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CJ대한통운 택배노동자가 과로로 쓰려져 이틀만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구조의 문제라는 비판이 나온다.
21일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에 따르면 CJ대한통운 부평지사 산삼중앙대리점 소속 택배노동자 전모(48)씨는 지난 14일 새벽 5시30분경 자택에서 출근을 준비하던 도중 갑자기 쓰려졌다.
전씨는 가족에게 발견되어 119를 통해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이틀만인 16일 새벽 5시10분경 끝내 사망했다. 병원에 후송됐을 당시 전씨는 뇌출혈이 심한 상태여서 수술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대책위는 전씨가 비교적 젊은 나이로 평소 지병도 없었는데 갑자기 뇌출혈로 사망한 것은 과로로 인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전씨는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6시경에 집을 나섰고, 화요일 기준으로 보통 오전 7시반에 일을 시작해 밤 9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가장 많이 일할 때는 하루에만 13시간 넘게 일을 한 것이다. 다른 날에도 기본 10시간 이상의 노동이 이어졌다.
전씨는 주로 엘리베이터가 없는 6층 아파트와 일반번지 배송을 맡아왔으며, 배송물량은 하루에 약 300여 개에 달한 것으로 파악됐다. 배송 물량이 많아 당일 배송하지 못한 물건은 다음 날 출근하면서 배송해야 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택배노동자 과로사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던 분류 작업도 전씨는 계속 해온 것으로 파악됐다.
분류 작업은 애초 택배노동자의 업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업무까지 택배노동자가 ‘공짜 노동’으로 맡아오면서 과로로 내몰렸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에 택배노동자 과로사를 막기 위해 ‘택배 기사 5명당 분류인력 1명을 배치한다’는 등의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 올해 1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됐지만, 실제 현장에선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씨와 같은 터미널에서 일한 택배노조 조합원 증언에 따르면, 오전 8시쯤 분류 인력이 투입되기 시작하는데, 그 시각 전까지는 택배노동자들이 직접 돌아가면서 분류 작업을 했다. CJ대한통운이 분류 인력을 실제 분류 작업 시작 시각인 오전 7시부터 고용하지 않은 탓이다. 그야말로 ‘반쪽 분류 인력 투입’이었다.
이에 대리점은 택배노동자 두 명을 하나의 ‘분류작업조’로 묶어 그 빈틈을 메웠다. 전씨도 분류 작업에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전씨가 ‘분류작업조’가 되는 날엔 평소보다 더 일찍 출근해야 했기에 그만큼 더 힘들어 한 것으로 전해졌다.
뿐만 아니라 분류 인력은 분류 작업이 끝나기 전에도 계약된 근무시간이 끝나면 곧바로 퇴근했기 때문에, 남은 분류 작업 역시 결국 택배노동자들의 몫이었다. 그렇게 택배노동자들은 매달 분류 작업 비용으로 6~7만원을 받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진경호 전국택배노동조합 위원장은 이날 서울 중구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과로사가 발생하는 택배 터미널에서는 매우 유사한 점이 발생한다. 분류 인력이 아예 투입되지 않거나 분류 인력이 투입되더라도 꼼수와 편법으로 투입되는 곳에서 여전히 과로사가 발생하고 있다”며 “고인이 근무한 터미널에서도 7시부터 레일이 돌아가기 시작하는데 분류 인력은 8시에 투입됐다. 결국 택배노동자들이 그 업무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진 위원장은 “사회적 합의에 따라 분류 인력이 제때 투입됐다면, 택배기사들은 출근시간을 2~3시간 늦출 수 있고 분류 작업된 물건을 택배차에 상차하고 배송지로 떠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분류 인력이 늦게 투입되는 바람에 택배기사들이 더 일찍 출근해야 했다”며 “택배노동자의 장시간 노동을 해소하자는 사회적 합의의 취지는 완전히 효과를 나타낼 수 없는 구조”라고 비판했다.
그렇게 전씨는 과로사 방지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진 지 1년이 지났음에도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 12~13시간의 장시간 노동에 계속 시달려야 했다고 대책위는 주장했다.
하지만 CJ대한통운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대책위는 지적했다. 유가족이 산재신청을 하기 위해 고인의 근무기록이 남겨진 ‘배송 앱’에 접속해 객관적인 업무 실태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CJ대한통운이 사망 3일 만에 전씨의 사번을 삭제하면서 이를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진 위원장은 “택배노동자의 주 60시간 노동을 하다가 사망하면 ‘과로사’로 판정된다. 그게 합의 내용”이라며 “그러다보니 (택배사가) 교묘하게 근무시간표를 왜곡해서 작성하거나 거짓으로 작성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고인의 차량에서 발견한 업무일지에는 실제 출퇴근 시간과 다르게 기록돼있는 정황이 담겨 있었다고 주장했다. 유가족과 대책위가 파악한 것과 달리, 출근은 더 늦게, 퇴근은 더 빨리 한 것으로 업무일지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업무일지 마지막에는 이를 확인하는 대리점 소장 서명도 들어갔다.
이에 진 위원장은 “택배노동자가 기계도 아니고 어떻게 업무가 끝나는 시간이 매일 똑같을 수 있느냐”고 “다 조작된 서류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 서류를 가지고 원청 택배사나 대리점은 (고인의 노동시간이) 주 60시간 넘지 않았다고, 그러니 과로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진 위원장은 이전 과로사 사례를 보면 결국은 과로사로 실제 인정돼 산재 판정을 대부분 받았다면서 “CJ대한통운은 (과로사를 대할 때) 이제 좀 바뀌어야 하지 않나”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대책위는 “CJ대한통운은 유족의 산재신청을 위한 고인의 근로기록을 온전히 그리고 즉각 제공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뿐만 아니라 CJ대한통운은 산재로 인정하는 대신 장례를 치르고 있는 유가족에게 ‘위로금을 주겠다’며 회유를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씨의 부인은 “(CJ대한통운 본사 직원이) 장례식장에 달려와 제일 먼저 꺼낸 말이 ‘노조와 접촉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빈소 앞에서 계속 감시했다. 소속이 어딘지도 밝히지도 않고 주위 사람들에게 접근하며 저의 정보를 캐물었다”며 “위로금을 주겠다고 터무니없는 금액을 제시하면서 뒤로는 빠져나갈 궁리만 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책위는 “이번 과로사에 대해 CJ대한통운은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대책위는 과로로 사망한 택배노동자 25명 중 9명이 CJ대한통운 소속이라며 “지난해 말 CJ대한통운이 택배노동자 과로사 방지 사회적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택배노조에서 총파업을 한 바 있다. CJ대한통운이 더 이상 죽음의 기업이 되지 않기 위해선 더 이상 뒤에 숨지 말고 택배노동자 과로사에 대해 국민앞에 진심으로 사과하고, 실질적인 대책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아가 대책위는 유족과 협의해 CJ대한통운 대표를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으로 고발하겠다고 예고했다.
진 위원장은 “왜 이런 일이 지속적으로, 구조적으로 반복되는지 원청이 확인해야 하는 거 아닌가. 죽음을 왜곡하고 조작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나”라며 “이런 문제가 또다시 발생한다면 본사가 공범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노조는 유족과의 협의를 통해서 CJ대한통운 대표이사를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으로 고발하겠다”며 “다시는 노동자가 CJ대한통운 노동 현장에서 죽어가는 일이 없도록, 반드시 막아내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대책위는 국토교통부의 관리·감독 책임도 따져 물었다. 대책위는 “국토교통부는 올해 1월 자체 사회적 합의 이행점검을 한 후 택배사들의 이행 실태가 ‘양호’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발표 이후 벌써 4명의 택배노동자가 과로로 죽거나 쓰러졌다”며 “이는 사회적 합의 이행을 실질적으로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재벌 택배사에 면죄부를 주는 국토부의 생색내기 점검에 그 원인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국토교통부는 사회적 합의가 현장에서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앞선 1월의 점검과 같이 생색내기식 점검이 아니라 대책위와 함께 실질적인 점검에 나서야 할 것”이라며 “상시·불시 점검을 진행해야 하며, 사회적 합의 전반의 이행에 대한 실태조사, 그리고 이를 논의할 회의를 즉각 소집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