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5일 일터에서 반복되는 죽음을 막기 위해 위험한 작업을 거부할 수 있는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은 "근로자가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작업중지권 행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증언도 나왔다.
민주노총은 이날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앞에서 '4월 노동자 건강권 쟁취 투쟁의 달 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세계 산재 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28일)이 있는 매년 4월을 '노동자 건강권 쟁취 투쟁의 달'로 정하고 관련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위험에 처한 노동자가 즉각적으로 생산 설비를 중단하고 작업을 멈출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더 큰 사고를, 더 큰 희생을 막을 수 있다"며 "노동자에 부여된 작업중지권은 노동자 스스로 목숨을 지키는 무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금속노조 김동성 부위원장은 중대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조선소와 제철소의 실태를 전했다. 조선소와 제철소에서는 지난 1월 2건의 중대재해가 발생한 데 이어 지난달에도 2건의 중대재해가 연달아 발생했다. 지난 주말에도 한 명의 노동자가 중대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김 부위원장은 "과거에 발생했던 중대재해와 똑같은 유형의 중대재해가 이렇게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이유는 노동자가 일하는 작업환경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기 때문"이라며 "사용자는 여전히 산안법을 지키지 않고, 도처에 위험 요소가 도사리는 현장에서 작업중지권은 노동자 스스로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부위원장은 "전면 개정된 산안법에서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이 강화됐다고 하지만,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은 현실적으로 여전히 높은 벽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산안법은 지난 2019년 전면 개정되면서 노동자의 작업중지 권리를 이전보다 명확하게 보장했다. 하지만 작업중지 요건인 '급박한 위험' 등의 표현이 지나치게 모호하고, 사업주가 노동자의 작업중지를 이유로 불이익 가할 경우 처벌한다는 내용이 담기지 못하면서 큰 한계를 남겼다.
김 부위원장은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회사의 잘못을 고용노동부에 진정했다는 이유만으로 탄압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작업중지권 행사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며 "시급하게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노동자가 위험을 감지했을 경우 누구나 즉각적으로 작업중지권을 발동할 수 있도록 기준과 절차 마련 ▲사용자가 작업중지권을 행사한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가할 경우 사용자에 대한 처벌 규정 마련 ▲작업중지로 인한 손실보전의 책임은 원청에 있음을 명문화하는 방향으로 법안이 개정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노동자 안전 위협하는 위험한 현장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각 산별노조 대표자들이 참석해 노동 현장의 실태를 알리고,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한 대책을 요구했다.
전체 산재 사망자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위험한 환경에 상시적으로 노출된 건설노동자들은 '건설안전특별법 제정'과 '산업단지 노후설비 안전관리 특별법 제정'을 요구했다.
건설산업연맹 강한수 노동안전보건위원장은 콘크리트에 깔리고, 높은 곳에서 작업하다 떨어져 죽은 동료 노동자를 언급하며 "제대로 된 비용을 가지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게, 무리하게 공사를 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공사기간을 보장하라고 건설안전특별법 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 위원장은 또한 "국가산업단지를 비롯한 전국의 수많은 산업단지에서 떨어져서, 질식해서 많은 노동자가 죽어가고 있다"며 "현장에서 폭발 사고 한 번 나면 바로 몸의 형체도 제대로 남지 않고 죽어간다. 그런 사고를 막으려면 '산업단지 노후설비 안전관리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계적으로 지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노후산단에서 중대재해가 집중되고 있기 때문에, 노후 설비에 대한 정부의 관리·감독권을 강화하는 내용의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요구다.
화학섬유식품산업 노동자들도 이 특별법의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화섬식품노조 신환섭 위원장은 "20년 이상 된 국가산단 내에서 226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40년 이상의 노후 산단에서 65명이 나왔다는 것은 결국 노후 설비가 얼마나 우리에게 위험한지를 반증해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철도노조에 속한 이정민 기관사는 화장실조차 마음 편히 갈 수 없는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을 고발하며 관련 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이 기관사는 "최근 우리 기관사들은 '화장실에 갈 권리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며 "용변을 참다못해 정차 시간 20초, 30초 사이에 운전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용변을 해소하는 상황이다. 승객이 볼지 안 볼지 저희가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뒤에 2분 간격으로 열차가 뒤쫓아오고 있고 관저에서는 빨리 가라고 독촉을 하기 때문"이라며 "어떻게든 생리 현상이 해결돼도 이런 자괴감은 몰려온다"고 토로했다.
이 기관사는 "2007년에는 운전실에서 용변을 보다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까지 발생했다"며 "철도 지하철 종사자의 피로 위험 관리 의무를 도입해 근무시간을 축소하고 충분한 휴양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윤석열 당선인, 중대재해 근본대책 내놔야"
보건의료노조 박수봉 수석부위원장은 코로나19 확진자 폭증에 따라 과부화된 의료 현장의 현실을 전했다. 특히 3단계 코로나 확산 상황에서 코로나19에 확진된 의료 인력 중 무증상 또는 경증인 경우 고작 3일만 격리한 뒤 현장에 복귀하도록 한 정부 지침의 개정을 요구했다.
박 위원장은 "정부는 방역 완화 조치만 내놓고 정작 의료 인력에 대한 보호 조치와 충원 조치는 내놓지 않고 있다"며 "의료 인력 마비 상태를 방지하기 위한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 확진된 의료 인력도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게 지침을 전면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배달노동자들은 현행 법의 한계로 산업재해를 인정받지 못한 노동자의 처지와 이를 악용해 최소한의 안전도 책임지지 않는 배달 플랫폼 기업에 대한 규제 필요성을 주장했다. 현행 산재보험은 월 소득 115만 원, 월 종사시간 93시간 이상이라는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산재보험 적용이 어려운데, 투잡이나 짧은 시간 근무하는 배달노동자 특성과 맞지 않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서비스일반노조 배달플랫폼지부 홍현덕 사무국장은 "플랫폼사는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그리고 필요한 돈을 위해 배달을 할 수 있다고 홍보하지만 그 속에 플랫폼 기업의 책임은 없다. 사람은 모집하지만 안전은 책임지지 않고 있다"며 "산재보험의 전속성 기준을 폐지하고 단 한 건이라도 보수를 받고 일했다면 산재보험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배달노동자를 자영업자로 분류하는 현행 법을 이용해 최소한의 안전도 책임지지 않는 배달 플랫폼사를 규제하는 정책을 마련해 달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민주노총은 내달 임기를 시작하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산재 사고를 방지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들은 "새 정부는 중대재해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도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은커녕 규제 완화를 부르짖고 대형 로펌을 등에 업고 처벌을 회피하기 위한 꼼수 대책에만 골몰하는 기업을 향해 중대재해는 기업의 조직적 범죄고 책임자를 제대로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며 "중대재해 근본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전 사회적인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민주노총은 4월 한 달간 노동자 건강권 쟁취를 위한 조직적 투쟁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각 지역과 사업장에서는 관련 교육과 기자회견, 토론회가 이어지며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인 28일에는 노동자 건강권 쟁취 투쟁의 달 집중 집회를 연다.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은 1993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캐릭터 '심슨 가족' 인형을 생산하는 태국 공장에서 일어난 화재로 사망한 노동자를 추모하는 촛불에서 시작됐다. 당시 회사는 노동자가 인형을 훔쳐 갈지도 모른다며 밖에서 공장문을 잠가 노동자들이 화재 현장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 사고로 전 세계 노조는 선진국 아이를 위한 장난감을 만드는 과정에서 개발도상국 노동자의 죽음이 묻어있다는 것을 깨닫고, 추모의 날을 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