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민갑의 수요뮤직] 천용성이 펼쳐 보이는 수많은 이야기 모음

싱어송라이터 천용성의 두 번째 정규 음반 [수몰]

천용성의 [수몰] 음반에는 많은 사람이 산다. 천용성과 프로듀서 단편선만이 아니다. 연주에 참여한 인원만 20명, 레코딩 엔지니어와 뮤직비디오 제작진까지 합치면 더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 하지만 이 음반에 ‘많은 사람이 산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음반에 참여한 이들의 숫자 때문이 아니다.

첫 번째 곡 ‘있다’부터 마지막 곡 ‘반셔터’와 히든트랙까지 12곡의 노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싱어송라이터인 천용성 자신의 자화상만 담긴 게 아니다. “깊은 물 안에 있어요/늙은 아빠도 같이요”라고 노래하는 ‘수몰’, “엄마 저는 다시 태어나면/딸이 되고 싶어요”라고 고백하는 ‘어떡해’, “요즘 나는 밥맛도 없고 친구들도 그냥 그래요”라고 소곤대는 ‘중학생’ 같은 노래를 천용성 자신의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천용성의 두 번째 음반 [수몰]은 천용성 자신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노래들과 천용성이 써낸 픽션인지, 누군가의 실화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섞여 있다. 천용성의 노래는 노래마다 출연진이 바뀌는 단막극 같다. 제각각 한 편의 단편 소설 같다. 낫기 어려운 병을 앓는 어린이, 성장통을 겪는 중학생, “누가 나를 손주 셋 할머니로 봐”라고 자신의 외모를 과시하는 노년 여성까지 천용성의 [수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이, 성별, 직업, 사연이 모두 다르다.

천용성의 두 번째 정규 음반 '수몰' 커버이미지ⓒ사진 = 오소리웍스

2021년에 내놓은 음반이지만 음반 속 이야기에서는 딱히 특정한 시대가 느껴지지 않는다. 10년 전에 나왔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고, 10년 후에 나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노래들이다. [수몰]이 시간을 무화시키는 이유는 등장인물의 사연과 어조가 다양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12곡의 노래들이 모두 다른 어법으로 이루어진 것도 영향을 미친다. 어떤 노래에서는 김민기를 느낄 수 있고, 어떤 노래에서는 권나무를 느낄 수 있다. 브로콜리너마저라든가 다른 뮤지션을 발견할 수 있는 곡들을 일일이 거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포크 싱어송라이터라고 할 수 있지만 1집부터 인디 팝의 감각을 가미했던 천용성은 이번 음반에서도 프로듀서 단편선과 함께 다양한 장르와 어법을 자유롭게 연결한다. 통기타 하나로만 노래하는 포크음악이 천용성 음악의 전부가 아니다. [수몰] 음반에 담은 곡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순간은 곡마다 가미한 악기들이 여러 장르의 호흡을 삼켜 찰나의 광휘를 내뿜을 때다. ‘있다’에서 박기훈이 연주하는 플롯과 베이스, 클라리넷이 우아하고 사이키델릭하며 예스러운 기운을 발산할 때, 천용성의 음악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포크 바깥의 장르까지 이어 붙인다.

천용성의 [수몰]에는 노래의 옷을 바꿔 입으면 얼마나 다른 음악이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곡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거북이’에서 최규민이 연주한 트럼펫이 없었다면 이렇게 우수 어린 노래를 들을 수 있었을까. 어쿠스틱 기타와 보컬만으로도 (포크) 음악이 가능하지만, 천용성과 단편선은 곡마다 다른 악기와 편곡을 더해 노래 속 등장인물들마다 어울리는 목소리를 찾아준다. 시옷과 바람, 이설아, 강말금, 임주연, 정우 같은 다른 참여자들이 피처링을 한 것도 노래마다 제 목소리를 찾고 이야기의 생동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거북이’에서 노래가 끝난 뒤에도 연주가 이어지고, ‘수몰’의 간주에서 재즈 즉흥연주 같은 플레이를 펼쳐질 때, 이 음반은 포크 싱어송라이터의 작품집이라는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절반에 가까운 곡들을 여성 뮤지션들이 피처링 하면서 단일한 남성 싱어송라이터의 음반이라는 경계 또한 무너진다. 대체로 담담하게 들리는 천용성의 보컬로 노래할 때보다 다채로운 진동을 만들어내는 피처링 뮤지션들 덕분에 음반은 훨씬 아기자기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책으로 넘겨 가며 읽을 수 있다.

공들인 음반이다. 아니 야심찬 음반이다. 음반의 이야기, 등장인물, 악기, 장르, 사운드, 뮤지션 모두 틀에 갇히지 않고 두리번거린다. 이 음반을 듣는 이들은 그 순간마다 다르게 반할 것이다. ‘보리차’에 불어넣은 박기훈의 관악기가 끓는 보리차의 김처럼 피어오르는 순간일 수도 있고, ‘중학생’에서 단편선의 일렉트릭 기타가 강렬해지는 순간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재즈의 여운이 감도는 ‘식물원’의 발랄한 연주이거나, ‘반셔터’의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흐르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천용성과 단편선은 포크와 인디 팝 안팎의 사운드를 최대한 가용해 노래의 사연과 인물을 다른 곳에서 만난 적 없는 경험으로 마주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노래를 들으면 애틋해지고 어떤 노래를 들으면 자신의 경험을 꺼내 비교해보게 된다. “작은 짐승처럼 몸을 부대끼며 놀았지”만(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지키지 못한 약속들”이(거북이) 있지 않나. “네 앞에 서면 행복한 마음만큼 무서웠”던(보리차) 기억이나 “왜 이 세상은 나를 낳았는지”(붉은 밤) 알 수 없었던 경험들 역시 천용성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싱어송라이터 천용성ⓒ사진 = 오소리웍스

천용성은 대동소이한 경험을 쌓으며 살아왔을 사람들에게 곡마다 다른 사운드를 펼쳐 보임으로써 기존 작품들의 상투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그 경험들을 새롭게 만날 기회, 다른 사람의 사연을 엿볼 기회를 준다. ‘붉은 밤’의 간주에서 황예지의 바이올린과 복다진의 피아노로 이어지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아니 이 음반은 그 순간들이 곳곳에 산개한 작품집이다.

음악이 인간에 대한 기록이며, 예술가는 오래 들여다보고 다르게 표현하는 사람임을, 한 곡의 노래가 관찰과 애정의 깊이를 확인하는 예술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노래들은 곡마다 순도 높은 소리의 향연을 새롭게 준비하고 손을 흔든다. 익숙한 표현에 머무르지 않고 무시로 생경한 사운드를 접합시켜 자신의 기존 음악과 장르의 문법을 붕괴시키고 건설한다. 이렇게 노래할 수 있고, 이렇게 연결할 때 다르게 느낀다고 선언하는 천용성의 역작이다. 전통과 오늘이 만나 내일이 된다. 예술가가 뒤흔든 만큼 다른 내일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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