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민갑의 수요뮤직] 여름 음악의 효능

트로피컬 사이키델릭 그루브 밴드 CHS의 스페셜 음반 ‘엔젤빌라’

여름은 지나갔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기후위기 상황에서도 여름은 찾아왔고, 또 지나갔다. 누군가에는 답답한 칩거의 경험이 남고, 누군가에게는 조용히 다녀온 여행의 추억이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트로피컬 사이키델릭 그루브 밴드인 CHS의 음반 ‘엔젤빌라’에 담은 음악은 명확하다. 떠나지 않았다면 만들지 않았을 음악이다. 만들지 못했을 음악이다. 첫 곡 ‘Semeng’에서부터 마지막 곡 ‘밤바다’까지 여섯 곡의 음악을 듣는 동안 우리는 도시를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이 음악들은 태양과 바다가 만든 음악이기 때문이다.

밴드 CHS 스페셜 음반 ‘엔젤 빌라’ⓒ기타

신기한 일이다. 음반에 담은 여섯 곡의 연주곡들에서는 좀처럼 산과 들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강의 기운이나 도시의 활기도 다가오지 않는다. 눈부신 햇살과 바다의 물결만 성큼성큼 밀려온다. 음반의 커버에 붉은 노을을 그려놓았기 때문이 아니다. 곡 제목을 ‘Beachwalk’, ‘밤바다’라고 정해놓았기 때문도 아니다. 살랑거리는 기타의 멜로디와 가볍게 내달리는 비트, 부드럽게 녹아드는 연주의 톤이 모두 한 철과 장소만 가리킨다. CHS는 전작에서 그러했듯 세상의 수많은 음악들이 담지한 공간과 장소, 계절과 시간 중에 여름과 해변에 편파적이다.

여름을 이렇게 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일 때문에, 누군가는 가족 때문에, 누군가는 돈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 CHS는 떠나지 못한 사람을 위로하지 않고, 떠나자고 유혹하지 않는다. 음악을 듣는 30여분 동안 누구에게나 공평한 울림을 전파하는데 여념이 없다. 이 음반은 누군가의 여행기이고, 누군가의 여행기를 들으며 들춰보는 저마다의 사진첩이다. 떠나지 못한 이들에게도 떠난 이들과 다르지 않은 기분에 휩싸이게 해주는 대리 체험의 홀로그램이다. 노래가 없는 음반이지만, 왠지 노래가 들리는 것 같지 않은가.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너무 애쓰지 말라고,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노을빛 모히또 한 잔을 내 앞으로 밀어주는 것 같은 연주모음집.


많은 예술이 그러했듯 CHS 역시 자신들이 경험한 시공간과 그 순간 마음의 무늬를 기록하고 재현한다. ‘Semeng’은 영롱하고 신비로우며, ‘Beachwalk’는 경쾌하고 느긋하다. ‘Last Sunset’의 사이키델릭한 여운과 드라마틱한 ‘Slowride’의 구성 또한 근사하다. 인상적인 도입부를 제시하고 변화를 더해가면서 서사를 확장하는 흐름은 여름날의 무수한 추억들만큼 풍성하다. 음악을 주도하는 악기는 기타이지만, 키보드와 퍼커션을 비롯한 다른 악기들의 협연으로 음악은 각각의 곡들에 내재한 현실의 변화와 운동을 충분히 포괄한다. 그래서 연주의 주도권이 바뀌고 서사가 확장될 때마다 더 많은 경험을 상기시키거나 연상할 수 있다.

특히 편안하기만 한 연주에서 멈추지 않는 ‘Slowride’의 중반부 연주는 한밤의 환희로 비상하듯 펼쳐지면서 최현석의 이전 활동까지 불러들인다. 도마뱀처럼 평화로운 ‘Cicak’을 들으며 느긋해져도 좋지만, 어떤 곡도 처음의 예상을 깨트리지 않는 경우가 없다. 다만 마지막 곡 ‘밤바다’에서는 마음 편히 흐느적거려도 되는 것은 이제 돌아가야 할 때이기 때문일까. 언젠가 우리가 보냈던 여름 바닷가의 마술 같은 순간들을 부활시키는 주문 같은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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