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은심 어머니의 민주화투쟁 35년… “아들 한열이와 함께였기에 두렵지 않았다”

2019년 6월 7일 서울 연세대학교 한열동산에서 열린 고 이한열 열사 32주기 추모식에서 이한열 열사 어머니인 배은심 여사가 발언을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이소선 어머니, 종철이 아버지, 제 얘기 들리셔요? 나 한열이 에미에요. 글쎄 나라에서 우리한테 훈장을 준다 하네요.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와 서 있어요. 30년 가까이 늘 함께 다니며 싸우던 우리 유가협 식구들인데, 이소선 어머니는 전태일이 옆에 가 계시고, 종철 아버지도 아들하고 같이 있어서 나 혼자 오늘 이렇게 훈장을 받습니다. 나 혼자 이래도 되는 건가 싶네요.”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2010년 6월 10일 열린 ‘제33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활동을 같이한 전태일 열사 어머니인 고 이소선 전 유가협 회장과 박종철 열사 아버지인 고 박정기 전 유가협 회장과 함께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뒤 30년 세월을 돌아보며 인사를 건넸다. 혼자 훈장을 받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던 배은심 여사는 이소선 어머니, 박정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평생을 그리워한 자식이자, 민주화 투쟁 여정에 함께한 동지였던 한열이 곁으로 9일 떠났다.

“27일 동안을 말 한마디 못 해 보고
한열이는 7월 5일 2시 5분에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아들의 죽음과 함께 어머니의 삶이 바뀌다

배 여사는 1940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스무 살에 고 이병섭 씨와 결혼해 5남매를 낳고 키우며 평범하게 살아온 어머니였다. 하지만, 1987년 6월 9일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그의 삶은 달라졌다. 연세대에 다니고 있던 아들 한열이가 학교 앞에서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의식을 잃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그리고, 아들 한열이는 27일을 중환자실에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다 세상을 떠났다. 배은심 여사는 당시 남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떨리는 걸음으로 중환자실 문으로 들어갔다. 우리 한열이가 왜 그래요? 정말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의식이 없고 코, 입, 산소 호흡기를 온몸에 착용해서 이름도 모르는 기계에 의해 호흡하고 있었으니… 27일 동안을 말 한마디 못 해 보고… 한열이는 7월 5일 2시 5분에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배은심(오른쪽) 여사가 아들인 고 이한열 열사와 함께 1986년 가을 전남 광주 지산동 집에서 노란 국화 화분을 앞에 놓고 찍은 사진ⓒ이한열기념사업회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이 열렸다. 연세대 교정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는 추도사를 통해 전태일 열사로부터 시작해 박종철, 이한열 열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열사의 이름을 외쳤다. 처절한 목소리로 열사들을 호명하고, 기억하며 거리의 많은 이들은 새로운 봄을 희망했다.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노제엔 학생과 시민 수십만 명이 운집해 이한열 열사의 마지막을 배웅했고, 유해는 광주 망월동에 안장됐다. 아들을 떠나보내며 이소선 어머니, 박정기 아버지 등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겪은 유가협 회원들을 만나게 됐고, 배 여사의 삶은 이전과 결코 같을 수 없었다. 배 여사는 지난 2005년 민중의소리와 인터뷰에서 달라진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 세상이 완전 바뀌어 버렸다. 우리 애들이 5남매인데, 이전에는 한열이를 비롯한 애들에게 밥하고 빨래하는 등 뒷바라지만 했었다. 그러나 건강했던 우리 아들 한열이가 독재에 의해 죽음을 당했으니 어찌 집에서 살림하면서 살겠나. 지 애비는 당시 직장을 다녀야 했지만, 이 에미는 미쳐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살았다. 지금도 광주 우리집은 ‘불이 켜지면 한열이 엄마가 있고, 꺼져있으면 집에 없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다 안다. 살림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그냥 집에만 있었다면, 그렇게 다니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거다.”

1987년 7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아들 이한열의 사망 소식을 들은 배은심 여사가 오열하고 있다.ⓒ동아일보 캡쳐

“우리는 종철이, 한열이,
자식들 떳떳하게 인정받는 세상 만들려고
여태 산 거야. 내 자식 명예가
되찾아지지 않으면
전두환이 노태우가 죽어도
독재는 끝나는 게 아니다”

배 여사는 아들을 떠나보낸 뒤 35년 가까이 유가협 회원들과 함께 전국을 누볐다. 특히 강경대 열사 죽음 이후 수많은 열사가 세상을 떠난 1991년 봄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아픈 시절이었다. 아들의 아픔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이해하고, 나의 아들의 죽음을 넘어 모두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억울한 죽음의 현장과 아픔의 현장을 찾아다녔다. 1991년 수많았던 장례현장은 물론 2009년 용산 참사의 아픔과 2014년 세월호 참사로 눈물짓던 이들의 아픔을 끌어안았다. 2019년 청년 노동자 김용균이 세상을 떠났을 때엔 어머니 김미숙 씨를 안으며 “어린 용균이가 이렇게 된 게 너무 가슴 아프다”면서 함께 눈물을 흘렸다. 배 여사는 지난 201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한 인터뷰를 통해 많은 이들을 떠나보냈던 시간을 이렇게 돌아봤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이 모든 죽음의 그 현장에는 내가 다 가 본 사람이고 …… 그래 인제 가서 보면은 인자 입관 직전에 화장해서 딱 옷 입혀서 인자 관 덮은, 덮을 직전의 얼굴만 내 놓고 보라는 그런 시간이 있어요. …… 아이고, 배가 얼마나 배고프냐, 가다가 빵 …… 사 먹고 그래라고 인자 돈 만 원을 거기다 넣고 …… 가다 뭐 사 먹어이, 배고픈께. 이 말 한마디 할 수 있는 게 어쩌면 내가 그것이 보람이었을 거예요, 거. 그래서 내가 죽고 사는 데 대한 그 넘나듦, 이런 것들에 대한 공포가 없어져 버렸는 거, 아니 숨 안 쉬면 죽는 거고 숨 쉬고 있으면 사는 거다. 그 공포가 없어져 버렸어. 그리고 무서운 게 없는 거죠.”

투쟁의 현장에서 누구보다 앞장섰던 배 여사가 경찰의 탄압과 폭력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유가협 회원들과 싸울 수 있었던 건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가협 어머니, 아버지들이 함께한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아들 한열이가 늘 함께 싸운다고 여겼기에 가능했다. 아들 한열이와 싸웠기에 그는 물러섬이 없었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1997년 그는 유가협 회장을 맡았다. 회장을 맡자마자 이듬해부터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싸움에 나섰다. 1998년 11월 4일 박종철 열사 아버지 등과 함께 국회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다. 이후 422일간 삭발과 단식 투쟁을 벌이며 싸웠고, 결국 배 여사를 비롯한 유가협 회원들의 투쟁으로 1999년 12월 28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세월호 유가족 40여 명이 2017년 5월17일 오후 5·18을 맞아 광주 민족민주열사묘역(북구 운정동)을 찾아 고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 여사가 30년 겪은 세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배은심 여사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김주형 기자

배 여사의 투쟁은 최근까지도 계속됐다.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위해 앞장서 싸운 것이다. ‘민주유공자법’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국가폭력 등으로 죽어간 열사들을 보훈 대상인 ‘민주유공자’로 지정하자는 내용의 법안인데, 20년 전인 제15대 국회 이후 10차례 넘게 발의됐지만, 계속 폐기됐다. 배 여사는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위해 세상을 떠나기 불과 2주 전인 지난해 12월 26일에도 국회 앞에서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를 이기며 피켓 시위에 나섰다. ‘민주유공자법’ 제정은 아들의 명예를 되찾는 길이고,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에 그는 혹한의 추위에도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들 한열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독재자 전두환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배 여사는 피켓 시위 한달 전 광주 집에서 들었다. ‘민주유공자법’은 아직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독재자 전두환의 죽음은 배 여사에게 아직 끝이 아니었다. 국회 앞 시위에 나섰던 지난달 26일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그는 “얼마 전 꿈에 한열이 묘지가 보이는데 눈이 한가득 덮여있고 고드름이 얼어있는 거야. 일어나자마자 망월동에 전화했더니 한열이 묘에 눈이 진짜 왔다고 하더라고. 걔가 그런 식으로 한을 얘기하는 것 아니겠냐”면서 “우리는 종철이, 한열이, 자식들 떳떳하게 인정받는 세상 만들려고 여태 산 거야. 내 자식 명예가 되찾아지지 않으면 전두환이 노태우가 죽어도 독재는 끝나는 게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타깝지. 참 안타까워.
그 사람들은 죄가 없는 사람이거든.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야.
양심수들이 하루빨리 나와야지.”

배 여사의 싸움은 늘 끝날 때까지, 끝나는 게 아니었고,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었다. 세상이 달라졌고, 시대가 변했다면서 많은 이들이 지난 시절 들었던 구호와 외침을 하나둘 내려놓을 때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기에 과거와의 어설픈 화해도 그는 거부했다. 배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취임 뒤 화해와 통합을 위한다면서 전두환, 노태우를 석방했을 때 유가협 회원들과 함께 안양교도소 앞으로 달려가 몸으로 싸웠다. 당시 심경을 배 여사는 2010년 민주화운동기념사회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2015년 6월 9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한열동산에서 열린 이한열 기념비 제막식에서 고인의 모친인 배은심 여사가 기념비 위에 헌화하고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한열 기념비 앞면에는 '198769757922'라는 숫자가 새겨졌다. 6월 항쟁이 일어난 1987년, 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6월9일, 병원에서 사망한 7월5일, 그의 국민장이 치러진 7월9일, 당시 그의 나이인 22세를 함축한 숫자다. 고 이한열 열사는 지난 1987년 6월 9일 전두환 군사정권 규탄 시위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쓰려져 유명을 달리했다.ⓒ김철수 기자

“대통령 당신이 화해 차원에서 그 사람들 석방을 한다는 거를 우리들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 그럴 때 마다 아니 마음 아픈 사람은 따로 있는데 권력자들 당신만, 당신들만 화해를 하면 화해가 되는 거냐. …… 그래 그래서 마음 아픈 사람들한테는 물어나 봤냐? 그러면. 으응? 그렇게 수월하게 화해를 할 수 있도록 그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을 석방을 할 수 있도록 해서 뭣을 얻어 냈냐?”

전직 대통령은 감옥에서 나왔지만, 그들이 가둔 양심수와 그들로부터 피해를 입은 이들의 아픔이 여전한 현실을 배 여사는 외면할 수 없었다. 배 여사는 그 때문에 지난 1993년부터 서울 탑골공원 앞에서 이어진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 촉구 목요집회’에 시간이 날 때마다 참석해 힘을 보탰다. 지난해 6월엔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감옥에 있던 이석기 전 의원 사면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청와대에 내기도 했다. 배 여사의 절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양심수 사면을 외면했고, 이 전 의원은 결국 대전교도소에서 8년 넘게 복역하다 지난달 24일 만기출소를 불과 1년 5개월 앞두고 가석방됐다. 반면, 국정농단 사건 등으로 징역 22년을 확정받고 수감생활을 해 온 전 대통령 박근혜는 대통령 신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이런 현실은 촛불로 열어낸 새로운 시대를 양심수 석방과 함께 맞이하길 바랐던 배 여사의 소망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배 여사는 2017년 민중의소리와 인터뷰에서 문 대통령에게 이런 당부를 남긴 바 있다.

“안타깝지. 참 안타까워. 그 사람들은 죄가 없는 사람이거든.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야. 박근혜 정권이 죄 없는 사람들에게 죄를 만들어 감옥에 가둬 놓은 거 아닌가. 그 사람들 좀 빨리 나오게 해야지. 문재인 대통령도 고려 많이 해봤을 거 아닌가. 양심수들이 하루빨리 나와야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들이 2018년 7월 19일 오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1180회차 민가협 목요집회 815 대사면 촉구 기자회견을 마친 뒤 청와대에 전달할 양심수 전원 석방을 촉구하는 서한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오른 쪽에서 두번째가 배은심 여사다.ⓒ임화영 기자

“나는 어디를 가면
나 혼자 간다고 안 해요.
나는 반드시 우리 한열이하고 둘이 간다.
그렇게 둘이 어디를 가든지
둘이 임하기 때문에
두렵고 무서운 것은 없다, 그래요.”

9일 세상을 떠난 배 여사의 빈소는 광주 조선대병원 장례식장 1분향소에 마련됐다. 3일 뒤인 오는 11일 오전 그는 35년 만에 아들 한열이가 묻혀있는 광주 망월동 묘역에 안장된다. 평생 아들을 가슴에 묻고 싸워온 길은 혼자가 아니었기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이제 이한열 열사와 그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가 싸우며 걸었던 그 길은 살아남은 우리가 두려움 없이 걸어갈 길이 되고 있다.

“나는 어디를 가면 나 혼자 간다고 안 해요. 나는 반드시 우리 한열이하고 둘이 간다. 그렇게 둘이 어디를 가든지 둘이 임하기 때문에 두렵고 무서운 것은 없다,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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