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관계 역효과” 이유로 강제징용 배상 소송 ‘각하’한 법원

대법 판결과 정반대...피해자 측 “받아들일 수 없는 판결” 반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고 임정규 씨의 아들 임철호 씨와 장덕환 일제강제노역피해자 정의구현 전국연합회회장이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일본제철 주식회사와 닛산화학 등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각하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1.06.07.ⓒ뉴시스

법원은 7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낼 권한이 없다며 패소 판결을 내렸다. 지난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강제징용 피해에 대한 일본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과 정반대 결론을 낸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이날 강제징용 노동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측의 소송을 각하했다.

각하란 소송의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본안을 판단하지 않고 재판절차를 끝내는 것을 말한다.

재판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서 바로 소멸되거나 포기됐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소송으로 이를 행사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설명자료에서 이날 판결에 대해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의견과 결론적으로 동일하다"고 설명했다.

앞서 지난 2018년 11월 대법 전합은 이춘식 씨 등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제철(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다수 의견으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원심을 확정하고 1인당 1억원식 지급할 것을 명령했다.

반면 당시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은 "청구권협정에 따라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은 제한된다"며 전합 결정과 반대되는 소수의견을 냈다.

이번 재판부 또한 "한일 청구권협정과 그에 관한 양해문서 등의 문언, 협정 체결 경위나 체결 당시 추단되는 당사자의 의사, 후속 조치 등을 고려하면 이 사건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또 재판부는 "비엔나협약 제27조에 따르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국내법적 사정만으로 일괄 보상 또는 배상하기로 합의에 이른 '조약'에 해당하는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며 "이 사건 청구를 인용하는 것은 비엔나협약 제27조와 '금반언의 원칙'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반언(禁反言)의 원칙'은 자기의 언행에 모순되는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원칙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이 과거 정부가 일본과 맺은 한일 청구권협정에 반한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특히 재판부는 "원고들의 청구를 인용해 강제집행까지 마칠 경우 국제적으로 초래될 수 있는 역효과 등까지 고려하면, 강제집행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질서유지라는 헌법상의 대원칙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이는 권리남용에 해당해 결국 이 사건 피해자들의 청구권은 소구할 수 없는 권리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지난 2018년 대법 전합의 판결에 일본 정부가 반발하면서 한·일 간 무역분쟁으로 번진 사례를 고려해 이번 판결을 내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아울러 재판부는 당초 10일 예정됐던 선고를 급작스럽게 사흘이나 앞당겨 이날 진행한 이유에 대해 "이 사건은 법정의 평온과 안정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판결 선고기일을 변경하고, 소송대리인들에게는 전자송달 및 전화연락 등으로 고지했다"고도 설명했다. 선고일 변경으로 이번 선고에 참석하지 못한 원고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판결에 대해 피해자 및 유족 측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피해자 측 변호인인 강길 변호사는 선고 직후 "오늘 판결은 기존 대법원 판례에 정반대로 배치돼 매우 부당하다"며 "재판부가 양국 간 예민한 사안이라 다르게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과거사위원회' 등 강제징용 피해자 지원단체들도 이날 성명을 내고 "일본의 보복과 이로 인한 나라 걱정에 법관으로서의 독립과 양심을 저버린 판단을 했다"면서 "민사소송 원고의 권리를 인정하면 '대한민국의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및 공공복리'가 위태로워진다는 금시초문의 법리를 설시하면서,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논리를 별다른 부끄러움 없이 판결문에 명시했다"고 비판했다.

한편 이번 소송은 지난 2015년 5월 일제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것으로, 그동안 일본 기업들이 소송에 응하지 않아 심리가 진행되지 않다가 올해 3월에서야 재판부가 공시송달을 하면서 재판이 진행됐다.

해당 소송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가 국내 법원에 손해바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선고가 나온 사건 중 최대 규모로 알려졌다. 피해자와 유족을 합친 인원이 85명이며 원고소가(재판 승소시 얻고자 하는 금액)은 86억원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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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겸 기자 응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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