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하청 노동자들 ‘집단 작업중지권’ 첫 발동

한국전력(한전) 하청 노동자들이 전봇대에 오르는 승주 작업에 대해 작업중지권을 발동했다. 전기 작업에서 집단적인 작업중지권 행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에 따르면 산재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노동자가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한전이 현장에서 적용될 수 없는 안전기준을 강행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산재 발생 시 ‘한전은 안전기준을 마련했는데, 협력업체와 노동자가 지키지 않았다’며 결국 책임을 떠넘기려는 속셈 아니냐는 취지다.

지난해 건설노조 주최로 열린 '산재사망 건설노동자 458인 합동위령제' 자료사진 2021.9.29. ⓒ뉴스1


민주노총 건설노조 전기분과위원회는 16일 0시부터 승주 작업에 대해 산안법 제52조 작업중지권을 발동하겠다고 밝혔다. 전기가 통하는 활선은 물론 전기가 통하지 않는 사선 승주 작업 역시 거부하고 있다.

한전은 지난 1월 승주 작업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지난해 11월 발생한 한전 하청업체 소속 고 김다운 씨 사망사고 대책의 일환이었다. 당시 김 씨의 사고 원인은 추락사가 아닌 감전사인데, 승주 작업 전면 중단은 엉뚱한 해결책이라는 지적이 제기됐었다.

이후 활선차가 진입하지 못하는 곳에서 작업이 이뤄질 경우, 협력업체가 사전에 한전으로 공문을 보내 현장에 파견된 한전 감독자의 안전 지도 아래 승주 작업을 하도록 했다. 한전이 제시한 안전 작업방식은 허리와 전봇대에 줄을 감는 방식의 슬링을 이용하고, 에어매트나 그물망을 설치해 2차 사고를 방지하는 것이다.

현장 노동자들은 이 같은 방식이 현장에서 적용되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석원희 전기분과위원장은 “전주가 암벽처럼 고정돼있지 않다. 부러질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는데, 슬링을 이용하면 전주랑 같이 넘어지라는 말밖에 안 된다”고 지적했다. 엄인수 강원지부장은 “좁은 골목길에 에어매트나 그물망을 설치하기 쉽지 않고, 설치한다고 해도 필요하지 않다. 15m 전주에서 추락했을 때 반경이 2~3m밖에 안 되는 에어매트, 그물망 위로 떨어질 확률은 거의 없다. 중간에 전선들도 있고 전주에 부착된 전압기도 있지 않나”라고 설명했다.

석 위원장은 “(한전의 안전 지침 때문에 협력업체는) 필요 없는 장비를 강제로 구매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창고에 방치된 장비들이 많다”고 꼬집었다.

이처럼 현장과 괴리된 안전지침 때문에 대부분 작업이 중단됐다고 석 위원장은 말했다. 그는 “(지난 1월 한전의 승주 작업 전면 금지 이후) 3개월째 일을 못하고 있다”며 “일하는 사람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공기업의 파업”이라고 비판했다. 엄 지부장은 “강원 지역은 작업이 거의 중단됐다. 민원 등으로 반드시 공사를 진행해야 하는 극소수 현장이 2~3%도 안 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승주 작업 중단이 장기화될 경우 실직이나 임금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됐다.

고 김다운 전기 노동자 산재사망 추모 기자회견 ⓒ민중의소리

산재사고가 발생했을 때 한전이 책임을 면할 수단으로서 탁상공론식 안전지침을 만든 게 아니냐는 의심이 짙은 상태다. 노조가 작업중지권을 행사한 결정적인 이유다.

엄 지부장은 “한전의 모든 정책이 일방적·강압적으로 내려온다. 현장에 적용되지 않는 안전기준을 마련하면 또 다른 편법이 만들어진다. 그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결국 노동자 책임으로 돌아온다. ‘한전에서 철저하게 안전기준 만들었는데, 협력업체나 노동자들이 안 지켰다’며 책임을 떠넘기고 한전만 빠져나가버린다”고 말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대비 안전관리 대책으로 한전은 작업중지권 전면보장을 확대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건설노조 전기분과위는 전날 한전에 공문을 통해 작업거부권 행사를 고지하며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승주 방식을 강제하는 것에 대해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현장 노동자들이 제안하는 안전한 승주 작업방식은 보조 로프를 추가하는 것이다. 석 위원장은 “지금은 하나의 로프만 차고 올라가는데, 보조 로프를 추가하면 다른 로프가 풀리더라도 괜찮다. 전주가 넘어져도 풀기 쉽다. 수십년간 경험에서 나온 방법이라 현장 적용성이 용이하다”고 말했다.

노조는 한전이 합리적이고 안전이 보장되는 승주 방식을 협의할 때까지 모든 승주 작업을 거부할 방침이다. 석 위원장은 “죽고 싶은 노동자는 없다. 한전이 안전을 확보하지 않은 방식을 강제로 운영하고 있어 전면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안전은 현장 노동자들에게 답이 있다. 현장을 반영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엄 지부장은 “안전사고 예방은 충분한 인원과 시간이다. 그런데 한전은 기능 인력 양성, 노후 설비 보강 등 근본적이고 장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당장 문제가 된 부분만 벗어나려고 한다”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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