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자라는 아빠] 아빠가 갑자기 제모를 하게 된 이유

아이와 아빠 사이를 갈라 놓은 ‘어루러기’, 과거의 기억도 소환했다.

어제 저녁, 나는 욕실에서 스윽, 스윽 소리를 내며 면도중 이었습니다. 그러느라 물소리를 내지 않자, 아이가 화장실쪽으로 다가와 물었습니다.

아이:아빠, 어디에 있어?
아빠:욕실에 있어!
아빠 똥 누는 구나?
아닌데!

나의 마지막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아이는 멀어지는 발소리를 내며 놀이를 하러 갑니다. 이 때 뭘 하고 있었는지 아이는 꿈에도 모를 것입니다. 나는 곰팡이 치료제를 바르기 전에 겨드랑이 면도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더 빨리, 더 확실하게 곰팡이를 제거하기 위해서 난생 처음 제모를 시도한 것입니다.

며칠 전이었습니다.

아빠! 겨드랑이 아래에 얼룩이 생겼어!
그럴 리가 없는데! 얼룩이 몇 개나 보이니?
하나, 둘, 셋, 넷... 네 개야!
(거울을 보며) 어.. 정말이네. 분명히 다 치료해서 없어졌었는데.
아빠, 어떡해! (심각한 표정)

이 얼룩의 정식 이름은 '어루러기'입니다. 피부색보다 짙은 색이며, 손톱 크기의 둥근 반점 모양입니다. 면역력이 떨어지거나 여름철과 같이 곰팡이가 자라기 좋은 환경이 되면 평소 몸에 있던 어떤 효모균이 과다 증식을 해 생기는 피부 질환입니다.

때론 얄밉기도 하지만 대체로 늘 귀여운 수현이ⓒ사진 = 오창열

곰팡이를 발견한 날 이후 아이는 나와의 접촉을 피했습니다. 안으려고 하면 "으악, 곰팡이 옮아!"라며 얼굴을 힘껏 찌푸리고 도망을 쳤습니다. 아침에 비몽사몽 하며 잠시 서로 꼬옥 껴안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그 시간도 곰팡이가 빼앗아 갔습니다. 아이가 그토록 좋아하던 아빠 팔 베고 눕기, 아빠에게 다리 얹고 자기를 더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이에 전혀 생각지 못했던 장애물이 생긴 것입니다.

곰팡이 때문에 이런 수모를 겪다니! 아이 잘못이 아니라 곰팡이 때문임에도, 나도 심술이 났습니다. 아이가 발을 씻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우길래, 나는 겨드랑이 곰팡이를 문지르는 척을 한 후 아이 발을 만졌습니다. 곰팡이가 겁났던 아이는 진심으로 크게 화를 내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빠는 내가 잘못되어도 좋은 거야? 나쁜 사람이야! 원래 살았던 동굴로 돌아가!
(심술) 동굴까지는 아니었거든? 집은 집이었거든?

너무 심하게 울며 기분 나빠하는 모습에 나는 더 심사가 꼬여서 아이를 잘 달래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아이에게 거절을 당하는 나날이 며칠 간 이어졌습니다.

몸에 재발한 곰팡이는 과거 무덥고 습한 풍경의 기억을 불러왔습니다. 곰팡이와의 인연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학 졸업 직후 고향을 떠나, 세상 물정 모르고 처음 상경했을 때입니다. 보증금 200만 원으로 서울에 집을 구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구직 활동을 얼른 시작해야 해서, 부동산 투어를 다닌 지 단 하루 만에 한 다세대 주택의 반지하 원룸을 계약했습니다.

아이가 화나서 말한 "동굴로 돌아가!"의 '동굴'이 바로 그 집입니다. 대문이자 방문인 문을 닫으면 사방이 암흑인 창문 없는 방, 변기에 앉으면 마주 보는 벽에 무릎이 닿는 좁은 화장실, 기지개를 켜려면 집 밖으로 나와야 했던 낮은 천장. 상상을 초월하는 주거 환경이었지만, 보증금이 주변 시세의 1/5 가격이라는 치명적(?) 강점이 여러 불편을 상쇄시켰습니다. 장마가 오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장마비가 고여 넘실거리는 서울 광화문역 앞 보도. 사람들이 우산을 쓴 채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자료사진)ⓒ양지웅 기자

장마가 오니 그 집의 본색이 드러났습니다. 아마 이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방은 배수구보다 높이가 낮았는데, 장마비에 떠내려온 낙엽이나 비닐봉지 등으로 배수구 입구가 막히기라도 하면 우리집 대문(방문) 틈새로 빗물이 넘쳐 들어왔습니다. 머리맡은 물론 이불까지 축축하게 젖었습니다.

그러면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 '육아휴직 대체 계약직' 사회초년생은 한 벌 뿐인 출근용 양복을 먼저 대피시킨 뒤, 한밤중에 방 안의 물을 한참 훔쳐내야만 했습니다. 젖은 이불을 탈수시키기 위해 작동시킨 통돌이 세탁기의 '털털털털' 굉음은 공용 공간을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깊은 밤, 이웃들의 단잠을 깨우는 것은 아닐까 무척 신경이 쓰였습니다.

게다가 그 집에선 빨래조차 제대로 말리기가 어려웠습니다. 빨래 건조대의 양팔을 펼치기엔 방이 너무 비좁아 집 밖의 빨랫줄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장마통에 빨래가 제대로 마르지 않았습니다. 빨래를 널고 출근했는데 사무실 창밖에 장대비가 내리면 빨래 걱정을 해야했습니다. 이래저래 분주했던 그 여름은 모든 옷엔 지하실의 냄새를, 내 몸에는 곰팡이라는 성가신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해 겨울,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좋은 직장으로 옮기게 되면서 '지상으로 이사가기'라는 당시의 꿈은 자연스레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오늘. 퇴근하며 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빠?" 아이 목소리를 들으니 노동의 피로가 녹아버립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전화로 듣는 아이의 목소리입니다. 목소리는 어린아이인데 제 할 말은 다 하는 것이 너무 귀여워서 계속 말을 시키고 싶어집니다.

수현아, 좋은 소식이 있어.
뭔데?
아빠 오늘 곰팡이 치료받고 집에 갈게.
야호~!
그렇게 좋아?
응.

아이는 그동안 아빠를 안고 싶은데 자기 몸에 곰팡이가 옮을까 봐 안지 못해서 싫었다고 했습니다. '그래, 오늘 꼭 약 타서 간다!' 그런데 동네 정류장에 내리니 갑자기 요란한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하늘이 어둡더니, 우산도 없는데 불상사가 생겼습니다. 바로 집으로 갈까하고 망설였지만, 아이의 "야호" 환호성이 떠올라 손등으로 머리를 가리며 그대로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못지않게 아이와의 거리두기도 어서 끝내고 싶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빨리 나아야 한다며, 강한 약으로 처방해달라고 했더니, 치료용 샴푸까지 처방해주었습니다.

욕실에서 제모한 자리에 샴푸를 바른 후 아이를 불렀습니다.

오늘의 퀴즈 타임~! 정답 맞히실 분은 이곳으로 모여주세요~!
(달려오며) 무슨 퀴즈야?
틀린 그림 찾기! 아빠 뭐 달라진 거 없어? (양손 들고 만세 자세)
음... 모르겠는데?
아니, 잘 보면 알 수 있어! (어깨가 귀에 붙을 정도로 양손을 번쩍 든다)
달라진 거 없는데?

대놓고 힌트를 줬는데도 아이는 달라진 점을 통 찾지 못합니다. 그러더니 금방 흥미를 잃어버리고 다시 놀이하러 휭~하니 가버렸습니다. 이렇게 시시한 반응이라니! 아이를 놀리기 위해 뒤쫓아가서는 "정답은 겨드랑이였습니다~"라며 양팔을 벌리고 안으려고 시도하자, 아이는 "곰팡이!"라며 후다닥 달아납니다. 웃음이 나고 행복합니다. 3~4주쯤의 치료 기간이 지나면 구애가 성공할 것입니다. 곰팡이 흔적이 사라진 겨드랑이를 보여주고 아이에게 얼른 '완치' 판정을 받고 싶습니다. 비로소 감격의 포옹이 허락되겠지요.

드디어 아빠 품에 폭 안긴 수현이ⓒ사진 = 오창열

처음 피었던 곰팡이는 내가 처한 현실을 알려주는 좌표였지만, 지금의 곰팡이는 어설프지만 착실하게 살며 삶을 낙관했던 내 20대 시절의 생활기록부처럼 느껴집니다. '너는 미래가 불확실한데도 불편했던 현실을 잘 견뎌냈다', '어려울 때 여러 사람이 너에게 베푼 호의를 잊지 말라'고 적혀있는 것만 같습니다. 내가 느끼는 곰팡이의 의미를 아이에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아이 역시 자기 삶에서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게 되겠지요.

세월이 흘러 나는 가정을 이루었고, 생활은 자리를 잡았습니다. '동굴'에 살 땐 싫었던 장맛비 소리가 지금은 그저 운치있게만 들립니다. 지금쯤 그 집엔 어떤 이가 살고 있을까요. 그가 누구이든지 이 밤 거센 비에 아무 피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곰팡이도 조심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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