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 엄마에겐 마을이 필요해요, ‘홍천엄마의 그림일기’

책 ‘홍천엄마의 그림일기’ ⓒ여는길

내가 어렸을 적 보았던, 또는 지금 보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만나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이 낡은 트럭에 세간살이를 한가득 싣고 먼지 풀풀 나는 논과 밭 사이로 난 길을 달리는 장면이다. 풍경만 보면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는 초록이 물씬 풍기는 장면이지만, 사람과 낡은 트럭과 그곳에 실린 세간살이들이 겹쳐지면 쓸쓸함과 초라함을 한껏 불러오는 장면이 된다. 도시를 떠나 지역으로, 농촌으로 떠나는 장면은 항상 그렇게 주인공의 시련을 상징했다.

물론 1990년대 후반 이후 IMF 위기를 겪으며 농촌이 고향이었던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자, ‘귀농’이라는 단어가 사회적 관심을 끌며 조금은 이미지가 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귀농도 결국은 도시가 힘들어 떠나는 삶이라는 본질에선 별반 다르지 않았고, 특히 도시 출신으로 도시에서 자란 이들의 떠남엔 귀농이라는 낭만적 언어조차 붙기 힘들었다. 어디든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새롭게 적응하는 건 힘겹지만, 도시를 떠나 지역으로 내려가 살아가는 일도 쉽지 않다.

마을활동가 박지선 씨가 출간한 ‘홍천엄마의 그림일기’에도 이런 고민이 가득하다. ‘민중의소리’에 지난 2019년부터 연재했던 글을 묶은 이 책엔 도시 생활에 지친 두 아이의 엄마가 아무 대책도 없이 지역으로 이주해 먹고 살기 위한 소소한 생업과 도전,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한 궁리, 자신의 완전한 행복을 위한 모색, 공동체로 함께 살기 위한 시도, 지방 사람들의 지방 소멸에 대한 생각이 기록돼 있다. 박지선 씨가 지역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 글과 그림으로 담겼다.

너의 첫걸음을 응원할게


‘이대로 죽는 것보다 낫겠지’ 하며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홍천 행을 선택한 그에게 지역은 아무것도 없는 암흑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민중의소리’에 처음 연재한 글 앞머리에 이렇게 썼다. “복잡하고, 사람들이 와글와글 많이 살던 성남을 떠나 생각지도 못했던 홍천에 오게 되어 느꼈던 그 낯설음이란. 시골마을도 아니고 400가구 정도의 외곽 작은 아파트인데도 일찍 깜깜해져서 여기가 혹시 유령마을은 아닐까 하며 혼자 섬뜩해 하기도 했다. 깜깜함이 이렇게 낯선 일이었다니.”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열한 살에 성남으로 이주하여 이후 35년간 살았던 그는 성남지역에서 푸른학교 지역아동센터교사, 여성단체 활동가, 작은도서관 실장으로 일하며 지역의 아이들과 여성들, 이웃들과 ‘더 좋은 세상’을 꿈꿨다. 2018년 홍천에 이주해 딸기농사, 축제 및 교육기획자,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한신대학교 사회혁신 경영대학원에서 사회적경제를 공부했다.

그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시 언저리의 삶을 포기하고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홍천으로 향한 뒤 가족들과 세끼 밥을 지어 먹고, 논과 들을 바라보며, 믿을 만한 이웃을 만나는 과정에서 마음과 몸이 회복되는 과정을 가졌다고 이 책에서 고백한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몇 다리만 건너면 마침내 한 가족이 되는 지방 소도시에 스며들 듯 적응하며 외부인의 눈으로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것을 새롭게 바라보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내려는 시도는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작가는 아이들을 시골의 작은 학교에 보내며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다. 아이들은 거름 냄새를 맡으며 학교에 다니게 됐다.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을 쓰고 논과 밭 사이를 산책하고, 직접 텃밭에서 키운 상추를 뜯어 학교 뒷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기도 한다. 도시에 비해 더 여유롭게 시간과 장소를 향유하면서 수많은 사람 중에 한 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어 스스로를 찬찬히 살펴보고 가능성을 더 이끌어내는 그런 교육이 지역에 있었다.

쌩쌩하고 빛나던 초보 엄마 시절


마을에선 부모들이 함께 자연스럽게 공동체로 묶여 ‘친구 따라 강남 가기 대작전’으로 아이를 키우는 모습은 슬기롭다. 몇 가정만 모여도 눈덩이처럼 더 다양한 세계가 만들어진다. 로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먹고사는 문제에도 적용된다. 버려진 마을회관을 재생하여 마을의 여성들과 함께 사회적기업을 만들고, 마을 농산물 유통, 지역 아카이브, 커뮤니티 사업 등 ‘자조’ 말고 ‘자부심’을 만들어가는 여성들의 로컬 비즈니스 이야기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런 행복한 경험들을 겪은 후, 그는 지금 자신을 ‘마을활동가’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활동가로 나설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엄마는 마을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안심되는 이웃의 돌봄을 받아야 하고 함께 모여 놀아야 한다. 엄마들은 만나 서로 이해하고 의지해야 한다. 마을은 세상의 가장 작은 단위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고 답한다. 그래서 선택한 이름이 바로 ‘마을활동가’라고 한다.

함께 성장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선 마을이 필요하고, 마을은 모두에게 소중한 곳이다. 마을의 소중함, 함께 살아가는 자부심을 이 책은 한껏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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