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광화문 ‘기억공간’과 세월호 유가족들

지난 27일 ‘4.16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협의회)가 ‘세월호 기억·안전 전시공간’(기억공간) 관련 서울시의 철거에 대해 밝힌 입장문 중에 “서울시는 어떤 고민도 하지 않고 대안조차 제시하지 않았다”라는 대목이 있다. 시장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철거를 운운하며 또 다른 충돌을 감행하는 것을 바라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철거를 하는 이유가 뭔지 속내가 궁금하다. 사실 궁금하다기보다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나 있는지 묻고 싶다.

광화문 광장이나 그 근처에 갈 일이 생기면 시간이 될 때마다 기억공간에 가게 된다. 2014년 4월 16일. 잊을 수도 없고 잊힐 수도 없는 날이다. 박근혜 정부가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려 했지만 상상할 수조차 없는 파렴치함에 분노한 사람들은 일제히 광장으로 나와 항거했다. 당시 거대한 물결을 이뤘던 시민들의 함성엔 추모와 분노 이상의 그 무엇이 담겨 있었다. 아이들이 살려달라는 소리에 아무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생때 같은 목숨이 사라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봐야 했던 무력함을 확인하는 자리였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수많은 참사가 이 땅에 있었다. 꽃 같은 목숨이 땅에 떨어져도 ‘사건’으로 보도될 뿐 근본적인 대책 없이 또 다른 사건사고에 밀려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닐 터이다.

그런데 기억공간 철거라니. 세월호 유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 한 가운데 돌덩이가 앉은 듯 묵직하기만 하다. 참사 직후 분노와 애도의 마음을 담았던 사람들의 눈길이 시간이 지날수록 차갑게 변했거나 심지어 “이제 그만해라. 그만하면 됐지 않았냐?”라고까지 말하는 목소리들을 유가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당신들의 아픔에는 공감하지만 현재의 불편함은 느끼고 싶지 않다는 그 이기적이고 물아적인 태도를 말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27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기억공간에서 아이들의 사진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김철수 기자

유가족들은 자신이 원해서 유가족이 된 게 아니다.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을 일을 갑자기 경험하면서 ‘세월호 유가족’으로 규정된 것이다. 그들은 유가족이기 이전에 어느 누구의 엄마였고, 아빠였고, 형제였고,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세월호’라는 글자가 삶에 새겨진 순간부터 자신은 사라지고 감정이나 행동 심지어 생각조차도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을 강요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유가족’에 관심과 동정심을 보이면서도 함께 생활하기엔 불편해 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세월호와 같이 국가적인 참사나 재난사고로 자녀나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경험을 연구한 자료에 의하면, 시간이 흘러갈수록 잊히지 않은 트라우마 경험과 더불어 사회적 낙인과 자기 낙인과 같은 낙인경험을 광범위하게 겪으면서 사회적응과정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권옥현, 허소정, 이동훈, 2021).

실제 만나본 유가족들 대부분은 스스로 죄인이며 행복해서는 안 된다는 죄책감을 가슴 깊이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피해자이면서도 또 다른 비난과 낙인을 강요당하며 ‘피해자 비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죄책감을 지닌 채 스스로 낙인화하는 일은 사회활동은 물론 대인관계를 맺을 때도 자신을 숨기거나 이중적인 행태로 살아가게 한다. 사회에 공고한 소속감을 갖지 못한 채 이방인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도 예외일 수 없고
위험사회에서 위험도 예외는 없다
기억공간은 연대의 공간이자 위로의 공간

누군가 자신을 기억하고 그리워해주는 일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 딸,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거나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다면 누구든 혼절하지 않겠는가. ‘가슴이 타서 재가 된다’는 말은 한낱 비유적인 표현으로 흘려듣기엔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상담을 하면서 생사를 확인하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실재화 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접하곤 한다. 그 사연이 이해도 되고 그래서 함께 의미를 찾고자 할 때도 있지만 무슨 말로 그 마음을 위로해주고 다스려야 할지 먹먹할 때가 더 많다.

그래서 ‘기억공간’이나 ‘추모공간’은 돌아오지 못한 자에 대한 위로이자 애모의 마음을 달래는 곳이 되기도 하지만, 상실을 인정하고 현실적인 대처를 하는 근거이자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유가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을 터이다. 죽음을 죽음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감히 헤아리기도 어렵다. 다만, 삶이 죽음으로 화석화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세월호 참사 7주기 선상추모식ⓒ뉴시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벡은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라고 정의하였다. 과학이 발전하고 의학기술이 진화해도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서 발생한 사소한 사건이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풍요의 이면에 상시적인 위험이 일상화되어 있는 현대의 모습을 잘 드러낸 말이다. 라틴어 격언 중에 “Hodie mihi Cras tibi”라는 말이 있다. 공동묘지 입구에 쓰여 있는 말로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뜻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는 의미이리라. 위험사회에서 위험은 누구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 위험은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재이다. 위험을 양산하는 현재의 시스템을 바라보지 않고 그저 내 눈앞에 치우기만 하면 된다는 사고야말로 또 다른 위험을 발생시키는 트리거이다.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여러 참사로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며 텐트를 치고 시위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야 제각각이겠지만 추모공간이나 텐트를 거추장스럽고 불편하다고 치우려고만 하지 말고 고인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애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수용할 수는 없는 것일까. 위험사회에서 우리 또한 타의에 의해 유가족이 될 수 있다. 유가족 스스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입도 귀도 틀어 막힌 채 돌멩이처럼 침묵하길 강요한다면, 그런 사회가 더 비참하고 참혹하지 않겠는가.

광화문의 ‘기억공간’은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을 달래는 위로의 공간이자 우리가 함께 하는 연대의 공간이다. 또한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앞에서 삶의 시간을 멈추지 않고 살아가겠노라는 당당한 선언의 공간이다. 적어도 그곳은 우리의 마음을 모으는 애도의 공간이자 과거의 참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공간으로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은가. 마음이 흐트러지고 잠시 눈이 멀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할 때 그곳에서만은 마음을 추스르고 다듬어낼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이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삶에는 늘 고통과 기쁨이 혼재한다. 좋은 것뿐만 아니라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도 함께 기억할 때 비로소 현재의 의미가 되살아난다. 우리가 진정으로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시민의 품과 같은 광화문 광장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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