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의 출발로 촉발된 바다의 패권 다툼 _ 영란 전쟁

[연재] 추석 연휴에 만나는 재미있는 경제역사 ⑤

*편집자 주 - 지난 설에 이어 추석 명절을 맞아 경제역사에서 벌어졌던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건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연휴 기간 동안 모두 다섯 건의 경제역사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① 수에즈 운하의 패권을 다투다 _ 수에즈 전쟁
② 구아노가 남미를 초토화하다 _ 새똥 쟁탈전
③ 사실은 세금을 내기 싫었던 거였다 _ 미국의 독립
④ 노예 해방은 전쟁의 원인이 아니었다 _ 미국 남북전쟁
⑤ 주식회사의 출발로 촉발된 바다의 패권 다툼 _ 영란 전쟁

유럽에는 바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두 나라가 있다. 하나는 유럽을 대표하는 섬나라로 한 때 세계를 제패했던 영국이다. 물론 지금도 유럽에는 몰타나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키프로스 등의 섬나라들이 있지만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으로 볼 때 영국은 이들과 비교 대상이 아니다.

바다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또 다른 나라는 네덜란드다. 네덜란드의 영문 표기는 Netherland이지만 네덜란드어로 표기하면 Nederland, 즉 ‘낮은(Neder) 땅(Lands)’이라는 뜻이 된다. 국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네덜란드는 말 그대로 바다보다도 낮은 땅이었다. 네덜란드 국토의 30%가 해수면보다 낮다.

바다를 넘어서야 했던 유럽의 두 나라

그런데 네덜란드인들이 바다를 댐으로 막은 뒤 바닷물을 퍼내고 지금의 육지로 개척했다. 지금 국토의 상당부분이 이렇게 만들어진 땅이다. 참고로 이 나라의 도시에 ‘담’이라는 글자가 많은 이유도 이것이다. 네덜란드 수도인 암스테르담(Amsterdam)이나 유럽 최대의 무역항 중 하나로 꼽히는 로테르담(Rotterdam)의 담(dam)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댐(dam)이다.

여담이지만 나이가 좀 있는 독자분들은 팔뚝으로 댐을 막아 네덜란드를 구한 용기 있는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이다. 오래 전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그 이야기다.

추운 겨울날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오던 소년은 댐에 구멍이 뚫려 물이 새는 것을 발견한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았으나 구멍이 점점 커지자 주먹으로, 나중에는 팔뚝으로 막았다. 소년은 생명을 잃었지만 그의 고귀한 희생 덕에 마을 전체가 수몰될 위기를 넘겼다는 게 이 이야기의 줄거리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실화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사실 네덜란드인들 중 상당수는 이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이 이야기가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미국 작가 메리 도지(Mary Dodge, 1831~1905)가 1865년에 발표한 어린이 소설 『한스 브링커:또는 은 스케이트(Hans Brinker:Or, The Silver Skates)』에 이 이야기가 실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가인 메리 도지는 네덜란드를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댐을 막은 소년의 이야기는 도지가 어디서 주워듣고 창작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심지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 한스 브링커(Hans Brinker)가 댐을 막은 영웅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한스는 소설 속에서도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소설 속 한스는 은 스케이트(Silver Skates)가 상품으로 걸린 스케이트 대회에 출전하고 싶었던 꿈 많은 소년이었을 뿐이다.

아무튼 ‘바다보다 낮은 나라’ 네덜란드는 이렇듯 바다와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다. 섬나라 영국과 함께 바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네덜란드는 바다의 주인 자리를 놓고 언젠가 영국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할 운명이었던 셈이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

네덜란드는 유럽의 그 어느 나라 못지않게 빠르게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드넓은 국토를 가지지 못한 네덜란드인들에게 바다는 부(富)를 축적할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이 일찍이 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역시장을 개척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17세기 초반까지 배를 만드는 조선업 분야에서 네덜란드는 유럽 최고의 기술을 자랑했다.

그런데 배를 타고 무역을 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후추와 향신료를 찾아 실로 먼 거리를 배로 이동했는데, 이러다보면 반드시 배가 통째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폭풍우를 만나거나, 해적을 만나거나 등의 이유로 말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생각한 방법이 주식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선주(船主) 한 사람이 배를 만들어 무역을 하면, 성공했을 때 돌아오는 몫은 크지만 실패했을 때 입는 타격도 상상을 초월한다. 이 위험을 줄이기 위해 사업을 주도하는 이가 사업을 함께 할 투자자, 즉 주주들을 모집한다. 이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회사가 바로 주식회사다.

주식회사는 누군가 혼자 사업 밑천을 다 내는 것이 아니라 주주들에게 골고루 돈을 투자받아 공동사업 형태로 무역을 진행한다. 이렇게 하면 배가 돌아오지 않아도 손실을 주주들과 나눌 수 있다. 물론 무역에 성공하면 그 과실 또한 주주들과 나눠 가져야 한다.

이런 형태로 설립된 최초의 회사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다. 물론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의 것이 아니라 영국의 것이다. 그리고 기록상으로도 영국 동인도회사(1600년 설립)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1602년 설립)보다 먼저 설립됐다.

하지만 영국 동인도회사는 설립 시기만 빨랐을 뿐 실제 활동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보다 늦었다. 그리고 영국 동인도회사의 설립 형태는 느슨한 상인들의 연합체였을 뿐 정식 주식회사가 아니었다.

반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설립 당시부터 주주들을 모아 거의 완벽한 주식회사 형태로 출범했다. 주주들의 권리를 확인하기 위해 실제 종이로 된 주식을 최초로 발행한 회사도 이곳이었다.

그렇다면 이 동인도회사의 하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당시 유럽인들은 후추 같은 향신료에 열광했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설립한 것이 동인도회사(영국과 네덜란드 외에 포르투갈과 프랑스도 동인도회사와 비슷한 이름의 회사를 설립했음)였다.

동인도회사는 자신들이 지배한 땅에서 치안권과 군사권을 빠르게 장악했다. 그리고 동인도회사의 대표는 그 지역의 식민지 총독을 겸했다. 어느 나라건 총을 든 자들이 그 세상을 지배하는 법이다. 동인도회사는 이름만 무역회사였을 뿐 사실상 식민지 지배 기구였던 셈이다.

참고로 못된 짓 빨리 배우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일본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회사를 설립한 적이 있다. 1908년 조선 땅에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가 그것이다. 일제는 이 회사 외에도 만주척식공사와 대만척식주식회사 등을 설립해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착취에 나선 바 있다.

중상주의와 크롬웰

해상 지배권을 놓고 벌어졌던 영국과 네덜란드의 전쟁을 살피기 전에 또 한 가지 먼저 살펴야 할 것이 있다. 이 사태의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역에 관한 경제학적 관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무역에 대한 경제학의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자유무역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보호무역 사상이다. 이 중 보호무역을 지지하는 경제학을 보통 중상주의(重商主義)라고 부른다. 그런데 중상주의는 무역을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으로 여긴다. 반면 자유무역주의자들은 무역을 포지티브섬(positive-sum game) 게임으로 본다.

제로섬 게임이란 게임 참가자들이 얻는 이익의 총합이 항상 제로인 상황을 뜻한다. 이 말은 누군가 10원의 이익을 얻으면 반드시 누군가는 10원의 손실을 입는다는 뜻이다.

바다에서 벌어진 영국-네덜란드 전쟁ⓒ기타


반면 포지티브섬 게임은 게임 참가자들이 모두 이익을 얻는 상황을 뜻한다. 누군가가 10원의 이익을 얻었다고 다른 누군가가 꼭 10원의 손실을 입을 필요가 없고, 그 다른 누군가도 이익을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무역을 제로섬 게임으로 본다면 우리와 무역을 하는 나라는 반드시 우리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이익을 얻으면 그들은 손해를 보고, 반대로 그들이 이익을 얻으면 내가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중상주의가 무역을 제로섬 게임으로 본 이유는 그들이 한 나라의 국부(國富)를 그 나라가 보유한 금과 은의 양에 비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즉 이들에게는 금과 은이 많은 나라가 강한 나라였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 이론에 따르면 국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여야 한다. 그래야 금과 은을 더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금과 은이 부족해진다면 이들은 상대를 약탈해서라도 금과 은을 더 많이 챙겨야 한다고 믿었다.

문제는 영란전쟁이 시작된 17세기, 영국의 통치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 강력한 중상주의의 지지자였다는 데 있었다. 크롬웰은 중상주의 지지자답게 내부적으로는 금욕주의를, 외부적으로는 군사주의를 바탕으로 국가를 통제했다.

중상주의 철학을 가진 국가에서 낭비와 사치는 허용되지 않는다. 낭비와 사치는 국가가 보유해야 할 금과 은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또 중상주의 국가에서 강력한 군사력은 필수적이다. 때에 따라서는 상대 국가를 무력으로 정벌해 금과 은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네 차례의 전쟁과 바다의 지배자

이런 철학을 가진 크롬웰이 당시 바다를 이용해 활발한 무역을 벌이던 네덜란드를 눈엣가시로 여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자타가 공인하는 중개무역의 최강자였다.

풍부한 지하자원도, 넓은 영토도 갖지 못했던 네덜란드는 일찍이 바다로 진출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발달한 선박 제조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이 나라 물건을 저 나라에 파는 중간 상인 역할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네덜란드의 항해술이 워낙 발달한 탓에 영국은 자신들의 식민지 국가와 무역을 할 때에도 네덜란드 상선을 이용해야 했다. 식민지 착취의 이익을 네덜란드와 공유한 것이다.

1651년 크롬웰이 마침내 칼을 빼 들었다. 영란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는 항해법(Navigation Acts), 혹은 항해조례를 발표한 것이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오직 잉글랜드, 혹은 잉글랜드의 식민지 배만이 영국 식민지로 상품을 옮길 수 있다.
② 그 배에는 잉글랜드인(식민지 주민 포함) 선원이 최소 절반 이상 포함되어야 한다.
③ 담배, 설탕, 직물은 오직 잉글랜드로만 팔 수 있다.
④ 식민지로 향하는 모든 상품은 잉글랜드를 거쳐야 하며 수입관세를 내야한다.

이 여러 조항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중개무역을 하는 네덜란드는 엿 먹으세요!”라는 것이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의 통치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북아메리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서 식민지를 구축했다. 특히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수입됐던 담배와, 아프리카 지역에서 수입됐던 설탕은 영국 무역의 핵심 상품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품들을 사고 팔 수 있는 권한을 오로지 잉글랜드 선박에게만 주고, 설탕과 담배는 아예 유럽 다른 나라로 팔지도 못하게 했으니 중개무역의 강자 네덜란드는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1652년 영국 함대가 항해법을 지키지 않던 네덜란드 상선을 공격하면서 제1차 영란전쟁(1652 ~ 1654)이 시작됐다. 이후 두 나라는 2차 전쟁(1665~1667), 3차 전쟁(1672 ~ 1674), 4차 전쟁(1780~1784) 등 17~18세기에만 모두 네 차례 전쟁을 벌였다.

3차 전쟁까지는 승패를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전쟁은 바다 곳곳에서 벌어진 해상전투였다. 어떤 전투에서는 영국이 우세했지만, 어떤 전투에서는 네덜란드가 우세했다. 그만큼 두 나라의 해상전력은 팽팽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세는 점차 영국으로 기울었다. 엄청난 식민지를 바탕으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거듭했던 영국은 세계 최강대국으로 발돋움 중이었다.

반면 네덜란드에게는 영국의 경제력을 감당할 식민지가 없었다. 게다가 이웃 프랑스와의 잦은 갈등으로 네덜란드의 국력은 점차 쇠퇴해갔다. 16~17세기 ‘바다의 왕좌’ 자리를 굳건히 지켰던 네덜란드는 18세기 들어 이웃 프랑스에게조차 해군 전력에서 밀리는 처지로 전락했다.

결국 이 전쟁은 4차 영란전쟁에서 승패가 갈렸다. 1784년 5월 네덜란드는 굴욕적인 항복을 선언했고 영국은 승리했다. 이후 패전국 네덜란드는 몰락했고 새로운 바다의 지배자 영국은 제국주의적 침탈을 바탕으로 대영제국의 기틀을 닦았다.

영란전쟁은 오로지 무역이라는 이슈만으로 벌어졌던 세계 최초의 전쟁으로 꼽힌다. 말하자면 이 전쟁이 무역전쟁의 시발점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전쟁에는 묘한 경제학적 아이러니가 하나 숨어있다. 전쟁이 발발한 이유는 크롬웰의 항해법 때문이었고, 항해법은 중상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 보호무역 정책이었다. 반면 중개무역의 강자 네덜란드는 당연히 자유무역의 지지자였다. 두 나라가 충돌한 근본적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게 승리를 거두고 바다의 지배자가 된 영국은 이후 열렬한 자유무역의 수호자가 됐다. 세계 최강대국에 오른 영국에게 더 이익이 됐기 때문이다. 즉 영국은 때에 따라 보호무역과 자유무역을 자국의 이익에 맞게 제멋대로 사용했다는 뜻이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경제학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사용된 셈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모든 나라가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몰두했기 때문에 영국의 이런 변신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자유무역의 수호자로 변신한 영국이 “자유무역은 우리만의 이익을 위한 것이에요”라고 솔직히 말하는 대신 “자유무역은 선진국인 영국과 후진국인 식민지 모두를 위한 것이에요”라고 뻥(!)을 치고 다녔다는 데 있었다. 영국과 영국에서 발전한 경제학의 위선은 자유무역이라는 이름 아래 선진국들의 식민지 착취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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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기자 응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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