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노동관이 20일 도마 위에 올랐다. 전날 공개된 인터뷰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시대착오적인 노동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다. 윤 전 총장은 자신의 발언을 왜곡한 공세라며 발끈했지만,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발단은 19일 오후 공개된 '매일경제'와의 인터뷰다. 윤 전 총장은 '주 52시간제에 대해 기업들의 불만이 적지 않다'는 질문에 자신이 지난 8일 민생투어의 일환으로 만났던 스타트업 청년 창업가들과 만난 자리에서 나눴던 얘기를 꺼냈다.
그는 "스타트업 청년들을 만났더니 주 52시간제도 시행에 예외조항을 둬서 근로자가 조건을 합의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토로하더라"라며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실제 윤 전 총장은 스타트업 창업가들과의 간담회 중 "일선에서 뛰는 분들한테 여쭤보고 싶은 게 있다"며 "주 52시간제나 해고의 엄격성, 최저임금 등이 스타트업이 커가는 데 발목을 잡거나 불편함이 있는가"라고 적극적으로 물었다. 정부 노동 정책의 반대 목소리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이 다분한 질문이었다.
일부 참석자들은 "주 52시간제를 위반하면 대표가 형사처벌을 받아서 걱정된다", "법을 어기면서 할 생각은 없는데 주 52시간이라든지 고용 노동력 제도들이 스타트업에는 맞지 않는 옷"이라고 주장했고, 윤 전 총장은 자신이 간담회에서 들었다며 인터뷰 답변으로 내놓은 것이다.
윤 전 총장의 답변대로 일주일에 120시간 바짝 일하려면, 휴일 없이 일할 경우에는 하루 17시간이 넘는 시간을, 주말을 제외하면 24시간 내내 일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과도한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도입된 '주 52시간제' 취지를 무색하게 한 발언이자, 여전히 '과로 사회'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노동 현실과도 동떨어진 발언이다. 장시간 노동은 산업재해 사망사고의 원인이기도 하다.
더욱이 윤 전 총장이 예로 든 스타트업계는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문제가 빈번히 불거지는 업종 중 하나다. 정해진 기한 내 집중적인 노동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장시간 노동을 방치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특히 업계 사정을 위한다는 이유로 탄력근로제·선택근로제 등 유연근로제도 시행 중이지만, 윤 전 총장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120시간' 발언 외 문제의 발언도 수두룩
정치권에선 "경총 회장 출마했나" 비판 쇄도
문제의 발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윤 전 총장은 '일자리 창출 해법'을 묻는 질문에는 "기업이 일자리를 만들게 해줘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고용 보호가 지나치다"며 "그러니 자꾸 해외로 나가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은 민권법상 위배 조치만 없다면 해고가 자유롭다"며 "언제든 해고할 수 있되, 해고 과정에서 부당한 차별이 있었다면 엄청난 액수의 손해배상을 인정해 준다"고 사례를 들었다.
윤 전 총장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까지 하자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회사 생존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거나, 회사가 수익 구조 개편을 위해 기존 사업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업부를 만든다거나 할 때는 해고나 조기 퇴직 프로그램을 가동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 정도 노동유연성만 확보해도 기업이 훨씬 사업하기 좋아지고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재계와 관련된 입장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윤 전 총장은 '과도한 경영진 처벌을 우려하는 시선이 있다'는 질문에 "경영진을 직접 사법처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개인을 형사처벌하기보다는 법인에 대한 고액 벌금을 부과하는 등의 법인의 형사 책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형사법이 개정돼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기업의 입장에선 조직 와해 없이 경영진 관련 형사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경영진의 해이 문제에 대해서는 주주들의 막대한 손해배상 청구로 처벌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정치권에서는 윤 전 총장의 인식을 두고 '시대에 맞지 않는 인식'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가장 큰 논란이 된 '주 120시간' 발언 외에도 노동 유연성을 강조한 발언이나 기업 경영진의 형사처벌을 반대하는 발언들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다.
당장 이날 내내 범여권 의원들로부터 뭇매를 맞았던 '주 120시간' 발언에 대한 비판은 국민의힘에서도 나왔다. 김성태 전 의원은 페이스북 글을 올려 "이제 겨우 정착되고 있는 근로시간 규제를 섣불리 무력화한다면 결국 더 심각하게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은 밑바닥의 힘없는 근로자들"이라며 "IT 업종 근로자들도 기계가 아니다. 그들의 젊음과 건강을 무제한으로 갈아 넣을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함부로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인 박용진 의원은 우리나라의 고용 보호가 지나치다는 윤 전 총장의 주장을 직격하며, 우리나라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일깨워줬다.
박 의원은 페이스북 글을 통해 "2020년 5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평균 49.4세에 주 된 일자리에서 퇴직하는데, 우리나라의 실질 은퇴 연령은 72.3세(2018년 기준)로 OECD 국가 중 1위"라며 "결국 우리나라 사람들은 70이 넘도록 일을 하는데, 상대적으로 처우가 괜찮은 일자리에서는 50이 되기도 전에 퇴직하게 되고, 이후 20년 넘게 불안전한 일자리를 전전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의원은 "이게 윤 전 총장이 고용 보호가 과도하다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며 "노조의 교섭 능력이 큰 소수의 사업장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은 윤 전 총장이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그 수준까지 이미 유연해져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계 출신'인 민주당 이수진 의원(비례)은 사실상 해고의 자유를 주장한 윤 전 총장을 향해 "윤 전 총장의 해고 자유주의, 재벌 무책임주의는 18세기에나 어울리는 철학 없는 노동관"이라며 "경총 회장에 출마한 것이라면 인정하겠지만 대통령 후보로 나가겠다면 그 18세기 생각, 당장 바꾸라"고 일침을 가했다.
같은 당 박주민 의원은 "윤 전 총장이 원하는 나라의 모습은 노동자가 주 120시간 일하는 나라, 그러다 과로사가 발생하면 CEO가 아니라 법인에 책임을 묻는 나라, 노동자에겐 죽도록 일할 자유를, 재벌 총수나 CEO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나라, 그런 나라인 것 같다"고 일갈했다.
"왜곡이다" 부랴부랴 해명 나선 윤석열
자신 향한 비판도 "말꼬투리만 잡아" 비난

파장이 커지자 윤 전 총장은 부랴부랴 해명에 나섰다.
대구를 방문한 윤 전 총장은 기자들과 만나 관련 질문이 나오자 "자꾸 왜곡을 하는 모양"이라며 "근로자들을 120시간 일을 시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윤 전 총장은 스타트업계를 만나 나눴던 대화 내용을 재차 언급하며 "월 단위나 분기, 6개월 단위로 해서 평균적으로는 52시간 하더라도 집중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노사 간의 합의에 의해 (노동 시간을) 변경할 수 있는 예외를 뒀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한 것"이라며 "저하고 정치적으로 반대쪽에 있는 분들이 마치 제가 120시간씩 일하라고 했다는 식으로 왜곡해서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얘기"라고 잘라 말했다.
윤 전 총장은 이후 질의응답 과정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질문이 나오자 "제가 120시간 노동을 해야 한다고 조작을 해서 유포하는 사람이 있다"며 "수십 년 68시간을 일하다가 52시간을 맞췄는데 어떤 독재자가 일주일에 120시간 일하게 만들겠나"고 발끈했다. 사과는커녕 자신이 한 발언마저 '왜곡', '조작'이라며 부정한 것이다.
'경영인에 대한 형사처벌 대신 법인에 대한 처벌'을 언급한 데 대해서도 형사상 처벌보다는 민사상 책임을 묻는 미국의 추세를 따라가야 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업을 압수수색하고 전 직원을 소환해 조사함으로써 기업이나 근로자, 주주들에게 불안감을 주는 방식에서 위법과 불안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에 대한 형사처벌을 명시한 중대재해법의 처벌조항은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는 "중대재해법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 같다"고 즉답을 피했다.
윤 전 총장은 페이스북 글에도 비슷한 취지의 반박 글을 올렸다. 그는 "제가 부당노동행위를 허용하자는 것이 아니다"라며 "주 120시간을 근무하는 것은 누가 봐도 불가능한 얘기로서 제게 그 말을 전달한 분들도 '주 52시간제를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데 따른 현장의 어려움'을 강조한 것이지 실제로 120시간씩 과로하자는 취지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범여권을 중심으로 비판이 나오는 데 대해서는 "현장의 목소리, 청년들의 고충에 귀 기울여 정책을 보완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말의 취지는 외면한 채 꼬투리만 잡고 있다"고 깎아내렸다.
한편, 윤 전 총장은 지난 달 29일 정치참여 선언을 한 뒤 22일째인 이날까지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정은 잡지 않고 있다. '윤석열이 듣습니다'라고 이름 붙인 민생투어에서는 탈원전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자영업자, 부동산업자 등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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