ‘정치 경단녀’가 돌아왔다

[만민보] 이선희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여성정치위원회 위원장

이선희 씨는 ‘정치 경단녀’다. 여권 핵심이 된 586세대 남성 정치인들과 시작은 같았다. 그는 86학번 운동권 출신으로 대중적 진보정당의 시발점인 민주노동당 창당 멤버다. 민노당 초대 여성위원장이었던 그는 여성 정치사에서 여러 최초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최초 여성 할당제 도입, 최초 단독 여성 대변인 등. 민노당이 진보정당 최초로 원내 진입했던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그는 정치 1번지 종로구 후보였다.

전도유망했던 이선희 씨는 10년도 안 돼 정치인의 꿈을 접어야 했다. 수많은 ‘경단녀’들과 같은 이유였다. 그는 ‘K-장녀’로서 돌봄과 생계노동을 책임졌다. 자산이 없었던 그는 무급 정치인을 계속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남성들의 상황은 달랐다. 동창회·종친회·종교모임 등 각종 지원을 받아 전업 정치인이 됐다. 여성은 가질 수 없는 인맥 자산이다. 하다못해 가족의 지원도 달랐다. “남성 정치인은 와이셔츠를 자기 손으로 다릴까?” 그가 묻는다.

이선희 씨는 지난 4·7 재보궐 선거로 정치를 다시 시작했다. 무소속 신지예 서울시장 후보와 6명의 부시장으로 구성된 ‘팀 서울’에서 여성안전 부시장으로 출마했다. 정당 정치를 못 하게 됐을 뿐, 그는 한 번도 활동을 멈춘 적 없다. 5년간 불법 촬영물을 추적해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으로 대표되는 ‘웹하드 카르텔’을 처음 고발했다. 여성을 착취해 돈 버는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며 카르텔이란 프레임을 만든 것도 그다.

지난달 28일 만난 이선희 씨는 정치 관련 인터뷰가 오랜만이라고 했다. 17년 전 진보정치의 세력화로 보수 정치판을 갈아엎겠다던 그는 이제 가부장 정치판을 갈아엎을 페미니스트 정치 세력화를 준비하고 있다.

이선희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여성정치위원회 위원장ⓒ한여넷

정당사 최초 여성 할당제 이끌어낸 여성 정치인

이선희 씨는 1986년 늦깎이 새내기로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2남 2녀 중 맏딸인 그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4~5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학문에 뜻이 없던 남동생들 덕분에(?) 그가 학교에 갈 수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이 벌어지기 1년 전 대학가는 반독재 투쟁 열기로 뜨거웠다. 운동의 이응 자도 모르는 새내기가 골수 운동권이 될 만큼.

이선희 씨가 제도권 정치활동을 시작한 건 1997년. 대선을 위해 시민사회단체가 총망라돼 만들어진 ‘건설국민승리21’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권영길 대표는 학생운동에서 출발한 청년시민단체 대표들을 청년위원회로 영입했는데, 위원장에 더불어민주당 유기홍 의원을, 부위원장에 이선희 당시 ‘포럼 2001’ 대표와 임종석 당시 청년정보문화센터 소장을 앉혔다.

그는 국민승리21 후신인 민주노동당 창당에 함께했다. 1999년 창당 준비를 위한 실행위원 22명 중 한 사람으로 여성·청년 부분 실행위원을 맡았다. 2000년 1월 창당 이후 초대 여성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여성위원장 활동 당시 이선희 씨는 여성의 정치참여 가능성을 제도화하는 데 힘썼다. 여성 할당제가 대표적이다. 2000년 개정된 정당법에서 비례대표 여성 할당제를 권고했는데, 당헌에 임명직·선출직 여성 30% 할당제를 명문화하고 실행한 건 민주노동당이 최초다. 2003년 비례대표 후보의 경우 여성 할당제를 기존 30%에서 50%로 확대하고, 여성을 홀수 번호에 배치하도록 당헌으로 규정한 것도 처음이다. 창당부터 여성 할당제가 적용된 중앙위원회가 꾸려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두 그가 주도한 일이었다.

여성 할당제를 들고나오자 당내 반발이 심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의결단위마다 논쟁이 치열했다. 당원 중 여성이 19%고 남성이 81%인데, 어떻게 여성에게 30%를 줄 수 있냐고 반발하더라. ‘할 여성이 있긴 하냐’는 조롱부터 ‘여성위원장이 임명권을 휘두른다, 패권적이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원래 50% 요구하려던 걸 참았다. 세상의 절반이 여성인데 남성 당원이 80% 이상이라는 것 자체가 민노당은 차별과 억압의 공간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진정한 진보정당이라면 가장 차별받는 성별인 여성의 정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팀 서울 출마식ⓒ팀서울

이선희 씨는 2000년 16대 총선에서 민노당 선대위 대변인으로 첫 단독 여성 대변인을 맡았다. 남녀 공동대변인이 대세였던 상황이었다. 당시 부대변인은 현 민주당 박용진 의원과 김종철 전 정의당 대표였다.

그는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입했던 2004년 17대 총선 당시 종로구 후보로 출마했다. 2008년 18대 총선 당시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한 노회찬·심상정 등이 공동대표를 맡았던 진보신당 선대위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다.

“같은 꿈을 꿔도 여성과 남성의 세상은 달랐다”

이선희 씨가 ‘모태 페미니스트’였던 건 아니다. 남성성이 강한 운동 문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성성을 부정하기도 했다. 입학 전 5년간 사회생활에서 익힌 ‘미스리’ 정체성도 영향이 컸다. 그러나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동지일지라도 여성과 남성이 사는 세상은 다르다는 걸 몸소 깨닫는 순간 그는 여성의 몸으로 여성 정치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두 가지 경험이 기억난다. 비합법적 활동을 했던 탓에 항상 밤늦게 모였다. 회의가 끝나고 당시 구로 자취방까지 가는 길이 무척 위험했는데, 밤길을 걱정하는 건 유일한 여성이었던 저 혼자뿐이더라. 주인집 문이 닫혀서 담을 넘으며 눈이 마주쳤던 흰 고양이가 아직도 잔상처럼 남아있다. 남성들은 여성들의 문제를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이를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또 한 번은 허름한 여관에서 회의하던 중 바깥소리를 듣게 됐다. 술에 취한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고 어머니뻘 되는 주인 여성이 ‘없어, 없다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남성이 ‘아줌마는 안 돼?’라고 묻더라. 성매매 여성을 찾는 남성이었다. 남성의 요구에 따라 여성은 언제든 성적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소름 돋았다.”

CBS TV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 출연한 이선희 위원장ⓒCBS

정치활동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세상은 달랐다. 이선희 씨는 촉망받는 정치인이었던 동시에 ‘K-장녀’였다. 생계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정당의 리더그룹은 돈을 받지 않으면서 상근 이상의 활동을 해내야 했다. “여성위원장 활동하면서도 회의 중간중간 아르바이트해야 할 만큼 사정이 어려웠다. 젊은 청춘을 받친 소중한 활동이었지만 전업 정치인을 계속한다면 사람 노릇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봄 노동 역시 그의 책임이었다.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봐야 했다.

“남성 정치인 대부분 부인이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책임진다. 부모들도 집안에 국회의원이 나와야 한다며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종친회도 후원금을 들고 온다. 제가 전주 이씨인데, 종묘제례마다 올라오시던 집안 어르신들께선 종로구 후보로 나왔을 때도 연락 한번 없었다. 여성은 족벌에 안 올라가니 종친이 아니었나 보다.”

과거 함께 활동했던 여성 정치인 중 정치권에 남아있는 사람은 심상정 의원뿐이다. 대신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남성 정치인은 수도 없다. “제 역량이나 능력, 경력이 그들보다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은 생산영역이든 정치영역이든 조력 받지 못하고 혼자 수행해야 했다. 남성연대 인맥이라는 건 그 자체로 힘이고, 끼지 못한 여성은 단독으로 정치하기 어려웠다.”

이름 없던 범죄 쫓아 ‘웹하드 카르텔’ 드러냈다

경력단절 여성의 우울함을 예상했다면 틀렸다. 이선희 씨는 자신의 자리에서 여성 의제 관련 활동을 계속했다. 웹하드 카르텔 추격기가 대표적이다. 그는 한국젠더연구소이자 여성인권교육센터인 ‘경계너머’를 만들고 강연을 다니던 2014년 이름조차 없던, 디지털 성범죄를 마주했다.

성관계 영상을 몰래 촬영한 전 남자친구에게 협박받다가 결국 유출 피해를 겪은 뒤 학교를 그만두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자주 들려왔다. 그는 마이크 대신 카메라를 들었다. 피해자는 없고 피해 촬영물만 존재하는 디지털 성범죄 특성상 취재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사건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는 당시 편집은커녕 카메라도 다룰 줄 몰랐다.

회사 전 직원을 폭행하고 엽기적인 갑질 의혹을 받고 있는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7일 오후 경기도 수원이 경기남부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로 압송되고 있다.ⓒ김슬찬 기자

쫓고 쫓다 보니 웹하드를 발견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내려받는 곳인 줄 알았는데 불법 촬영물이 가장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공간이었다. 합법적으로 운영된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 필터링이 사실상 무력화된 상황이었다. 2012년 웹하드 등록제에 따라 자본금 1억 원 이상의 웹하드는 필터링을 통해 불법 촬영물 등을 차단해야 한다. 2명 이상의 모니터링 요원이 24시간 상주하며 불법 촬영물을 감시해야 한다.

웹하드 카르텔의 황제 양진호 회장을 통해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웹하드 업체와 그를 감시해야 할 필터링 업체가 한 몸이었다. 양 회장은 위디스크·파일노리 등 여러 웹하드 업체를 실소유하는 동시에, 불법 촬영물을 검열해야 할 웹하드 필터링 업체 뮤레카, 심지어 피해 여성들이 불법 촬영물 삭제를 요청하는 디지털 장의사 ‘나를 찾아줘-미파인드’까지 모두 운영하고 있었다. 여성 대상 불법 촬영물로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이는 산업구조를 만든 것이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웹하드 카르텔을 처음 포착하고 명명해 세상에 폭로한 사람이 이선희 씨다. 4~5년간 웹하드 카르텔만 쫓았다. 위디스크, 뮤레카, 미파인드가 양 회장이 운영하는 위디스크 판교 건물 8층 전체를 사용한다는 점을 직접 카메라에 담았다. 법적 대표는 각기 다르지만, 실소유자는 양 회장이라는 또 다른 결정적 증거물을 입수해 2018년 양 회장을 경기남부경찰청에 직접 고발했다. “디지털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웹하드 카르텔은 2018년 7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공론화됐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가 올린 웹하드 카르텔 처벌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은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불법촬영 문제로 시작된 혜화역 시위를 더 뜨겁게 만든 계기였다.

불법 촬영물 관련 혐의의 낮은 형량을 우려한 그는 양 회장의 분식회계·탈세 등 혐의도 찾아내 국세청에 신고했다. 양 회장은 2019년 5월 167억 상당의 분식회계·횡령 등 혐의로 추가 기소됐다. 그는 웹하드 카르텔 추격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집 주변에 CCTV를 설치해놓고 안심 시계를 차고 다닌다.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 주범인) 조주빈은 양진호 키즈다. 한국사회에서 성폭력을 성이라고 가르치는 학교가 바로 웹하드다. 웹하드는 성폭력을 상품화하고 산업화했다. 조주빈이 범행 동기를 돈이라고 하지 않았나. 여성을 착취하고 성적으로 학대하는 영상을 팔면 돈이 된다는 걸 어려서부터 배웠다.”

팀 서울ⓒ팀서울

“페미니스트 정치 세력화의 조력자 되겠다”

지난해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으로 이선희 씨는 새로운 활동에 나섰다. 박 전 시장 실종 당일 SNS에 피해자를 지원하고 긴급 대응할 사람들을 모집했다. 2030 세대 여성들과 함께하는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한여넷)의 시작이었다.

“박 전 시장의 가해를 직감했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그해 5월 서울시청에서 성폭력 예방 대면 교육을 요청했다. 4월 박원순 서울시장 비서실 성폭력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강의하면서도 박 전 시장이 또 다른 가해자일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 얼마 뒤 박 전 시장이 사라졌다는 보도를 보고 촉이 왔다. 대권 주자인 서울시장이 가해자라면 피해 여성은 상당히 무력해져 빠른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여넷은 이번 재보궐 선거를 ‘미투 선거’라고 규정하고 위드유에 올인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신지예 한여넷 대표를 중심으로 선거본부를 꾸렸다. “서지현 검사가 미투 폭로를 했던 2018년을 젠더 민주화의 원년이라고 한다면, 박 전 시장 사건은 한국사회의 질서를 바꿀 변곡점이 될 것이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기호 15번으로 출마한 무소속 신지예 후보가 25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서 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 2021.03.25ⓒ김철수 기자

스스로 후보가 되는 형식의 정치는 안 하겠다고 다짐했던 그다. 2030 세대 여성으로 부시장단을 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선거 끝나고 사건을 해결하자는 586 여성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고 직접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선거 결과에 대한 아쉬움은 크지만, 팀 서울의 의미는 크다고 그는 짚었다. “돈 한 푼 없이 시작해 1억 7천여만 원의 후원금을 모았다. 기탁금 후원 글을 올린 지 하루 만에 2천만 원 이상이 모인 일도 기적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세대들이 정치적 주체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박 전 시장 피해자가 노동현장으로 돌아가는 데도 기여했다.”

이선희 씨는 한여넷 여성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 페미니스트의 정치 세력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자신은 2030 세대 여성들의 정치 세력화를 위한 조력자임을 강조했다.

“단지 여성이 하는 정치를 뜻하는 건 아니다.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처럼 여성운동을 한 의원조차 가해자에 조력하는 모습을 보며 여성 시민들이 엄청난 무력감을 느꼈다. 제가 정치를 다시 시작했다는 건 기존 여성 정치인들과는 다른 새로운 여성 정치를 하겠다는 뜻이다.”

혜화역 시위에서 그는 기존 여성운동에서 듣지 못했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기존 여성운동은 주어·목적어·서술어가 있는, 잘 다듬어진 문장이라면, 혜화역 시위는 음절·음소가 다 떨어진 비명의 소리였다. 정돈되지 않은 절규가 더 강력하게 다가왔다. 한국 페미니즘 정치 운동에 관한 책을 쓰고 있는데, 첫 문장이 ‘호명 이전에 비명이 있었다’다. 혜화역의 비명을 어떻게 호명할 것인가가 제 할 일이다.”

이선희 씨의 최종 목표는 2030 세대 여성이 중심이 된 페미니스트 정치 세력화다. 페미니즘 시각으로 사회를 재구조화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웹하드 카르텔을 쫓는 데 5년이 걸렸다. 끝을 알고 시작한 게 아니었다. 새로운 여성 정치 세력화는 더 오래 걸릴 것이다. 끝까지 여성들을 조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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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영 기자 응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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