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코로나19 시대 생존자들이 마주하게 된, 과거에서 온 현재 이야기 ‘태양’

두산 연강예술상 수상자 김 정 신작

녹스와 큐리오가 교류를 시작하며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두산아트센터

살면서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밖을 나가지 못할 거라는 예측을 해 본 적이 있을까? 살면서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공격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거라는 예상을 해 본 적은 또 있을까? 영화에서 본 미래 세상이 언젠가는 올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동안 현실이 될 거라고 확신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연극 ‘태양’은 전 세계에 바이러스가 퍼지고 나서 등장한 신인류와 구인류가 주인공인 SF 물이다. 장르가 SF이면서도 공상보다 현실에 더 가까운 것은 실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시대 생존자들인 우리가 이 연극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 연극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보여주는 과거의 창작물이 되었다.

연극 ‘태양’은 마에카와 토모히로의 대표작이다. 이미 2011년 일본에서 초연되었고 이후 소설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삼키고 있는 2021년 대한민국에서 초연됐다.

미래가 아닌 현재를 보여주는 과거의 창작물

무대는 이상하리만치 황량하다. 썰렁한 무대와 달리 무대 천장은 파괴된 인간 세상의 잔해로 가득하다. 무대가 뒤바뀌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세상이 완전히 돌아버린 걸까? 순간 이 기묘한 무대의 정적을 깨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유와 준코, 준코의 아들 데츠히코ⓒ두산아트센터

시대는 21세기 초. 전 세계에 바이러스가 퍼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모든 사회 기반이 파괴된다. 몇 년 후 바이러스 감염자 중 병이 나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변이된 상태였다. 그들은 자신을 가리켜, ‘호모 녹센시스(밤의 인간)’라 칭하고, ‘녹스’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이 변이 인간들은 두뇌 회전이 빠르고 진보적인 가치관을 선택하는 특성이 있다. 때문에 이들은 모든 사회경제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치명적인 결점도 있었는데 자외선에 약해 태양이 뜨는 시간에 절대 활동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녹스에게 밀려난 구인류(큐리오)는 시코쿠란 자치 구역을 할당받아 살게 된다. 소수는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작은 집락촌을 형성하고 살기도 한다.

어느 날 이 집락촌 중 하나인 나가노 8구에서 녹스 한 명이 살해된다. 이 사건으로 인근 녹스 자치구는 나가노 8구에 모든 경제적 지원을 끊어 버린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뒤, 녹스 자치구는 봉쇄 조치를 끝내고 다시 교류하겠다는 발표를 한다. 나가노 8구에는 마을을 떠나 학교도 가고 다른 세상을 보고 싶은 젊은 데츠히코와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지키고 있는 데츠히코의 엄마 준코, 녹스를 미워하며 마을을 일으켜 보려는 유와 마을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는 유의 아버지 소이치가 산다.

디스토피아 세상을 유토피아의 눈으로 그려내다

교류가 시작된 녹스 자치구와 나가노 8구 사이에는 초소가 설치되고 경비병이 세워진다. 나이가 어린 유와 데츠히코에게는 녹스가 될 수 있는 추첨 기회가 주어진다. 녹스가 되면 나이 들지 않고 바이러스로 죽을 위험도 사라진다. 편안하게 부를 누리며 밤의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큐리오로 사는 것을 선택한다면 경제적으로 열악한 삶을 살게 된다. 나이를 들어 죽거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수 있다. 하지만 태양을 피해 살아갈 필요가 없고 자연과 함께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다.

녹스가 된 친구 요지와 큐리오 소이치의 재회 장면ⓒ두산아트센터

우리에게 선택지가 단 두 가지라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이 작품은 복잡한 세상을 극도로 단순화시켜 펼쳐 놓고 우리의 선택을 지켜보는 듯하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미 이 이야기는 자신의 방향을 정해 놓고 있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서로 협력하며 산다면 더 완벽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살기를 선택할 수도, 또 누군가는 태양을 포기하더라도 더 진일보한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상상이었겠지만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어버린 이 이야기는 디스토피아 세상을 유토피아의 눈으로 그려내고 있다.

서사의 힘만큼이나 연출의 묘미도 관객들을 이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아주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녹스의 기계 같은 움직임과 아주 감성적인 큐리오의 과장된 대사와 움직임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인간의 감정에서 사회 시스템까지 깔끔하게 정돈된 녹스의 세상과 불규칙하고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큐리오의 세상 역시 마찬가지다. 이 선명한 대비는 시시때때로 웃음을 자아낸다. 무엇보다 어둡지만 불쾌하지 않고 무겁지만 짐스럽지 않은 깔끔한 마무리는 연극 ‘태양’의 돋보이는 선택이었다.


연극 ‘태양’

공연날짜:2021년 10월 5일(화)-10월 23일(토)
공연장소:두산아트센터 Space111
공연시간:화-금 19시 30분/토, 일 15시/월요일 공연 없음
러닝타임:120분
원작:마에카와 토모히로
번역:이홍이
연출:김정
창작진:무대디자인 남경식/조명디자인 신동선/의상디자인 김우성/분장 디자인 백지영/음악 채석진/사운드디자인 지미세르/움직임 이재영/무대감독 이뮥수/일러스트 김윤경
출연진:서창호, 임미정, 윤재웅, 김도완, 이애린, 이슬비, 권정훈, 김정화, 김하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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