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내나는 삶] 내면화된 능력주의와 경쟁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상담사 노동조합이 직고용과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총파업 투쟁을 벌이고 있다.ⓒ건보공단고객센터지부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상담사들은 지난 10일까지 원주 본사 앞에서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42일간 파업을 진행했다. 이들의 파업 투쟁은 폭염과 코로나19 확산으로 어려운 환경에도 긴 시간 진행됐다. 노조 부지부장은 파업 기간 동안 18일의 단식농성을 진행했고, 조합원들은 강원도 원주에서 서울 청와대까지 행진을 했다. 지금 파업은 잠정 중단 상태지만, 노조원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31일 현재 세종시에서 청와대까지 가는 행진 6일차를 맞았다. 그들에게 이 모든 투쟁 과정이 고되겠지만, 가장 힘든 것은 아마도 정규직 직원들의 냉대를 이겨내는 일이 아닐까.

상담사들의 파업을 바라보는
정규직 직원들의 눈초리는
차가움을 넘어 경멸에 가까웠다.
노동자가 같이 잘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가?

정규직 직원들은 직접고용 요구가 공정을 무시한 처사라며 상담사들의 직접고용을 반대하고 있다. 이 이면에는 자신들은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정규직이 되었는데 ‘너희들이 감히 이 자릴 넘 봐?’라는 냉소가 깔려있다. 뿐만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은 당연하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나도 이 파업 현장을 몇 번 방문했는데 상담사들의 파업을 바라보는 정규직 직원들의 눈초리는 차가움을 넘어 경멸에 가까웠다. 노동자가 같이 잘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가?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공산주의는 경쟁이 없어서 생산의 효율성이 없고 자본주의는 경쟁으로 인해 생산의 효율성이 있다고 선전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경쟁은 좋은 것이고 자연스런 삶의 본질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성공을 위해 생존 경쟁을 치르며 경쟁을 내면화한다.

끊임없이 경쟁에 내몰리는 우리 사회ⓒ기타

많은 사람들이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성공 신화를 믿으며 자녀들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한글을 깨치도록 한다. 그 뿐인가? 숫자를 세는 것과 쓰는 것, 그리고 셈을 하는 것까지 배우도록 한다. 어른들은 아이의 학습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그 아이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 아이는 더욱더 신이 나서 배움에 전념한다.

어린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시험을 보고 그 결과로 우등상을 받아오면 아이의 부모는 상장을 액자에 넣어 방문 위에 걸어 놓는다. 아이도 상장을 보며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듯 우쭐거린다. 중학교에 진학한 아이는 기말시험 결과가 상위권 그룹에 속하면 자신이 원하는 선물을 사달라고 부모님과 협상도 한다.

아이들은 이처럼 영악해지는데 이는 조건적으로 사랑을 받는 것을 학습한 결과이다. 이로써 서서히 경쟁이 몸에 내재화된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대학 진학을 목표로 남들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학원 단과반에도 다니고, 부모를 졸라 여의도로 그리고 종로로 과외수업을 받으러 다닌다.

고득점을 받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고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패배에 따른 실패감과
그로 인한 삶의 고통에 대한
책임은 개인이 져야 한다.

1970년대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세대는 이 모습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세대의 생존 경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 경쟁이 몸에 밴 사람은 다른 경쟁자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강하게 만든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각자도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으려 한다. 그러나 고득점을 하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고 능력 없는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패배에 따른 실패감과 그로 인한 삶의 고통에 대한 책임은 개인이 져야 한다.

이런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성공한 이들은 ‘비례적 정의’를 공정이라 말하는데, 이는 ‘노력 대비 보상’이다.(김정희원, “‘공정’의 이데올로기, 문제화를 넘어 대안을 모색할 때”, 황해문화, 2020년 겨울, Vol. 109, 35-36.) 개인의 노력에 따라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생존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보다 더 노력한 것에 비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그들에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성공과 행복은 단순히 개인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지 않다. 불평등이 고착화되어 경쟁이 심화된 사회에서는 많은 이들이 열심히 노력함에도, 단지 평가 시험에서 실패하여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계속 좌절감을 안고 산다. 이런 차별적 대우와 계속되는 좌절은 개인의 자존감을 격하시켜 불행한 삶을 살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노동을 했는데, 그 대가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이것도 개인 탓인가?

생존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직급의 높고 낮음이라는 사회적 위계 서열에 따라 나누고, 서열 상 하위에 위치한 사람(패배자)에 대해 우월감을 갖는다.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정규직 노동자 입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기와 같은 노동 조건과 임금을 보장받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이들에게 타인과의 소통은 쉽게 자신보다 서열이 낮은 자들을 향한 지배와 통제로 향한다. 이들은 타인의 실패와 어려움에 공감하지 못하고, 리더십이란 타인의 의지를 꺾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불행하게도 이런 지도자들이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했다.

우리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사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서로 용서를 청하고 용서해주고
사랑을 주고받으며 애증을 교환하며
사는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본질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다.(강수돌, 강자동일시, 사무사책방, 2021, 39.) 호주에서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에게 시험을 통한 경쟁을 가르치지 않고. 함께 놀고 같이 공동 작업을 하며 협동하는 것을 가르친다고 한다. 학기를 마칠 무렵이면 교사는 학부모를 초대해 아이들이 작업한 작품들을 그들에게 보여준다. 이렇게 함께 놀고 협동하며 습득한 언어 구사 능력은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 아니라 소통하는 능력이 된다.

인간은 관계 안에서 살아야 하는 ‘관계적 존재’이다. 어떤 과업을 성취할 수 있는 나의 능력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받아주기에 내가 산다.ⓒpixabay

인간은 관계 안에서 살아야 하는 ‘관계적 존재’이다. 어떤 과업을 성취할 수 있는 나의 능력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내가 부족함에도 나를 받아주기에 내가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사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서로 용서를 청하고 용서해주고 사랑을 주고받으며 애증을 교환하며 사는 존재이다.

이 친밀한 관계를 위한 힘은 다름 아닌 공감, 개방성, 취약성, 무조건적인 사랑과 같은 감정의 나눔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삶의 방식을 고민한다면, 우리의 삶의 원리는 “경쟁보다는 연대, 성공보다는 상생이 우선시된다”(김정희원, 43.) 그러나 개별주의적 각자도생의 논리는 우리를 능력주의와 경쟁으로 고립적 삶을 추구하게 하여 인간의 삶의 환경을 황폐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기에 이런 삶은 서로를 고립시키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라도 옆 사람을 보고 연대하고 상생하려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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