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가석방 요구에 대해 정세은 충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실행위원)는 “책임과 권한이 없는 사람이 기업 의사결정권을 쥔다는 주장은 부적절하다”며 “주주를 기만하는 행위이자, 삼성 거버넌스(의사결정체계)를 무시하는 자가당착”이라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이 부회장 사면·가석방은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전근대적인 인식에 기반한 사면론은 한국이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있는 단면을 드러낸다”고 비판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훼손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정 교수는 “이 부회장이 풀려나면 국민은 경제 권력이 법 위에 서는 모습을 보며 좌절감과 실망감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책임·권한 없는 이재용의 의사결정권 주장은 거버넌스 왜곡
취업제한 제도 보완해 재벌 대기업의 법치주의 훼손 막아야
‘이재용 사면 가석방’ 주장의 주된 논리는 삼성전자를 비롯한 그룹의 최종 의사결정권을 가진 이 부회장 부재로 경영에 차질이 생긴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삼성전자 ‘미등기’ 임원이라는 이 부회장의 지위를 짚었다. 그는 “거버넌스 측면에서 미등기 임원인 이 부회장은 경영 판단에 대한 권한이 제한된다”며 “문제가 발생해도 책임이 없는 사람이 결정권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강조했다.
상법상 미등기 임원과 등기 이사는 권한과 책임이 다르다. 미등기 임원은 최고의사결정 기구인 이사회 구성원이 될 수 없다. 미등기 부회장 직책은 회사의 내부적인 인사 정책에 국한돼 인정된다.
미등기 임원과 달리 주주총회를 거쳐 선임되는 등기 이사는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한편, 공식적으로 회사를 대표한다. 상법에 따르면, 등기 이사는 이사회를 통해 중요한 자산 처분·양도, 대규모 재산 차입, 지점 설치·폐지 등 경영 결정을 내린다. 이 부회장이 없어서 진척이 안 된다는 인수합병과 설비투자 등은 상법상 이 부회장이 아닌 이사회가 관장할 영역이다.
등기 이사에게는 권한에 비례한 책임이 따른다. 법령이나 정관을 위반해 회사나 제3자에 손해를 끼치면 연대 배상 책임을 진다. 미등기 임원인 이 부회장은 상법상 이사에 대한 책임을 적용받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책임이 적은 이 부회장이 권한을 넘어서는 결정권 행사하며 삼성전자 경영을 좌지우지한다고 전제하는 ‘사면론’은 근거가 빈약하다는 게 정 교수 설명이다.
정 교수는 이 부회장이 아니면 경영 결정을 못 내린다는 주장은 주주 기만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삼성전자는 공식적으로는 전문경영체제를 구축하고 있다”며 “이 부회장 부재로 경영에 차질이 발생한다는 건 주주를 기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스스로도 공시를 통해 각 사업 부문별 대표이사를 중심으로 한 전문경영체제를 강조하고 있다.
‘이재용 사면론’은 재벌 대기업의 왜곡된 거버넌스를 드러낸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정 교수는 “이 부회장 부재가 경영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삼성전자의 실제 경영 행태가 총수 개입하에 이뤄져, 주주를 비롯한 투자자에게 설명하는 거버넌스와 괴리가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며 “왜곡된 거버넌스가 지속돼온 상태를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등기 이사로서 경영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지닌 전문경영인이 이 부회장 부재에 따른 경영 차질을 언급하는 건 삼성전자 거버넌스가 전문경영체제 원칙에 따라 작동하지 않는다고 실토한 꼴”이라고 풀이했다.
김기남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대표이사는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과의 오찬에서 이 부회장 사면을 요청한 바 있다. 김 대표이사는 이 자리에서 “반도체는 대형 투자 결정이 중요한데, 총수가 있어야 의사 결정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다”고 발언했다.
이 부회장은 주주로서 지분만큼의 영향력만 행사해야 한다고 정 교수는 강조했다. 그는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 주주로서 주주총회에서 이사 선임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하는 수준으로 제한돼야 한다”며 “부회장이라는 직책을 고려하면 상징적인 수준에서 대외적인 기업 홍보에 나설 수는 있겠으나, 직접 경영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이 부회장이 주요 경영 사안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면 심각한 문제”라며 “회사에 손해를 끼쳐 취업제한 대상이 된 이 부회장의 경영 참여는 현행법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에 따르면, 5억원 이상 횡령·배임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는 범죄 행위와 관련된 회사에 취업할 수 없다.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 취업제한이 적용되나, 미등기 임원 직책을 유지하고 있다. 정 교수는 “법에 따라 해임돼야 할 사람이 경영 결정권을 가진다는 주장으로 이 부회장은 자가당착에 빠진 셈”이라고 지적했다.
취업제한 관련 제도 정비 필요성도 언급된다. 법무부는 취업제한 대상자가 직책을 유지할 경우 회사 측에 해임을 요구해야 하나, 현재까지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정 교수는 “법무부가 이 부회장 취업을 방관하며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며 “취업제한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자동으로 처벌이 적용되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제도 규정과 운영의 구멍을 메워, 재벌 대기업의 법치주의 훼손을 막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재용 사면론’은 선진국 도약 걸림돌
법 위에 선 이재용 보며 국민은 좌절감 느낄 것
합리적인 근거 없이 이 부회장이 풀려나면, 지난 수십년간 추진돼온 재벌 개혁 기조가 훼손될 수 있다고 정 교수는 우려했다. 그는 “한국 사회는 외환위기 이후 20여년간 재벌 대기업 거버넌스 개혁을 위해 노력해왔다”며 “그 과정에서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도록 주주총회에서 선임한 전문경영인을 중심으로 한 거버너스를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총수가 경영 전권을 쥐고 기업을 통제하는 의사결정체제는 외환위기를 야기한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이사회를 통한 합리적인 논의 없이 이뤄진 방만 경영이 국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재벌 대기업의 부실을 초래했다는 진단이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참여연대 재벌개혁감시단은 ‘재벌개혁 감시보고서’를 통해, 주요 개혁 과제로 재벌 대기업 의사결정체계의 합리화를 꼽으면서 총수 세습 독재 체제를 타파하고 전문경영체제를 수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전문경영체제 도입을 위해서는 소유와 경영 분리가 전제돼야 한다고 짚었다.
정 교수는 “이 부회장이 대주주라는 이유로 주요 경영 사안을 최종 결정한다는 인식에 기반해 사면해주면, 대주주 위주로 회사가 운영된다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며 “이 부회장이 경영에서 거리를 두게 해야 재벌 대기업이 탈바꿈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 사면은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게 정 교수 시각이다. 그는 “과거에도 재벌 총수가 중대 범죄를 저지르고 사면으로 풀려나는 사례가 있었다”며 “구태의연한 논리의 사면론은 한국이 전근대적인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그릇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한국 경제가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재벌 총수 사면은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으로 거듭하지 못하고 있는 단면을 드러낸다”며 “경제력에 걸맞은 법치주의를 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재벌 총수라는 이유로 중대 경제 범죄자를 사면하는 건 국제적인 시각에서 대단히 비합리적”이라며 “세계 시장에서 굴지의 기업으로 평가받는 삼성 총수의 사면은 한국 브랜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최근 한국을 ‘그룹A(아시아·아프리카)’에서 ‘그룹B(선진국)’ 지위를 변경했다. UNCTAD가 국가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한 건 설립 이후 57년 만에 처음이다. 국제 위상이 높아진 만큼 기업 경영에 있어서도 세계적인 기준에 부합하는 의사결정체계 구축과 법치주의 수호가 필요하다는 게 정 교수 설명이다.
정 교수는 이른바 ‘국정농단’ 사건의 뇌물공여 범죄의 중대성도 짚었다.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삼성물산 지분을 가진 국민연금의 찬성을 이끌기 위해, 회삿돈을 횡령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씨 측에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 부회장이 지분을 가진 제일모직에 유리하게 설계된 합병은 상대적으로 삼성물산에 불리한 측면이 있었다. 국민연금은 기금 이익을 최우선으로 판단해야 했으나, 합리적인 검토 없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 부회장 지배력 강화를 위한 합병 성사를 위해 국민 노후 자금이 동원된 것이다.
정 교수는 “국민 노후를 보장하기 위한 공적 기금을 사익 추구에 불법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죄질이 중대하다”며 “국가 시스템을 왜곡해 광범위한 피해를 낳은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국정농단 사건에서 이 부회장의 뇌물과 횡령 행위는 경제력으로 민주주의 가치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며 “근거 없는 경제 타격을 이유로 이 부회장을 풀어주면 정권이 바뀌어도 재벌 권력은 언제까지나 유지될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을 심어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불법승계’ 사건에 대해서도 “일련의 범죄 정황을 볼 때 일회성 실수가 아니다”라며 “이 부회장 개인의 이익을 위해 국가 시스템을 여러 차례 조직적으로 기만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부회장 사면은 향후 재판에도 영향을 미쳐 공정성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부회장은 합병 전후 회계분식 등 위법 행위를 저지른 혐의로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정 교수는 이 부회장 사면이 국민 정서에 미칠 악영향도 우려했다. 그는 “국민 대부분은 이 부회장 개인과 삼성이라는 기업을 결부해 인식하지 않는다”며 “이 부회장이 풀려나는 모습은 해당 사안에 관심이 없던 국민에게도 묘한 좌절감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돈이 많고 세력이 크고 인맥이 좋은 사람은 법 위에 설 수 있다는 생각은 한국 법치주의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이 단기적인 이해관계에서 사면을 강행하면 국민에게 깊은 실망감을 안기게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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