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의 종말] 사달은 권력층이 내고 피해는 농민이 본 소값 파동

무리한 외국산 송아지 입식 장려가 화근, 결국 소값 폭락으로 이어져

소는 오랫동안 한국의 농민들에게 각별한 가축이었다. 집 뒷마당에 소 한 마리가 매어져 있으면, 든든한 살림 밑천이 있는 셈이었다.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동력이자, 재산의 일부이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소를 ‘생구(生口)’라 불렀을까. ‘생구’는 예전에 한 집에 사는 하인이나 종을 부르는 말이었는데, 소를 사람에 빗댄 것이니 그 만큼 소를 소중히 여겼다는 의미다.

1970~80년대엔 소 한 마리를 팔면 대학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학을 상아탑이 아닌 ‘우골탑’이라고 했다. 현재의 60~70대 중에 대학을 나온 사람은 우골탑을 쌓게 한 장본인들인 셈이다.

2021년 신축년을 하루 앞둔 31일 전북 장수군 한 축산농가에서 태어난 송아지 세쌍둥이가 난방기구 아래에서 초유를 먹고 있다. 2020.12.31.ⓒ사진 제공 = 장수군

경운기가 등장한 이후 운반과 논갈이 등 ‘일소’로서의 용도가 다한 한우는 ‘비육우’로 변화해야 했다. 국민들의 소득 수준이 향상되고 육류 소비가 증가한 탓이다. 정부도 이에 빠르게 대응했다. 당시 증가하는 쇠고기 소비에 비해 국내 소 사육 기반이 취약했다. 이로 인해 쇠고기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되자 1976년 처음으로 쇠고기 수입을 시작했다.

또 만성 부족 상태였던 축산물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이를 주곡 작물 생산과 복합시켜보자는 발상을 가지고 1982년부터 ‘복합영농’을 추진한다. 복합영농은 논농사만 짓지 말고 유휴시간을 이용해 몇 마리씩 소를 기르라는 것이었다. 소가 먹는 여물이 볏짚이고 외양간 안에 볏짚을 깔게 되니 좋고, 소의 배설물과 바닥에 깐 볏짚을 거둬 퇴비를 만들어 논에 넣으면 그것도 이익이라는 것이었다. 일종의 순환농업이 이루어지는 셈이었다. 아이디어는 훌륭했다.

복합영농을 추진하며 펼친 대표적인 정책이 ‘소 입식자금 지원’이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은 의욕이 넘친 나머지, 소 입식자금 지원을 기존에 비해 매우 키웠다. 1983년엔 그 금액이 873억 원까지 늘어났다. 당시 한우 입식사업 지원 내역을 살펴 보면, 암송아지를 구입해 새끼를 낳게 키우는 조건으로 일반 축산농가는 마리당 50만원, 전업농가는 마리당 30만원씩 3년 거치 2년 분할 상환조건으로 축산진흥기금에서 지원했다.

이로 인해 바야흐로 소 사육 붐이 농촌에 일어나게 됐다. 소값이 크게 오르면서 농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농사를 지으며 함께 소를 기르려는 의욕이 높아졌는데, 정부가 “소를 키우시오”하며 소 사육 장려 정책까지 펼치니 당연한 일이었다. 소 사육농가는 1982년에 전체 농가의 45% 수준이었던 것이 1985년에는 전체농가의 57%까지 늘어난다.

필자도 그 당시 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제대를 하고 취직 자리를 알아보며 소 세마리를 사서 길렀다. 홀스타인 수소로 요즘은 육우라고 하는 품종이었다. 송아지를 마리당 50만원을 주고 사서 외양간에 매어 길렀다. 전근대적 방식의 소사육은 노동의 연속이었다. 들판으로 냇가로 나가 풀을 베어다 먹여야 했다. 사료를 아끼기 위해 최대한 풀을 먹인 것이었다. 그때는 농가마다 그렇게 적게는 한두 마리 많게는 예닐곱 마리씩 길렀다.

홀스타인은 한우보다 증체 속도가 빨라 12개월이면 500kg에 도달한다. 1983년에 사 기른 소가 이듬해 성체가 되어 팔기 위해 소장수를 부르니 마리당 50만원을 준다는 것이다. 50만원 준 송아지를 성체로 파는데 그대로 50만원을 준다니 사료값은 물론이고 노동력에 대한 보상이 없는 셈이었다. 그래도 더 이상 붙들고 있으면 사료값이 들어가니 눈물을 머금고 팔아야 했다. 그 이후로 소를 기르지 않았다. 그땐 소값이 왜 폭락했는지 알지 못했다. 마침 직장을 잡아 집을 나섰기에 관심도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1984~86년에 ‘소값 파동’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당시 전국의 농민들을 울린 것은 물론 일부는 세상을 등지게 만들었다. 농가 경제를 골병 들게 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 소값 파동의 배경엔 전경환(전두환의 친동생)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때도 계속되던 새마을운동과 전 씨의 무모한 압력이 맞물려 엄청난 사달이 나고만 것이다.

당시 정부는 1985년 한 해 동안 중송아지 74,164마리를 수입했다. 이는 엄청난 숫자였는데, 그 이전인 1981~84년 4년동안 수입한 143,513마리의 51.7%를 한 해에 들여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갑자기 소 수입이 늘어난 것은 당시 새마을운동협의회 중앙본부 회장에 취임한 전경환씨의 개입 때문이며, 이후 이것이 소 파동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고 한다.

1980년엔 암송아지(3∼4개월) 1마리가 15만9천원, 수소(4백kg) 1마리가 78만5천원이었다. 소 사육 붐이 일어난 후인 1983년엔 같은 개월 수 암송아지 1마리가 1백만원, 수소 1마리는 1백52만원까지 값이 치솟았다. 이에 따라 소 수입과 입식·판매가 커다란 이권이 됐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입식권을 얻어 농민들을 골탕먹이기도 했다. 그중엔 병든 소를 판 질이 나쁜 인간들도 있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전경환이었다. 이때 전 씨는 전국의 새마을운동 지도자에게 송아지를 분양해, 혜택을 주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농림수산부에 소 수입권을 달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것이다. 당시 전 씨는 정부의 축산 정책에 호응하고, 별다른 보수도 없이 고생만 하는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에게 송아지를 입식 시켜 소득을 늘려주겠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이 같은 주장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이를 위해 큰 이권이 발생하는 소 수입권을 새마을본부에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농림수산부는 민간단체에 소 수입권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리고 당초 5만마리던 소 수입 계획을 수정, 7만4천여마리로 늘리되 소 수입은 정부(축협대행)가 하겠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그러니 전 씨가 일을 벌인 후 늘어난 수입 소 두수는 2만4천여마리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한꺼번에 대량으로 소가 들어왔으니, 오르기만 하던 소값이 급작스럽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값은 1984년 하락하기 시작해 1986년까지 계속 떨어진다. 평균 1백만원까지 올랐던 암송아지 한 마리 값이 1986년엔 22만4천원까지 떨어졌고, 같은 기간 수소는 1백52만원에서 99만5천원으로 낮아졌다. 86년의 수소값은 83년의 암송아지값에도 못미치는 지경에 이른다.

당시 경기도 안성의 농민들에게도 소 입식 바람이 불었다. 입식권을 가지고 있던 화성의 활빈교회 김진홍 목사와 안성의 서 모 씨가 농민들에게 소를 분양하며 값을 크게 올려 받았고 병든 소를 분양해 무리를 빚어 안성농민들이 소몰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정부가 한꺼번에 많은 소를 들여오다 보니 미국에서 건강한 소를 제대로 골라 들여오지 못했다. 들여온 소들 중에 병든 소가 섞여 들어 이 또한 파동의 한 요인이 됐다. 수입소의 7.8%가 병들거나 죽었다는 통계가 있다. 이 같은 과정에서 외국의 축산업자, 한국 교포 브로커 등이 전 씨에게 밀착돼 커미션을 주고 소를 팔아먹었다는 설이 파다했다.(안성농민회 20년사 참고) 시작할 때는 영농후계자·새마을지도자에게 혜택을 주자는 의도였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이들을 경제 상황을 망친 꼴이 됐다.

뒤늦게 정부는 사태 수습에 나섰다. 농림수산부는 부랴부랴 소값 안정을 위해 생우 수매 계획을 세우고, 1983~84년 소 입식 농가에 하던 각종 지원을 중단해 버렸다. 1985년 들어서는 쇠고기 수입을 전면 중단하고 암소 도축 연령을 폐지하는 등, 1984년부터 87년까지 4년 간 10여 개의 대책을 쏟아 냈다. 그렇지만 파탄난 농정에 대한 농민의 불만은 폭발하고 말았다.

경찰에 가로막힌 농민들이 경남도청에서 소를 풀어 놓으려하자 경찰이 이를 막고 있다.(자료 사진)ⓒ구자환 기자

농민들은 소값 피해 보상 및 농축산물 수입 개방 저지투쟁을 조직했다. 농수산물 수입개방저지투쟁은 1985년 7월 1일 경상남도 고성 농민들의 시위를 필두로 해, ‘소몰이투쟁’이라 불리는 농민의 생존권 투쟁으로 광범하게 확대되었다. 경남 고성 농민들은 “재벌은 돈밭에, 농민은 똥밭에”, “양키 소 몰아내고 한국 소 살아보자” 등의 구호를 플래카드와 소의 잔등에 부착하고 ‘경운기·소몰이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이 투쟁은 최초의 ‘소몰이투쟁’으로 국도를 차단하는 등 적극적인 투쟁의 모습을 보였다.

이후 ‘소몰이투쟁’은 7∼8월 사이 안성(경기), 원주·춘천·홍천(강원), 안동·의성(경북), 고성·진양(경남), 괴산·음성·진천·청주(충북) 등 20여 개 시·군으로 확대돼 총 2만여 명의 농민들이 참가했다. 농민들은 “소 값 피해 보상하라”, “외국 농축산물 수입 중단하라”, “농가부채 탕감하라”, “미국은 농산물 수입을 강요 말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경운기에 방송시설을 설치하고 몰고 나와 시위를 했으며, 소의 잔등에 각종 구호를 붙여 가두 선전을 벌이기도 했다. 때론 경찰 저지선을 돌파해 수십 킬로미터를 행진하며 주위 농민들이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기도 했다.

나중엔 국도차단·도로점거·읍내장터 장악, 군 소재 집결지에서 시위·대회·농성 주도 등 강력한 투쟁 양상을 띠었는데, 이를 ‘경운기·소몰이 가두시위’라 불렀다. 투쟁 성격도 초반에는 소 값 피해보상과 농축산물 수입 중지를 내건 생존권 확보의 성격을 띠었으나, 후반에는 군사 독재 반대라는 정치 민주화운동의 성격도 띠게 됐다. 이 시기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은 그해 9월 23일 가톨릭농민회가 주최한 전국 농민대회와, 9월 25일 가톨릭농민회·기독교농민회·가톨릭여성농민회가 공동주최한 ‘소 값 피해보상운동 진상 보고대회’로 전국 규모로 수렴되면서 마무리되었다.(가톨릭농민회 50년사 참고)

1980년대 농정을 되짚으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 ‘소값 파동’이다. 정리해보자면, 정부가 농가에 무분별하게 외국산 송아지 입식을 장려하다 파동이 터진 것이다. 1980년부터 1983년 사이 소값이 계속 상승세를 타자 정부가 육우 품종 개량과 사육 두수 확대 정책을 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여기에 권력형 비리까지 겹쳐져 농민들이 이중 삼중의 고통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그후로도 군사독재정권의 농정실패는 계속된다. 양담배의 수입을 시작해 잎담배 농사가 수지가 맞지 않자, 많은 담배농가들이 고추농사로 전업한다. 그러자 고추값이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 때도 농민들의 분노는 타오른다. 1980년대 말을 농민 투쟁의 시기로 보는데는, 소몰이 시위를 시작으로 이후 해남의 수세폐지투쟁, 봉화의 고추 투쟁이 이어진 것이 결정적이다. 이런 일련의 시위들은 농민들의 단결된 투쟁을 통해 시작됐으며, 이후 전국농민회총연맹이라는 투쟁체를 만들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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