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인 젠더폭력에 노출된 노동자는 신당역 역무원만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가정집과 관공서, 철도역, 심지어 온라인 공간도 젠더폭력의 현장이다. 참담한 사건이 발생할 때만 들끓고 식을 것이 아니라, 이번에야말로 젠더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26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 회의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젠더폭력 근절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신당역 여성 노동자 스토킹 사건을 계기로, 여성이 일터에서 안전하게 일할 조건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다시 한번 대두되고 있다. 민주노총은 이번 사건을 ‘일터에서의 젠더폭력에 따른 산업재해’로 규정했다.
노조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우리는 신당역에서 발생한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참혹한 스토킹 범죄를 목도하며, 우리가 일하는 공간 어디도 안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일터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은 촘촘하고 구조적으로 존재하고, 그로 인해 여성에 대한 폭력이 용인되고 있다”며 “사업주와 정부가 만들어 낸 차별적 태도는 조직문화를 성차별적으로 만들고, 고객과 이용자에게 전달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여성들도 일터에서, 보다 나은 미래를 계획할 수 있어야 한다”며 “안전하게 일하고 무사히 퇴근하는 것이 절실한 소망이 되어버린 오늘날 한국 사회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이제는 바꿔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문 여는 것조차 두려운 방문 노동자…회사는 현실성 없는 얘기만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다양한 노동 현장에서 여성 노동자가 겪는 어려움이 전해졌다.
여성 방문노동자는 소비자 집 문을 여는 것조차 두려운 현실에 처했다. 김정원 금속노조 서울지부 LG케어솔루션 지회장은 “고객의 사적 공간인 만큼 남성 고객이 혼자 있거나 하면 일단 긴장하게 된다”며 “매니저들 제보에 따르면, 속옷 차림으로 문을 열어주고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거나, 등 뒤로 와 스킨쉽을 하거나, 성적인 농담을 하는 고객들도 있다”고 말했다.
LG케어솔루션은 LG전자가 생산하는 렌탈 가전을 유지·관리하는 업무를 한다. 주로 여성 노동자는 B2C로 분류되는 가정집으로, 남성 노동자는 학교와 사무실 등 B2B 고객사로 배치된다. 여성 노동자가 사적 공간에 배치되면서 젠더폭력에 더 노출되기 쉬운 구조다. 여성 노동자가 한 달에 방문하는 가정집은 200여곳에 이른다.
젠더폭력에 맞닥뜨렸을 때 여성 노동자를 보호할 장치는 미흡하다. 업무에 필요한 휴대전화 앱에는 비상시 도움을 요청하는 ‘긴급 버튼’이 있지만, 사무소로부터 연락받기까지는 10분이 걸린다. 위급 상황에 실질적인 도움을 기대하기에는 긴 시간이다.
또한 매뉴얼에는 현장에서 위협을 느끼면 작업 중지하고 퇴실하라고 돼 있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대응이다. 김 지회장은 “고객을 대면한 상황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려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사측은 성폭력·성희롱을 당하면 사진으로 남기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했다.
고객만족도 평가도 여성 노동자의 대처를 가로막는다. “점검 후 고객에게 보내지는 고객만족도 평가에서 ‘매우 불만’이 나올까봐 걱정된다”며 “고객이라는 이유로 매니저들은 소극적인 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김 지회장은 전했다.
고객만족도 평가는 ‘매우 좋음’부터 ‘매우 불만’까지 총 5단계로 구성된다. 중간인 ‘보통’만 받아도 팀장의 호출령이 떨어진다. 서비스 교육을 다시 받으라는 지시가 떨어지기도 한다. 고객만족도 평가는 사원 개개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지만, 개별 사무소 총점으로 집계돼 소장과 팀장 급여에 연동된다. 윗선에서 여성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심해지는 배경이다.
LG케어솔루션 지회는 긴급 대응 시스템을 개선해 응답 시간을 단축할 것과 고객만족도 평가 제도 개선 등을 요구하고 있다. 경쟁사인 코웨이는 고객만족도 평가를 모든 고객에게 받지 않고, 일부 고객을 무작위로 추려 진행한다. 나아가 고객만족도 평가가 소장·팀장 급여에 연동되지 않도록 조정할 필요도 있다.
김 지회장은 “회사는 근본적인 대책 없이, 일이 벌어지면 알아서 작업을 중지하고 나와 보고하라는 사후 대책만 내세워 매니저들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며 “고객의 성폭력이나 성희롱으로부터의 보호는 매니저 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나서서 여성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길 바라지만, 신당역 사건을 두고 한 시의원의 ‘남성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서 사건이 일어났다’라는 발언이 입법부와 행정부의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대표한다고 보인다”며 “노동자 연대와 투쟁으로 여성이 안전한 일터를 만드는 데 앞장서길 바란다”고 했다.
공무 아닌 서비스로 치부되는 민원 업무…노동자 보호 조례 도입은 지지부진
공무원도 젠더폭력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5년 미만 낮은 연차의 여성 노동자가 민원 담당 업무에 주로 배치되면서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는 게 노조 설명이다. 민원 업무를 공무가 아닌, 일종의 서비스로 인식해 젊은 여성을 배치하고 있는 행태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박현숙 공무원노조 부위원장은 “한 민원인이 자기가 의뢰한 민원을 먼저 처리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낫을 들고 와 20대 중반 여성 공무원에게 살해 협박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며 “여성 공무원과 남성 공무원에게 벌어지는 악성 민원 상황은 매우 다르다”고 말했다.
법제도적 안전망은 허술하다. 박 부위원장은 “공무원 폭력 문제가 있어서 민원 담당 공무원에 대한 보호법률이 조례로 지정되고 있다”면서도 “전체 250여개 지자체 가운데 이같은 조례를 마련한 곳은 20%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나마도 모두 사후약방문식”이라고 지적했다.
철도 여성 역무원도 신당역 사건의 피해 노동자와 비슷한 처지다. 코레일 역무 업무를 위탁운영 하는 자회사 코레일네트웍스 노동자는 사실상 2인1조 근무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근무표는 2인1조로 짜여있지만, 스크린 도어 고장이나 각종 사건·사고 대응은 혼자 해야 한다. 1명은 역무실을 지켜야 해서다. 연차나 병가에 따른 대체인력도 반영되지 않고 있다.
정명재 공공운수노조 철도노조 코레일네트웍스 지부장은 “지난해 혼자 근무하던 여성 역무원이 고객에게 멱살을 잡히는 일이 있었고, 또 누군가는 뺨을 맞고 도망가다 운 좋게 외부에서 일하러 온 사람들에 의해서 구조된 바 있다”고 전했다.
언론 여성 노동자도 무분별한 악성 댓글로 고통받고 있다. 언론노조 성평등위원회 조사 결과, 여성 기자 대부분 괴롭힘을 경험했으며, 이로 인해 공황 장애, 불안, 분노 등을 겪고 있었다.
김수진 언론노조 성평등위원장은 “온라인 괴롭힘은 악성 댓글과 같은 가장 흔한 형태부터 성희롱성 댓글 외모 품평, 욕설 등을 달거나 전화로 괴롭히는 경우, 개인 신상과 얼굴 공개해, 조리돌림하는 경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며 “특히 신상 공개와 조리돌림은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 실제로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강력한 공포감을 심어준다”고 전했다.
이어 “온라인 괴롭힘은 당하는 입장에서 매우 심각하다”며 “여성 기자는 남성 기자가 겪지 않은 강간, 가족 살해 협박을 받는다. 여성만 받는 괴롭힘이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언론사가 여성 기자 괴롭힘을 개인의 문제로 떠넘기지 말고 회사 차원에서 대응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제도적으로는 온라인 괴롭힘에 대한 제재 수준을 오프라인 괴롭힘에 준하는 정도로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민주노총은 젠더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박희은 민주노총 여성위원장은 “정부와 기업주. 노동조합은 일터에서 발생하는 젠더폭력에 대해 이전과 다른 경각심을 가지고 대해야 할 것”이라며 “미투 운동 이후 우리가 만들어낸 제도와 장치가 얼마나 현장에서 실효성 있게 작동하는지 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여성가족부는 지금 당장 공공기관의 젠더폭력 피해 실태를 점검해야 한다”며 “중단된 여성폭력 신고 핫라인도 제대로 복원하고 피해자에 대한 지원도 확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가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전반적인 조직문화를 바꿔야 한다"며 피해를 입은 여성에게 조심하지 않았다고 탓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