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민갑의 수요뮤직] 고단한 당신 곁에 진수영의 피아노를

재즈 피아니스트 진수영 연주음반 [Paraphrase]

재즈 피아니스트 진수영의 음반 [Paraphraseⓒ기타
/정렬:가운데]

재즈 피아니스트 진수영의 음반 [Paraphrase]를 들으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한 진수영에 대해서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음악을 듣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피아노와 오르간만으로 연주한 8곡의 음악은 느리고 멜랑콜리하기 때문이다. ‘멈춰선 채’, ‘해가 사라지는 시간’, ‘어둠이 없이는 별을 볼 수 없다’, ‘Dreamcatcher’, ‘어깨에 앉은 석양을 잡고서’, ‘흩어진’, ‘코끝을 맞대어’, ‘어느새 눈 감고’로 이어지는 8곡의 연주곡들은 듣는 이를 쓸쓸하게 한다.

어떤 이들은 더 쓸쓸해하고, 어떤 이들은 덜 쓸쓸해할 것이다. 지금 행복하거나 평온한 사람은 음악이 담지한 소리의 서정적인 운동에 덜 빠져들고, 지금 불행하거나 우울한 사람은 더 깊이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 음악은 그렇게 듣는 이의 상태를 반사한다. 이 음악이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고, 취향에 잘 맞는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취향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입맛이 바뀌고, 미감이 바뀌듯 취향도 바뀐다. 취향은 변화무쌍하다. 취향은 체험과 훈련과 우연이 만나 빚어낸 결과일 뿐이다. 그러니 만약 이 음악에 충분히 젖어들지 않는다면, 자신이 이 음악의 매력을 충분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 낯선 음악에 불친절하거나 무딘 사람은 아닐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앨범 소개에 진수영이 적었을 단 한 줄의 문장, ‘모든 기억들과 함께 잠 못 이루는 밤’처럼 이 음악은 깊은 밤 추억과 그리움과 후회의 박물관으로 인도한다. 어떤 기억이 전시되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이미 알고 있고 수없이 곱씹었을 기억들과, 한동안 묻혀있던 기억들이 무작위로 섞인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모두 멈추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삶은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 같지만, 이렇게 돌아보지 않으면 채울 수 없기도 하다. 새롭고 트렌디한 것만이 삶의 전부가 아니다. 삶은 알 수 없는 우연과 운명과 필연이 뒤섞여 있고, 과거는 수시로 출몰해 미래가 된다.

음악이나 다른 예술은 그 순간을 견디기 위해, 잊지 않게 도우려 필요한 것일 수 있다. 어떤 작품은 앞으로 나아가자고 선언하지만, 어떤 작품은 뒤에 남은 이들을 토닥인다. 이 가운데 어떤 태도의 작품이 더 훌륭하거나 위대하다고 위계를 나눌 필요는 없다. 그것은 술과 차 중에서 무엇이 더 훌륭한지 묻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술과 차 가운데 무엇이 더 취향에 맞는지를 이야기하는 일도 무의미하다. 각각의 역할을 잘 해내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진수영의 음반 [Paraphrase]는 우울하지만 절망하지 않는 안정감으로 건반을 두드린다. 음악에 흐르는 태도는 관조가 아니다. 그보다는 관찰이며 응시이다. 그는 멈춰선 채 살피고, 해가 사라지는 시간을 견딘다. 먹먹한 슬픔이 지나가면 적어두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성찰한다. 어둠이 없이는 별을 볼 수 없다고. 삶은 복잡한 이야기로 채워지고, 모든 것은 이유가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어깨에 앉은 석양을 소중하게 대하고, 흩어진 것들마저 존중하는 것 아닐까. 쓸쓸하게 들리는 음악이지만, 요동치지 않는 곡은 늘 온기가 따뜻해 마음을 기대게 된다.

그리고 오르건을 사용한 ‘Dreamcatcher’는 몽롱한 사운드를 타고 꿈과 무의식으로까지 나아가면서 밤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곡들 사이에서 불을 밝힌다. 마지막 곡 ‘어느새 눈 감고’까지 듣게 되면 진수영이 이렇게 고민하고 존중하며 살아가는 누군가가 고단했을 하루를 마치고 편안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너무 느리게 변하는 세상에 지치고, 사람에게 다쳤을 때에도 음악은 우리 곁에 있다. 나도 음악처럼 당신 곁에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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