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으로 이런저런 자문을 해주고 있는 지역의 플랜트건설노조에서 전화가 왔다. 소음성 난청 특수건강진단결과에 대한 해석을 묻는 내용이었다. C(요관찰자), D(유소견자), 1(직업성), 2(일반 질병)의 구분을 설명해주고는 사정을 들어보니, 일부 업체에서 소음성 난청으로 C1, D1 판정을 받은 조합원들을 채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채용 전 건강검진은 법적 근거가 없다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
노조에서는 채용 전 건강검진이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조합원들에게 근로계약서 작성 전엔 건강 검진을 거부하도록 하고 해당 업체에 문제를 제기했다. 해당 업체는 발주사의 지시였다고 했지만, 역시나 발주사는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발뺌했다.
‘채용 시 건강진단’ 제도는 질병이 있는 노동자의 고용 기회를 박탈한다는 이유로 지난 2006년 폐지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기업이 채용 과정에서 건강 검진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도 포털사이트에 ‘채용 시 건강진단’을 검색하면 ‘취업준비생들을 위한 건강 검진 안내’ 같은 블로그 포스팅은 물론, 같은 내용의 신문 기사까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원자의 나이도 얼굴도 모르게 블라인드 채용을 할 만큼 공정을 부르짖는 세상에서, 어떻게 입사가 정해지지도 않은 회사에 개인정보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의료 정보를 넘기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채용 시 건강 진단’이 여전히 규제 없이 기업 자율에 맡겨지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정부는 고용의 평등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제도를 폐지하고서도 이를 금지하거나 제한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일부 기업들은 버젓이 신체검사 또는 건강 검진을 채용 과정의 일부로 정해 놓고, 합격 기준도 마음대로 정해 운영하고 있다.
어떤 기업들은 ‘채용 시 건강진단’ 대신 산업안전보건법이 정하고 있는 ‘배치 전 건강 진단’을 채용 과정의 일부인 것처럼 활용하고 있다. ‘배치 전 건강진단’은 채용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작업 시 노출될 수 있는 유해 인자들과 관련된 특수 건강진단을 받도록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노동자들을 작업에 배치해 건강상의 위험이 없도록 하려는 취지의 제도다.
즉, ‘배치 전 건강진단’은 해당 노동자의 채용을 전제로 하는 것임에도 기업들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기도 전에 지원자에게 ‘배치 전 건강진단’을 받도록 한 후 이상이 발견되면 채용을 하지 않거나,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후에라도 진단 결과를 이유로 채용을 취소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실상 ‘채용 시 건강진단’을 지속하고 있다.
‘채용 시 건강진단’이 관행으로 가장 많이 남아있고 이로 인한 노동자들의 피해가 제일 심각한 곳은 건설 현장이다. 앞선 사례의 소음성 난청은 물론, 고혈압이나 당뇨 등의 기저질환을 이유로 채용을 거부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건강 진단에서 나오는 고혈압, 당뇨와 관련된 내용은 수치일 뿐, 정확한 진료를 통해 나온 구체적 내용도 아니다. 그러니 건설 회사들은 법적 근거도 없이 노동자들에게 건강 진단을 강요하고, 그 기준도 임의로 설정해 사실상 입맛에 맞는 노동자들만 채용하고 있는 것이다.
공정도 평등도 없는 이러한 관행은 결과적으로는 고령노동자에 대한 취업 제한이라는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그나마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건설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관행에 맞서 집단으로 저항할 수 있지만, 대다수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은 건강 문제로 채용을 거부하는 건설사들에 맞설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건강 문제로 인한 일할 권리의 박탈은 채용 과정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최근 부쩍 늘어난 상담 내용 중엔 건강상의 이유로 휴업이나 휴직한 후 복귀 과정에서 회사가 일반적인 진단서 이상으로 ‘정상적인 업무 수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거나 ‘재발하거나 악화할 위험이 없다’는 등의 상식을 벗어난 수준의 의사 소견서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직업환경의학전문의가 아닌 임상의가 업무수행능력을 평가할 수도 없거니와 재발하거나 악화할 위험이 없다는 소견을 써줄 의사는 찾기 어렵다.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비정상이다. 그나마 건강상의 문제가 산재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산재로 처리하고 법적으로 일정 기간 고용을 보장 받을 수 있지만, 개인적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것이라면 노동자 개인에게는 사실상 해고 통보와 마찬가지 상황이 되는 것이다. 특히 충분한 병가나 휴직 등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중소 영세사업장의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있어 더 심각한 문제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주가 노동자들의 건강을 적절히 관리하도록 하고 있고, 여기에는 감염병, 조현병, 마비성 치매, 심장·신장·폐 질환이 악화될 우려가 있는 경우 등에는 노동을 금지하는 조치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지, 반강제로 의료 정보를 취득하고 그것을 활용해 채용에서 배제하거나 해고하는 것을 용인해주는 게 아니다.
더구나 노동자 건강 진단의 목적은 개인적인 건강 관리를 넘어 작업 환경을 개선하고 위험을 낮추려는 데 있다. 작업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열악한 환경에서 견딜 수 있는 노동자만 가려서 채용하겠다는 것은 건강 진단의 취지에 완전히 역행하는 것이다. 건설 현장을 중심으로 만연해 있는 ‘채용 시 건강진단’을 엄격히 제한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때다. 15년 전 폐지된 제도가 좀비처럼 움직이고 있는 상황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
또 채용 과정에서의 문제 뿐 아니라 건강 문제로 인한 고용 상의 부당한 불이익이 없도록 보호하는 장치들 역시 마련되어야 한다. 적어도 건강 문제로 인한 휴직이나 복직, 통상 해고(일반해고) 등의 절차에 있어, 회사가 임의로 기준을 정하고 결정할 수 없도록 엄격히 제한하는 방법이 고민되어야 한다.
누구나 말하듯 건강이 제일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일터로 향하는 노동자들이 미련해 보일 수도 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차라리 일을 그만두시라’고 말하고 싶은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건강하지 못한 노동자에게는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 건강한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절박한 문제이다. 우리 사회가 아픈 사람들에게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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