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만난 하나님] 교회 내 ‘남녀 질서’ 교리가 모든 차별의 씨앗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화가 자코포 로부스티(1518~1594)가 그린 아담과 이브ⓒ이탈리아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남녀 질서’를 ‘정상’으로 여기는 한국 교회

얼마 전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나선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자신의 가족 3대가 모여 설 명절에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부르는 사진을 공개해 논란이 일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정부 고위직이었던 그의 가족 행사 풍경에 누리꾼들은 여러 반응을 보였는데, 그중엔 '국가주의, 전체주의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최 전 원장 측은 그 같은 지적을 받자, 최 전 원장 부친 고 최영섭 대령의 며느리들 명의로 입장문을 냈다. 최 전 원장 가족들은 고인이 몇 년 전 부터 가족 행사에서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자고 제안했다면서, “누군가는 ‘가족 강제가 아니냐’고 비판한다. 아니다. 우리는 나라가 잘 된다면 애국가를 천 번 만 번이라도 부를 것”이라고 밝혔다.

애국가를 천 번 만 번 부르는 게 애국이 된다고 생각하는 최 전 원장 가족들의 발상이 놀랍다. 지난해 광복절에 광화문에서 태극기를 흔들어 대며 ‘애국’을 외치던 태극기 부대가 겹쳐 보인다고 하면 과한 걸까. 광복절 즈음해 너도나도 ‘애국’을 외쳐대는 이 시기, 언제부턴가 ‘애국’이 왜 불편한 단어가 되어버린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사실 내가 최 전 원장 가족 사진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최 전 원장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요 교회 장로로서, 가정 안에서 행사하는 가부장적인 권력과 이로 기인한 신앙관에 대해 우려한다. 그는 한 라디오 방송에서 “우리 집안 며느리들도 기꺼이 참석하고, 아주 같은 마음으로 애국가를 열창한다”고 말했다.

아마도 며느리들이 시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억지로 했을 거라는 외부의 시선을 잠재우려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의 발언 중에서 며느리들이 “아주 같은 마음으로” 참여했다고 한 부분이 거슬린다. 과연 그 집안 며느리들이 국가와 교회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시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있었을까?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가족들이 애국가를 제창하는 모습ⓒ최재형TV 캡쳐

그 집안 상황이나 며느리들의 속내를 자세히 알 순 없지만, 내가 며느리였던 시절의 경험을 되살려 생각해 본다. 원로장로였던 시아버지의 뜻을 집안에서 거스르기란, 마치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었다. 교회 사역이 밤늦게 끝나는 상황에서도, 명절날 가족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는 며느리 역할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 남성이 교회 사역을 하면 1순위로 우대 받았지만, 여성들이 하는 교회 사역은 항상 며느리 역할보다 부차적으로 취급되었다.

이는 교회가 ‘남성 어른’을 하나님 대표로 여기는 가부장적 신앙 체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목사나 장로, 권사를 시부모로 둔 여성에게 있어, 교회는 더 큰 가부장적 의무를 요구하는 ‘공적 시댁’일지도 모르겠다. 교회에서 늘 강조해온 ‘주 안에서 한 마음’이라는 것도 결국 ‘남성 목회자의 뜻’을 전 교인이 따라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 깔려 있었다.

나는 기독교 반성폭력센터 공동대표로서 2021년 교단총회 정책 제안 포럼에서 발표할 ‘교단의 여성 관련 문제점과 개선 방안’에 대한 글을 준비하면서,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여성 관련 문제점은 여성에게 ‘동등 대표직’을 인정하지 않음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교회에선 21세기에도 여전히 남성에 의한 성경 해석과 설교, 그리고 교회법과 의사 결정 기관(당회, 노회, 총회) 운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남발되고 있다. 남성의 대표권 남용, 통제되지 않는 언어 권력은 신학 담론과 설교 속에서 남녀 위계질서를 계속 확고히 하고 있다.

교회는 공적 설교에선 여성을 ‘유혹녀’, ‘꽃뱀’으로 몰아 정신적·신앙적·육체적으로 종속 시켜 놓고선, 사적으론 여성에게 위로, 접대받으려 하는 문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교회를 성범죄를 저지르기 쉬운 곳으로 전락시켰다. 게다가 남성 중심의 의사 결정 구조를 갖는 교회는 남성 목회자의 성폭력을 덮는 ‘은닉 시스템’을 작동시켜, 피해 여성을 오히려 가해자로 만드는 패악한 짓을 서슴지 않고 있다.

지난 2019년 대한예수교 합동총회 제104회 회의가 끝나고 총대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여성 안수를 금지한 예장 합동에서 여성은 장로와 목사가 될 수 없어 여성은 회의 표결에 참여할 수 없었다.ⓒ평화나무 제공

위 사진은 보수 교단인 대한예수교 합동총회 제104회 회의 구성원들의 모습이다. 사진 속 사람들은 모두 남자다. 그래서일까. 2016년 합동 교단에 속한 평양노회와 총회는 대법원에서 성추행을 했다고 판결한 전병욱 목사에 대해 “사람은 잘못 할 수 있다. 그걸 자꾸 파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가?”라며 사도신경에 명시된 ‘거룩한 공회’의 정체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징계하지 않았다. 합동총회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성들에게 왜 ‘남녀 질서’ 교리를 들이대는 것일까?

남성만을 신의 대리자로 자처하여 생산한 ‘남녀 질서’ 교리는 모든 차별과 분열의 씨앗이 되어, 온갖 차별과 혐오, 배제와 분열, 그리고 성폭력과 성희롱을 낳고 있다. 가부장적 교회는 ‘남녀 질서’를 지키려다가 신자를 품어주는 교회의 ‘어머니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부성’, 그리스도 복음이 말하는 평등한 ‘제자직’, 그리고 육체의 부활을 믿는 기독 신앙에서의 몸(성)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인 여성은 어째서 ‘실패한 남자’가 되었나

제임스 B. 프리처드가 편집한 『고대 근동 문학 선집』(CLC, 2016, 번역서)이라는 책을 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창 1:27)라는 창조 교리는 고대 근동의 신관과 인간관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고대 근동(이집트, 우가릿, 메소포타미아 신화 등)의 신들이 사람을 만든 이유는 종처럼 부리며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묘사된다. 반면 성경의 인간 창조는 남자와 여자 모두 ‘신을 닮은’ 인격적인 존재로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존재로서 묘사된다. 매우 독특한 인간 창조를 보여준다. 이처럼 기독교의 하나님은 남녀에게 당신의 형상을 입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할 수 있도록 존엄하고 고유한 존재로 만드신 인격적인 분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성을 초월하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남성과 여성 각자가 하나님의 신비를 드러내도록 내재하신 분이기도 하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왕’(시 145)과 ‘용사’(사 42:13)처럼, 힘에 기반한 통치를 하는 남성적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론 자궁을 지닌 여성, 그리고 자녀를 잉태하고 출산하여 젖을 먹이며 한없는 사랑으로 돌보는 어머니의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한다(사 1:2; 43:1; 49:15; 호 11:3-4; 마 23:37).

인간이 이해한 하나님의 이미지는 신학적 지식의 앎이나 인간 관계에서의 감정과 기억, 그리고 몸의 경험과 분리될 수 없는 임의적이고 제한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유한한 인간이 초월적인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건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모두 포용하는 일이어야 한다. 현실은 과연 그럴까.

2017년 열린 예장 합동 총회장 앞에서 여성안수 허용을 요구하는 총신대 여동문회 회원들. 사진 제일 오른쪽이 강호숙 박사.ⓒ기타

안타깝게도 2천 여 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남성 교부들과 남성 신학자들, 그리고 남성 목회자들은 남성적 하나님의 이미지를 고착화해왔다. 그들은 마치 남성만이 하나님의 대리자인 것처럼 자처했다. 그러면서 여성과 여성의 몸을 열등하게 취급하고 ‘남녀 위계 질서’를 굳건히 하였다.

초대 교회 교부였던 클레멘트는 “남성이 털이 있다는 것은 남자의 뛰어난 속성 중 하나이다...(중략)...그래서 남자는 여자보다 털이 많고 더 따뜻한 피를 갖고 있으며, 더욱 완벽하고 더욱 성숙하다”라고 남성의 몸을 찬양하였다. 또,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여성은 ‘실패한 남자’”라는 성적 편견을 그대로 이어받아, 여성이 육체적으로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는 부정적인 여성관을 정립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휴머니즘과 함께 “여성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교리를 되찾은 종교개혁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칼빈(J. Calvin)은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는 것의 의미를 ‘상호성’과 ‘평등성’에 두었지만, 인류 타락 이후로는 여성의 종속 위치가 더욱 강화된 것으로 여겨 여성의 역할을 가정에 두었다. 이로써 교회 안에서의 ‘남녀 질서’ 교리는 급기야 ‘성경적?’이라는데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하나님 형상 회복과 기독교 복음

여성이 남성들이 정해 놓은 ‘남녀질서’에 끌려다니며 신앙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로서의 위엄과 고유성을 포기하는 일이다. 나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는 창조 교리(창1:27)는 하나님의 원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복음으로 완성되었다고 믿는다. 이제 예수 안에서 남녀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이 회복된 존재로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에 대해 신약학자 박영호 목사는 『우리가 몰랐던 1세기 교회』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그 현실에 참여하는 공동체는 이미 그 새 창조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아직 세상은 어둠 가운데 서로 차별하는 문화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은 이미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셨다. 그 세계에 여성들도 똑같이 하나님 형상으로서 존엄성이 온전히 회복된 존재로 참여하는 것이다. 세상의 문화가 바뀌기를 기다리거나 바뀌어야 한다고 말로만 주장하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부활의 첫 증인으로 여성을 택하신 하나님이 그 나라의 삶을 친히 보여주신다.

신학은 인간학과 분리될 수 없다. 신의 대리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남자와 여자 모두다. 하나님의 형상인 여성의 신앙과 삶은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와 돌보심의 사건에 동역하는 주체이기에, 남성과 여성은 진리와 복음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선취하기 위해선 교회법과 직분 제도, 그리고 의사결정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남녀 각자의 주체성, 대표성, 평등성을 기반으로 한 교회 제도와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교회는 말로만 ‘하나님 나라’를 외칠 게 아니라, 예수의 복음이 보여준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라는 새 질서 실천을 위해 노력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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