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전남 여수국가산단 내 여천NCC 폭발사고 조사에 현장 노동자와 노조 등이 참여하는 민관합동조사단이 필요하다고 노동계는 촉구했다.
여수뿐 아니라 전국 국가산단에서 노후설비 등 문제로 산재사고가 계속되는 만큼 민관합동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안전대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현장을 가장 잘 아는 건 노동자”
민주노총은 24일 서울 서대문구 민주노총 건물에서 ‘여천NCC 폭발사고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중대재해 대책 수립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현장을 가장 잘 아는 건 노동자”라고 강조했다.
이들이 가장 우려한 지점은 이번 재해조사가 고용노동부와 기업 간 형식적인 서류점검으로 끝날 가능성이다. 괜한 기우가 아니다. 과거 노조가 참여하지 않은 재해조사에서 사고를 은폐하려는 시도들이 계속됐었다.
민주노총은 “여천NCC의 합작투자회사이자 공동대표이사 중 하나인 DL케미컬의 전신 대림산업은 2013년 폭발사고 당시 노동자들이 작업허가서 없이 임의로 작업해 사고가 났다고 주장했으나, 노조 현장조사로 작업허가서 발급 사실이 확인됐다”며 “지난해 12월 여수산단 내 이일 산업 폭발사고 당시 노조의 제기로 작업허가서 조작 사실이 밝혀졌다”고 지적했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노동자들이 현장 상황을 가장 잘 안다. 직접 사고 조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근본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 노동자를 배제하고 사건 조사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을 왜곡하고 감추기 위한 수단”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사고 관련 노동부 설명회에서 사 측이 ‘작업 매뉴얼대로 했는데 왜 사고가 났는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보였다고 이태의 노동안전보건위위원회 위원장은 전했다.
이 위원장은 “사고 현장에서 노동자가 직접 부딪치고 경험하는 사례들은 회사 매뉴얼이나 노동부 안전지침대로 확인할 수 없는 사안들이 즐비한다”며 “폭발한 압력기 제작년도가 1987년이다. 35년된 압력기가 고정시설로 전국에 2천여 개 산재돼있다. 작업지시서만으로 폭탄같은 시설물이 어떻게 위험 작동되고 사고 유발하는지 찾을 수 없다. 작업자들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안전관리자 한 명이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수도 없는 작업을 한다. 작업 매뉴얼대로 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도 말했다.
이에 원하청 노동자와 노조, 노조가 추천하는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민관합동조사단이 필요하다고 이들은 촉구했다.
민주노총은 재해조사를 통해 ▲위험반경 밖으로 이동 후 압력테스트 실시하지 않은 이유 ▲30년 가동된 노후 열교환기에 발생하는 위험 요인 등, 경영책임자 의무 위반 관련 ▲안전인력 확보 등 여천NCC 노조의 기존 요구에 대한 기업의 이행계획 및 실시 여부 등을 조사해야 한다고 짚었다.
노동부도 중대재해조사에서 현장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안경덕 노동부 장관은 안전보건 관련 노동자의 의견을 묵인·방치하는 경우에 대해 엄정 조사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 하청 노조가 배제된 상황이라고 이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사고 사상자 8명 중 7명이 하청 노동자다.
노동부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2명 이상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의 전 사업장을 대상으로 특별감독을 실시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노동부 감독에는 노동자 대표·명예산업안전감독관의 참여, 감독결과 서명 등이 규정돼있고, 노동자 대표는 원하청 노조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데 하청 노조인 플랜트 노조 여수지부는 참여를 보장받지 못했다는 게 노조 측 설명이다.
“35년된 압력기 전국에 산재돼있다”
전국 국가산단에서 산재사고가 반복되고 있다. 지난 17일 더불어민주당 김회재 의원실이 제출받은 ‘국가산단 사고통계’에 따르면 최근 6년간(2017~2022) 20년 이상된 노후 산단에서 226명 사상자 발생했고, 그 중 사망자는 99명에 달했다. 특히 40년 이상 산업단지 사망자는 66명으로 전체 65%에 이르렀다.
이태의 위원장은 “이번에 폭발한 35년된 압력기가 고정시설로 전국 2천여 개 산재돼있다”며 “화학공장들이 밀집된 국가산단에 가보면 이번 압력기보다 강력한 고압 탱크들이 즐비하다. 화학 제품과 원료들이 라인을 통해 도로를 횡단한다. 다른 시설까지 폭발하면 노동자 넘어 지역 전체 재난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환섭 화학섬유식품노조 위원장은 “노후설비 관련 안전관리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한 지 20년이 지났다”며 “우리 사업장은 상시 폭발 가스 노출 사고 일어난다. 단지 인명피해가 있냐없냐에 따라 이슈가 될 뿐이다. 전쟁같은 현장에 이미 30년 이상된 노후설비들이 많다. 폭발하고 가스가 누출될 때 상상을 초월한다”고 경고했다.
민주노총은 “여수 등 국가산단에 대한 실태조사와 개선대책이 최근 10년간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며 국가산단 민관합동 조사위를 꾸려 ▲노후화학설비 실태, 사고 현황, 유지·보수 실태조사 및 대책 ▲도급계약, 원하청 노동자의 노동조건 실태조사 및 대책 ▲안전보건관리체계 실태 및 대책 등을 조사해야 한다고 짚었다.
노동계의 민관합동조사가 무리한 요구는 아니다. 노동부는 2017년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망사고 이후 연속 발생하는 조선업 하청재해와 관련 노사와 노사가 추천하는 민간전문가가 참여하는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화학사고에서도 한화토탈 폭발사고 이후 노동부·환경부·노조·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민관합동조사단이 운영됐었다. 그 외 구의역 김군 사망사고 조사위원회, 김용균 사망사고 이후 5개 발전사 대상 특별조사위원회 등 선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