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발생한 하청노동자 김용균(당시 24세) 씨 사망사고와 관련해 원청인 한국서부발전 당시 대표가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다른 원·하청 관계자들도 대부분 집행유예 또는 벌금형을 선고받으면서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대전지법 서산지원 형사2단독 박상권 판사는 10일 업무상과실치사·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한국서부발전 김병숙 전 대표에 대해 "죄를 물을 수 없다"고 밝혔다. 앞서 검찰은 김 전 대표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지만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재판부는 김 전 대표에 대해 김용균 씨 사망 원인으로 꼽힌 컨베이어벨트 위험성이나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과의 위탁용역 계약상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한국서부발전 대표이사로서 업무상 주의의무를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고의로 방호조치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김 전 대표를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 15명(법인 2곳)의 경우에는 모두 유죄가 인정됐다. 다만 징역형·금고형 집행유예 또는 벌금형만 내려졌다.
재판부는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 백남호 전 대표에게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과 사회봉사 160시간을 선고했다. 또 한국서부발전 관계자 8명에게는 각각 벌금 700만원~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나머지 한국발전기술 관계자 4명에게는 벌금 700만원~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이 중 11명에게는 사회봉사 120~200시간도 함께 명령됐다.
양벌규정에 따라 함께 기소된 한국서부발전에는 벌금 1000만원, 한국발전기술에는 벌금 1500만원이 각각 선고됐다.
재판부는 김 전 대표를 제외한 다른 피고인들에 대해 "이 사고가 발생하기 불과 5개월 전에 다른 사업소에서 2회에 걸쳐 근로자가 협착되는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피고인들은 이 사고를 막지 못했다"며 "한국서부발전은 자신들의 근로자가 아닌 협력 업체 소속 근로자에 대한 충분한 안전보호조치를 갖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발전기술은 소속 근로자가 안전한 작업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는 충분한 조치를 하지 않았고 일차적인 보호 의무자로서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라며 "피고인들 개개인의 안전조치 의무 위반행위들이 모여 이 사건 사고를 유발했고 총합으로 위법성과 비난 가능성이 무겁다"라고 판시했다.
▲ 컨베이어벨트의 위험성을 고려한 방호조치를 갖추지 않고, ▲ 근로자가 2인 1조로 컨베이어벨트 점검 작업 등을 하게 하여야 함에도 피해자가 단독으로 위 점검작업을 수행하게 했으며, ▲ 근로자가 점검 작업 등을 할 때 컨베이어벨트의 운전을 정지시키지 않는 등 업무상 주의의무 혹은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조치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용균 씨의 어머니가 이사장인 김용균재단은 "너무나 참담한 결과"라며 분노했다.
김용균재단은 판결 직후 성명을 내고 "재판부는 특히 원청인 한국서부발전과 하청인 한국발전기술의 업무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김용균의 사망에 대한 원청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사실상 처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선고를 내렸다"며 "너무나 분명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여전히 재판부는 죽은 사람은 있는데 책임져야 할, 잘못한 사람은 없다고 판결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오늘의 이 선고는 우리 사회에 대해 그리고 김용균이 사망에 이르게 된 그 일터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동료, 노동자들에게 아직도 안전과 생명보다는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것을 법원이 인정하는 잔인한 선고"라고 규탄했다.
김용균재단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바뀔 수는 없겠지만 아무리 법을 만들고 노동자들이 아우성을 쳐도 재판부와 사업주들의 인식은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며 "최근 한익스프레스, 한국마사회 등의 재판에서도 중대재해가 발생해도 사업주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며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이는 아직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산업재해에 대한 재판부의 인식이 부족한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어 "김용균 재판의 피고인인 사업주들 역시 마찬가지"라며 김 전 대표와 한국서부발전은 탄원서를 통해 반성의 자세를 보이기보다 책임을 조금이라도 피해가려는 태도를 보였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단순사고와 같이 개인들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으로는, 구조적으로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몰랐다는 이유로 책임을 덮어주는 것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개탄했다.
또한 "개정 전의 산업안전보건법에도 이미 많은 내용이 담겨 있었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재판부의 법해석으로는 아무리 법을 개정하고 새로 만들어도 다 소용없는 일"이라며 "이런식으로 원청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됐다고 해도 전혀 적용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용균재단은 "일터의 죽음을 막는 일에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생명이 직결되는 문제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제대로 책임지도록 재판부가 엄정한 법적용을 하는 것은 핵심적인 고리일 것"이라며 "이를 위해 김용균재단은 앞으로도 2심, 결심까지 얼마가 걸리더라도 최선을 다해 대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 김용균 씨는 지난 2018년 12월 10일 충남 태안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 9·10호기 석탄운송설비(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사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위험의 외주화' 문제가 사회적으로 환기됐으며, 일명 '김용균법'이라고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안이 그해 말 국회에서 처리되는 등 법제도 개선이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로 유가족을 초청해 직접 위로하는 등 사회적인 관심이 높은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