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원준의 경제비평] 포스트 코로나의 대전환은 노정교섭의 제도화로부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길 바란다고 하지만, 막상 한가위 추석 당일에조차 대구시청 앞 천막농성장을 떠날 수 없던 사람들이 있다. 한국게이츠 사태의 해결과 정의로운 산업전환을 위한 협의체 구성을 요구하며 단식 중인 금속노조 대구지부 조합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노동자들은 향후 산업전환의 과정에서 다시 자본의 일방적인 이해관계 관철로 제2, 제3의 한국게이츠 사태가 반복되며 노동자들만 희생을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대구시가 지역노동정책을 협의하는 과정에 노조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역의 민주노조운동은 정의로운 산업전환을 위한 지방정부 노동정책에의 개입과 노정교섭 제도화라는 힘겨운 과제와 씨름하고 있다.

금속노조 한국게이츠지회 채붕석 지회장(오른쪽)과 간부들이 추석 당일인 21일 대구시청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채붕석 지회장의 단식농성은 25일 현재 11일째 계속되고 있다.ⓒ금속노조 한국게이츠지회

바로 지금, 지역 노정교섭을 이야기하는 이유

‘지역노동정책’이라는 개념이 유럽에서는 진보정당의 지방정부 집권을 계기로 이미 20세기 초에 자리 잡았다고 하지만, 지방자치의 역사가 짧은 우리에게 그것은 생소한 것일 수밖에 없다. 노동정책의 전체적인 틀은, 근로감독과 법적 처벌의 권한을 가진 중앙정부에 의해 어디까지나 국가적으로 결정되는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플랫폼 노동을 중심으로 고용형태가 다변화되면서 노동기본권의 사각지대가 빠른 속도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중앙정부의 규제와 행정력에만 의존하기에는 벅찰 수 있다. 현장에서 제기되는 노동 의제를 지역사회 내에서 공유하고 논의하는 과정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지역노동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현장 대응 측면에서나 당사자 의견 수렴 등 소통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중앙정부가 맡기 어려운 과제 영역들에 지역노동정책이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민주노총이 2018년 지방선거 이후 지역별 노정교섭을 추진해온 배경이다.

일부 지역에서 노동정책 기본계획 수립은 노정교섭의 개시 의제

실제로는 한국의 지역노동정책은 2012년 9월 서울시에서 전국 최초로 노동전담 부서를 신설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14년 서울시 노동자 권리보호 및 증진 조례가 제정되고 2015년 서울시 노동정책 기본계획이 수립되면서 지역노동정책의 전형이 창출된 셈이다. 그 1차 5개년 기본계획에서는 노동자 권익 보호와 모범적 사용자로서의 서울시 역할 정립을 2대 정책목표로 제시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세부 정책을 16개 정책분야에 대해 61개 단위과제로 구체화했다. 2020년 12월에 발표된 2차 5개년 기본계획은 건강하게 일할 권리와 사각지대 노동기본권 보장을 새로운 목표로 천명했다. 1차 기본계획의 성과 평가에 기초한 4대 추진전략과 29개 추진과제도 나란히 제시됐다. 이들 기본계획은 지방정부 노동정책의 중장기적 방향성과 밑그림을 확정하는 것이자 연차별 로드맵과 이를 실천에 옮길 조직 및 예산 계획을 포괄하는 것이므로 지역노동정책에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지역노동정책이라고 할 만한 것 자체가 별로 없었던 대구와 대전에서 최근 민주노조운동이 노동정책 기본계획의 수립을 일차적으로 의제화하려는 것도 그런 때문이다.

제도화된 노정교섭은 정의로운 산업 전환의 기반

노정 교섭을 위해서는 노동정책 기본계획 외에 지역 실정에 맞는 새로운 의제의 발굴이 핵심적이다. 지역 노조로서는 내년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교섭 상대방인 지방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이 요구된다. 관내 장기 분쟁사업장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기구 구성이나 플랫폼 노동 현황 실태조사는 물꼬를 트는 의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번거로워 보이는 노동행정 일도 현장에 밀착된 노조가 도와주면 해결 가능하다는 사실 역시 활용할 법하다. 특히 산업전환과 관련해 노조가 지역 산업의 실정에 기초한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해 지방정부를 설득시킬 수 있다면 좋을 일이다. 대책의 내용으로는 해외 사례를 참고해 관련 산업에 공적 소유구조를 도입함으로써 지역의 경제역량이 파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포함할 수 있다. 본격적인 협의 과정에서는 구조조정 기간의 직무교육과 고용유지지원,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구직급여 기간 경과 후 지방정부 차원의 생계비 지원 등 안전망 확충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의 강화도 의제로 올릴 수 있다.

중앙교섭과 지역교섭을 힘 있게 병행 추진해야 효과적이다

한편 지역별 노정교섭의 의제와 내용을 조율하고 전국 수준에서 핵심 의제에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중앙 노정교섭을 동시에 진행하는 편이 유리하다. 산업전환 과정에서 늘어날 지방정부의 재정 부담을 중앙정부가 책임지도록 요구하는 것도 중앙교섭의 역할이다. 지역마다 교섭 여건에 격차가 큰 점 때문에도 중앙교섭을 힘 있게 추진해야 한다. 적어도 대구나 경북처럼 여건이 매우 좋지 않은 지역에서는 중앙교섭의 진행 상황에 따라 지역교섭 추진에도 다소나마 숨통이 트일 여지가 생긴다. 아울러 지역노동정책의 유력 수단이 될 수 있는 노동경찰제 도입과 지방정부의 분쟁조정기능 분담을 중앙정부에 요구하려고 해도 중앙교섭은 필수적이다. 사후 감독과 중재의 권한이 없는 한, 지방정부 노동행정은 그 한계가 작지 않은 탓이다.

9일 대구평생학습진흥원에서 민주노총 대구본부와 대구시가 주최한 노동정책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민주노총 대구본부

민주노조운동이 참여하는 진정한 사회적 대화는
노정교섭으로부터 시작될 것

국회 입법조사처가 2018년에 공개한 한 연구에서는, 민주노총이 불참한 지역 노사민정협의회가 노동 현안에 대한 실질적인 협의체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 바 있다. 오늘 민주노조운동이 제안하는 노정교섭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나 지역 노사민정협의회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노동정책 협의체계이다. 김대중 정부 이래로 정부 주도의 사회적 대화는 거의 예외 없이 반노동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노조에게 강제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일부 노동운동 상층부 인사들의 출셋길이었을 뿐이다. 당장 정부부터 노사정 합의사항을 제대로 이행해오지 않았다. 수구세력 단체장이 집권한 일부 지자체나 말로만 노동존중을 이야기해온 문재인 정부라면 기존 노사정 대화 기구를 핑계로 이번에도 노정교섭 요구를 일축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이미 경기도를 비롯한 9개 광역지자체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지방정부와 민주노총 사이에 노정협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제 진짜 사회적 대화를 위해서는, 노동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한껏 기울어진 운동장부터 바로잡혀야 옳다. 정부와 지자체가 기존의 대화 틀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생색만 내는 보여주기 식은 안 된다. 노동 현안에 있어 실질적인 합의를 도출하려면 대화의 구조가 달라져야 한다. 구체적인 교섭 의제에 맞춰 중앙 노정교섭과 지역 노정교섭, 중앙 산별교섭과 지역 산별교섭을 신축적으로 그리고 중층적으로 진행하는 접근법이 필요하다. 관료와 사용자의 입맛에 맞춰 거수기 역할을 해온 민간 위원들은 제외해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의 대전환을 예비해야 하는 오늘, 한국경제로서는 진정한 사회적 대화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점이다. 민주노조운동이 참여하는 노정교섭이야말로 그 출발점일 수 있다. 추석마저 뒤로한 금속노조 조합원들의 단식투쟁을 필자가 지지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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