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용환의 역사로 생각하기] 끝내 반성 안한 전두환과 역사 바로 세우기

전두환은 1989년 12월 31일 국회에 출석하여 12.12군사반란과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광주사태 당시 군 배치 작전 지휘 등에 대해 자신은 관여할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자신과 계엄사령부 상급사령부는 시민을 상대로 한 무력진압에 대해서도 신중론을 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2·12군사반란이 “권력 장악을 위한 쿠데타가 아니었다”며 5·17비상계엄확대 조치 역시 쿠데타와 무관한 행보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광주사태가 특별한 의도에 의해 촉발됐다는 주장은 전적인 오해”였다고 강변하였다. 살인마 전두환! 전두환의 증언에 대해 야당 의원들은 고함을 지르며 반발하였고 소란으로 인해 총 일곱 차례 정회되었다. 청문회는 전두환의 입장 표명만 들었을 뿐 추가 답변과 질의를 하지 못하였다. 또한 청문회의 결과를 정리한 보고서 채택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것이 공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진 전두환의 마지막이었다. 세간에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광주진상규명 청문회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초선의원 노무현은 극도로 분개하여 명패를 내던지기도 했지만 당시를 따져보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애초에 국회는 수사권이 없었고 증인들에 대한 구인제 또한 없었다. 전직 대통령 최규하와 전두환은 이 점을 철저히 이용하였다. 최규하는 1988년 11월 10일부터 1989년 12월 23일까지 다섯 차례 국회 출석 요구를 받았고 1989년 1월 26일과 2월 22일에는 동행명령장을 전달받았지만 끝내 출석하지 않았다. 국회가 최규하를 고소하자 검찰은 모두 무혐의 기소유예 처분하였다. 전두환은 일찌감치 백담사로 피신해 있었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12·12군사반란 및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압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두환, 노태우가 1996년 8월 26일 1심 선고공판에서 나란히 서 있다.ⓒ자료사진

결국 전두환이 국회에 출석하여 증언하면 진상특위를 해체, 모든 절차를 종결하는 것으로 여야는 합의를 하고 만다. 여야의 물밑 논의는 1989년 중반 내내 진행되었고 12월 16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총재가 참여한 청와대 연석 회담에서 5공 청산을 위한 11개항 합의에 도달한다. 이 자리에서 각 당의 대표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증언을 1회로 마무리하고 정호용 민정당 의원(5.18당시 특전사령관)과 이희성 대한주택공사이사장의 공직 사퇴(5.18당시 계엄사령관), 광주보상법의 조속한 입법 처리와 경찰 중립화법 등 민주화 후속 조치에 관한 입법 논의 그리고 5공특위와 광주특위 해체 등을 합의하였다. 합의 가운데 노태우는 다시 한 번 전임 대통령에 대한 예우와 사법 처리 반대를 분명히 하였고 정호용의 의원직 사퇴 역시 광주민주화운동 과잉 진압이 아닌 전두환 정권기 비리 문제의 매듭 차원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 야당 총재들이 이를 수용하였다.

노무현이 명패 던졌지만 청문회에서 책임 회피한 전두환
법원은 ‘군사반란’으로 명확히 규정
이제 본격적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 해야

피고인들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가기관인 국무회의장과 국회에 병력을 배치하고 국회의원의 등원을 저지함으로써 국가권력에 반항하였고, 또한 국가권력에 반항하는 피고인들의 행위에 저항하여 광주에서 시위가 발생하자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제압하는 방법으로 국가 권력에 반항하였다.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 제30형사부의 1심 판결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12.12군사반란은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이었기 때문에 ‘군사반란’이며 5.18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제압하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 또한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이라 규정하였다. 2심 판결문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이 광주시민들의 저항권 발동으로 인한 준헌법기관의 탄생 그리고 이에 대한 무력 진압이었기 때문에 두 차례 헌법 기관을 유린했다고 보다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전두환에 대한 단죄는 광주청문회 이 후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추진되었다. 노태우 비자금 문제를 발단으로 한 달간 쉴 새 없이 몰아붙여 전두환 구속에 다다른 것이다. 당시 밝혀진 불법적인 재산형성 추징 문제는 이후에도 지속되어 29만원이라는 별칭을 전두환에게 안겨주기도 했다.

그리고 2021년 11월 23일 평생지기 노태우가 세상을 등진 얼마 후 전두환이 세상을 떠났다. 이제 가해자는 현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함께 온갖 불법적인 복락을 누린 사람들과 그들의 왜곡된 역사 인식은 여전히 현존하고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2년 남짓하였을 뿐이다. 진정한 역사 바로 세우기는 과거에 대한 올바른 역사 인식을 집요하게 바로잡는 투쟁 그 자체에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를 시작해야만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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