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민갑의 수요뮤직] 잔나비의 수줍고도 자신만만한 고백

밴드 잔나비의 새 음반 [환상의 나라 : 지오르보 대장과 구닥다리 영웅들]

이 얼마나 자신만만한 음반인가. 이 얼마나 거창한 음반인가.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음반인가. 밴드 잔나비(최정훈, 김도형, 윤결, 장경준)가 7월 28일 발표한 새 음반 [환상의 나라]를 들은 이들은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잔나비가 칼을 갈고 만든 음반이라고, 어마어마하게 공들여 만든 음반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그리곤 비틀즈나 퀸 같은 록의 거장을 떠올리고, 그들이 만든 명반 가운데 특히 몇몇 음반을 연상할 것이다. 록 마니아라면 수 없이 들었을 음반, 이 음반에는 그 음반들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오마주라고 해도 좋고 모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어쩌면 잔나비는 이 음반을 만들기 위해 지금껏 밴드를 해왔는지 모른다. 이 사운드를 내기 위해 기회를 엿보다 드디어 결행했을지 모른다. 음반 작업을 끝내고 스스로 뿌듯하고 감격스러워 했을 가능성도 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음반이다.

밴드 잔나비의 세 번째 앨범 '환상의 나라' 커버 이미지ⓒ사진 = 페포니뮤직

‘환상의 나라’로 시작해 ‘컴백홈’으로 끝나는 13곡의 노래는 잔나비표 콘셉트 음반으로 단단히 묶여있다. 특히 ‘환상의 나라’부터 ‘소년 클레이 피전’까지 일곱 곡은 한 묶음이나 마찬가지다. 노래가 시작되면 막이 오른다. 이 음반은 잔나비가 스스로 대본을 쓰고 무대에 올라 연기하고 노래하고 연출해 만든 뮤지컬 라이브 음반 같다.

배우처럼 극적으로 노래하는 방식만 있는 게 아니다. 브라스와 스트링을 동원하고 합창단을 활용해 부풀린 음악들은 화려하고 풍성하며 변화무쌍하다. 잔나비가 그동안 선보였던 문학적인 노랫말과 서정적인 서사와는 톤이 다른 이 음악들은 옛 명반에 대한 경의와 자신들의 음악적 야심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런 음반을 들으면 두 가지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운드를 내다니’, 그리고 ‘왜 굳이 이런 사운드를 냈을까’. 이번 음반이 좋게 들린다면 화려하고 멋들어지게 치장했기 때문이 아니다. 전작들에서 이미 확인된 최정훈의 창작력이 이번 음반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게 큰 역할을 한다.

최정훈의 곡은 드라마틱하게 연출하기에 최적화된 형태로 만들어졌고, 노랫말은 여전히 최상의 멜로디와 함께 거침없다. 앨범 전반부의 곡들은 딴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고 혼을 빼놓듯 쏜살같이 흘러간다. 그만큼 노래마다의 연출은 흡인력 높고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누구를 위한 노래였던가’와 ‘밤의 공원’에서는 잔나비의 기존 매력을 보여주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다.

밴드 잔나비ⓒ페포니뮤직

잔나비가 보여주는 환상의 나라는 어느새 지나온 청춘의 나라이다. 지나간 사랑의 나라이다. 닿을 수 없는 무지개의 나라이다. 폴 메카트니와 존 레논이 함께 있던 시절 비틀즈의 나라이며, 잔나비가 감당한 쇼 비즈니스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 곳에서 잔나비는 비틀거리고, 살아남아야 했다.

외로움조차 놀이처럼 고백하는 잔나비의 목소리는 그들이 지나온 시간이 짧지 않고 고단했음을 웃는 얼굴에 숨겨 드러낸다. 어긋나는 사랑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노래 ‘로맨스의 왕’ 역시 가면을 쓴 듯 경쾌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더더욱 음반의 제목에 부합한다. ‘페어웰 투 암스! + 요람송가’도 젊음을 보내야 하는 송가의 연장선상에 있다.

잔나비의 리드미컬한 사운드는 좋았던 시절, 돌아보니 환상 같았던 시간을 지나온 이의 쓸쓸한 회상이다. 인정이며 그리움이다. 돌아보면 누구를 위한 노래였던가 싶은 이야기들. 잔나비는 과거에 대한 회상과 애수를 과거의 음악 스타일로 펼쳐놓는다. 화려해서 음악이 멈춘 순간을 더 허망하게 느끼도록 대비시키는 이들의 어법은, 옛날을 돌아보는 이의 복잡한 마음을 표출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 사운드는 누군가 이미 들려주었던 사운드라고 폄하할지 모른다. 예전에 충분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던 스타일을 들으려면 예전 음반을 들으면 되지 지금 밴드의 목소리로 들을 필요가 있겠냐고 반문할 가능성도 있다. 오늘의 밴드가 예전의 사이키델릭과 챔버 팝 스타일을 재현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냐고 질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사운드를 잘 뽑아냈지만 내내 눈부신 사운드를 얼마나 자주 다시 들을지 모르겠다는 의견도 가능할 것이다. 이 음반에 대한 평가는 이 부분에서 갈라지지 않을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어쨌든 예술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기획하고 연출해서 음악을 만들고, 팬들의 강력한 지지를 끌어내 인기를 누리는 방식이 가장 앞서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이지만, 예술가를 여전히 예술가이게 하는 것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방식으로 말하고자 하는 어떤 정념일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정념의 의지이고, 정념대로 밀고 나가 완성하는 고집이자 창작 욕구일 것이다.

잔나비의 [환상의 나라]는 잔나비가 세운 환상의 나라이다. 환상의 나라를 만들고 세우는 일이 예술가의 일임을 보여주는 작품집이다. 오래도록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이제는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일을 잔나비는 결국 해냈다. 이 또한 나름의 의도가 있는 결과물이겠지만, 자신들이 경배하는 예술가들과 다르지 않은 태도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줍고도 자신만만한 고백록 앞에 고마움이 앞선다. 내가 이 음반을 다시 듣는다면 바로 이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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