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노래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겠지만, 세상과 역사가 바뀌던 중요한 순간에 노래가 함께한 것만은 분명하다. 나라의 주권이 일제로 넘어가던 구한말 동학농민군과 민중들은 한을 달래기 위해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불렀다. 1960년 4월 혁명 당시 거리에서 싸우던 이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로 시작하는, 한국전쟁 때 만들어진 군가 ‘전우야 잘 가라’를 부르며 이승만 정권에 맞섰다. 1980년 광주에선 ‘애국가’가, 1987년 6월항쟁에선 ‘임을 위한 행진곡’이 거리의 민중과 함께했다.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 최루탄이 난무하던 거리에서 거리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낸 건 ‘민중가요’였다.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서도, 농민들의 수입개방 저지 투쟁 현장에서도, 철거민들의 처절한 현장에서도,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이던 동아리방에서도 민중가요는 늘 함께했고, 우리를 하나로 묶어줬다.
‘민중가요’가 가진 정치적 힘은 그 어떤 구호보다도 셌다. 집회 현장의 노래와 춤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이런 음악과 노래의 정치적 힘에 대해 미국의 신경과학자인 대니얼 J. 레비틴은 책 ‘노래하는 뇌’에서 “중립적인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면 동기화된 춤은 참가자들 사이의 긴밀한 관계가 낳은 결과로 보인다. 반면 참가자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 춤과 노래를 시작할 때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보통 끝에 가서는 강력한 공감과 보살피려는 마음, 그리고 애정이 생겨난다”고 설명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진 노래인 ‘민중가요’. 하지만, 거리의 노래였고, 방송이 아닌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전해졌으며 때론 입에서 입으로 알려진 노래였기에 자신이 원하는 때에 쉽게 감상하기 힘든 노래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MP3 파일로 음악을 감상하는 문화가 퍼져나가면서 민중가요를 더욱 편리하게 들으려는 요구도 커졌다. 인터넷으로 민중가요 음악 파일을 받아 감상하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났고, 이때 민중가요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사이트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만들어진 민중가요 공유 사이트가 바로 ‘피엘송닷컴’(PLsong.com)이다.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인 피엘송닷컴을 만들어 운영해왔고, 지금은 민중가요의 역사와 사료를 정리해 ‘민중가요사료관’을 준비하고 있는 피엘송닷컴 운영자 ‘단풍’을 지난 20일 서울 구로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덕질’에서 시작된 민중가요 인터넷 음악방송이 민중가요 사이트 ‘피엘송닷컴’으로
피엘송닷컴은 민중가요를 사랑했던 그의 ‘덕질’에서 시작됐다. “중학교 1학년 때 민중가요를 처음 접했어요. 선생님이 칠판에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를 적어 주셨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는 선배를 따라 집회에 나가곤 했는데, 민중가요를 들으면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와 민중가요의 첫 만남은 그렇게 가슴 뜨거운 설렘이었다. 민중가요를 만나 설렜던 이들 대부분은 노래패에 들어가 민중가요 가수나 창작자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자신을 ‘음치’라고 표현한 그는 창작보다는 거리에서 민중가요를 함께 부르고, 민중가요를 함께 듣는 걸 즐겼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음악재생 소프트웨어인 윈앰프(Winamp)를 이용해 디제이가 직접 음악을 소개하는 방송이 유행했는데, 민중가요를 주제로 방송하던 이들도 많이 있었다. 그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
“당시 커뮤니티 사이트인 세이클럽에서 민중가요 방송을 하던 사람들이 모여 ‘세이클럽 민중가요 방송 연합’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습니다. 줄여서 ‘세민련’이라고 불렀어요.”
민중가요로 인터넷 방송을 하던 이들이 가장 큰 고민은 민중가요 MP3 파일을 찾기 힘들고, 힘들게 찾아도 다운로드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당시엔 P2P 서비스 ‘소리바다’가 유행했는데, 음악파일을 가진 사람이 PC에 접속해야만 상대방이 다운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제목을 정확하게 알지 않으면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개인들이 민중가요 MP3 파일을 다운로드할 수 있는 홈페이지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서울대 출신들이 만든 ‘정보연대 SING’이 학교 서버를 활용해 만든 민중가요 사이트가 비교적 빨랐지만, 나머지 개인들이 운영하는 사이트는 노래 한 곡을 다운로드하는 데 하룻밤이 꼬박 걸리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게 바로 ‘피엘송닷컴’이다.
“처음엔 선배 두 명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우연히 시작된 아이디어였어요. 술을 마시다가 민중가요를 안정적으로 다운로드할 수 있는 사이트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노래 목록과 앨범 정보 등을 제공하는 체계적인 서비스를 만들자는 구상이었죠. 선배들이 돈을 대겠다면서 제가 컴퓨터공학과라는 이유로 만들어보라고 했어요.” 297개 팀, 음반 568개, 총 8천823곡 피엘송닷컴 국내 최대 민중가요 사이트가 되다
그렇게 2001년 피엘송닷컴이 만들어졌다. 피엘송닷컴의 ‘PLsong’은 ‘노동자계급해방노래(proletariat liberation song)’의 약자에서 따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플 앤 러브(People and Love)’ 등 여러 의미를 담아 사용하다 지금은 ‘인민해방노래(people liberation song)’의 약자로 사용하고 있다.
피엘송닷컴이 문을 열자 인기는 대단했다. 당시 서버는 부산 KT 인터넷데이터센터 (IDC)에 있었다. 당시만 해도 IDC 서비스가 활성화되기 전이라 피엘송닷컴이 입주한 IDC 센터에 있던 서버는 채 100대가 안 됐다. 이런 첨단 시스템은 피엘송닷컴의 장점이 됐다. 테이프 형태로 유통되고, 구전으로 전해지다시피 하던 민중가요를 인터넷에서 쉽고 빠르게 만날 수 있게 되면서 많은 이들이 피엘송닷컴을 찾은 것이다.
“2001년 초에 처음 사이트를 개설했을 때부터 많은 이들이 방문했어요. 다른 사이트에서 민중가요 한 곡을 받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리던 시절인데, 피엘송닷컴에선 1분도 걸리지 않았거든요.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에 항의며 촛불집회가 벌어지던 당시엔 서버가 끊길 정도로 많은 이들이 사이트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100메가 인터넷 선을 30개 회사가 나눠서 썼어요. 사용료도 꽤 비싸서 한 달에 30만 원이었습니다. 30개 회사가 나누어 쓰는 100메가 인터넷 회선에서 피엘송닷컴이 차지하는 트래픽(인터넷상에서 송수신되는 통신 데이터 분량)이 30~40%나 되는 바람에 다른 회사가 접속이 느려질 정도였어요. 결국, 트래픽이 폭주하면서 서버를 서울로 옮겨야 했습니다.”
피엘송닷컴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쉽고 빠르다는 편리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양한 민중가요를 만날 수 있다는 게 피엘송닷컴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피엘송닷컴을 방문해 한 번이라도 민중가요를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자료의 방대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
“제가 가지고 있던 민중가요 테이프에 더해 제가 없는 건 구입했고, 다양한 분들이 보내주시는 등 여러 경로와 사람들을 통해서 자료를 구했어요. 음악도 치우치지 않게 다양하게 담으려고 애썼습니다. 예전엔 이른바 NL(민중해방) PD(민중민주)로 나뉘어 활동했는데, 부르던 음악도 조금씩 달랐잖아요. 음악을 가리지 않고 다 모았어요. 외국의 저항가요 등도 기회가 될 때마다 수집해 올렸어요.”
그런 그의 노력으로 피엘송닷컴은 국내 최대 민중가요 아카이브 사이트가 될 수 있었다. 합법적으로 만들어진 음반은 물론 이른바 ‘비합법 음반’, 각 지역 노래패의 음반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모았다. 지금까지 음원을 저장한 민중가요 자료는 솔로 가수 등을 포함해 297개 팀, 음반 568개, 총 8천823곡에 이른다.
2002년 여중생 촛불 2004년 노무현 탄핵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등 사회운동의 파도가 거세지면 피엘송닷컴 방문자도 급증
민중가요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 마음먹은 이들과 함께해온 음악인 만큼 피엘송닷컴의 인기도 사회운동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사회운동이 활발해질 때 방문자가 급증했다. 지난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추모 촛불집회,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등 사회운동이 거세지면 피엘송닷컴 방문자도 덩달아 급증했다.
하지만, 방문자가 급증하면서 사이트 운영을 위한 경제적 어려움도 커졌다. 서버 사용료가 처음엔 한 달 30만 원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 서버를 2대로 늘리면서 한 달에 서버 사용료만 50만 원이 나가기도 했다. 후원이 있었지만, 서버 사용료를 감당하기에도 벅찬 수준이었다. 함께 사이트를 만들고, 도와주겠다던 선배들도 손을 떼면서 당시 20대 중반 대학생이던 그가 개인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처음엔 제가 피엘송닷컴 운영자를 맡을 생각이 아니었어요. 선배들이 손을 놓으면서 떠안게 된 거죠. 대학 등록금으로 밀린 서버 사용료를 해결하며 피엘송닷컴 운영에 매달렸어요. 당시 다들 저를 직접 만나면 놀라곤 했습니다.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을 피엘송닷컴 운영자로 생각했는데, 새파랗게 젊은 이십 대가 운영자였으니까요. 결국, 젊었고, 재미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해요.”
민중가요를 누구보다 사랑했고, 좋아했던 그는 피엘송닷컴을 운영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도 해결해야 했기에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했고, 그는 안경사가 됐다.
“피엘송닷컴을 운영하면서 제가 가진 원칙 가운데 하나가 피엘송닷컴으로 돈은 벌지 말자는 거예요. 운동으로 시작한 일을 업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망가지는 사람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안정적으로 활동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결혼도 한 상황이었는데, 와이프와 상의했어요. 죽기 전날까지 일을 할 수 있는 직업, 그리고, 자격증 있어야 개업을 할 수 있는 일, 그러면서도 여유시간을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는 직업을 찾겠다고 마음먹었고, 그게 안경사였어요.”
피엘송닷컴 운영과 경제생활을 위해 선택한 직업 ‘안경사’
그는 안경광학과에 진학해 자격증을 땄고 안경사로 일했다. 그 뒤 안경 공학 전공을 살려 보건대학원에서 석사, 의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좀 더 경쟁력을 가지고 안경사로 일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안경사로 일하며 피엘송닷컴 운영자로 활동했다. 민중가요를 서비스하던 다른 사이트들은 거의 문을 닫았고, 그 역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그만둘 생각도 많이 했다. 그뿐만 아니라 보안수사대에서 그와 부인의 10년 치 통신 내역을 조회했다는 통보가 왔을 정도로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선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혼자서는 올 수 없었던 길이고, 많은 이들이 응원했기에 가능했던 길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은 ‘산하’님이에요. 전북대 노래패 출신이셨는데, 피엘송닷컴의 중흥기를 이 분이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직업적인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아님에도 피엘송닷컴 사이트 프로그래밍을 직접 했어요. 피엘송닷컴이 상업적 음악사이트 못지않게, 가사 음반 정보를 연동해 서비스할 수 있었던 게 다 산하님 덕분이에요. 그런 인연으로 산하님 결혼식에 참석하는 등 자주 봤는데, 지금은 연락이 끊겼어요. 혹 이번 인터뷰를 보신다면 꼭 연락해주셨으면 합니다. 또 지금까지 후원을 이어주시는 분들과 민중가요 창작자분들도 너무 고마워요.”
많은 이들의 도움과 그의 열정으로 20년을 이어왔지만, 한계는 분명했다. 개발비가 부족하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인터넷 기술에 대처하기 힘들었다. 인터넷 브라우저가 업데이트되고, 새로운 브라우저가 만들어지는 변화에 피엘송닷컴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새로운 기술을 지원하지 못하니 사이트 운영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게 됐어요. 지금은 적은 개발비로 유지 가능한 수준에서 버티고 있어요. 스마트폰 앱을 개발해 서비스하려고 준비했지만, 몇 년 동안 기획만 할 뿐 좀처럼 속도는 내지 못 하고 있어요.”
지금 피엘송닷컴 사이트는 악보를 위주로 서비스하고 있다. 서버에 민중가요 파일은 그대로 올려져 있어서 서브소닉(Subsonic) 같은 범용 음악앱으로 감상이 가능하다.(피엘송 홈페이지에 자세한 안내가 있음) 그나마 서버 비용이 줄어서 지금은 월 10만 원 정도 수준으로 근근히 버티며 서비스를 하고 있다.
피엘송닷컴, 민중가요사료관으로 변신 준비
그는 현재 성공회대 대학원 국제문화연구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십 대 중반부터 사십 대 중반까지 청춘을 바쳐 민중가요 사이트를 운영했지만, 이와 관련한 공부는 부족했다는 생각에 지난 2019년 성공회대 문화대학원에 진학했다. 그 뒤 2021년 석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 그는 안경사 일과 피엘송닷컴 운영을 함께하는 데 한계를 느꼈다. 일도 되도록 지금 공부하는 것과 관련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행사 기획 등 문화기획 사업을 시작했다. 서울민예총에 ‘민중가요사료관’을 설립을 제안했고, 그가 직접 민중가요사료관 추진단장을 맡아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민중가요사료관은 민중가요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다. 그리고, 민중가요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선 민중가요란 과연 무엇인지 개념을 정리하는 작업과 연구가 필요하다. 이는 그가 성공회대 대학원 국제문화연구학과 박사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민중가요를 “한국 현대의 서민적 노래문화의 하나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대중가요 등 주류 노래문화에 대한 비판의식을 지닌 대중들이 기존 대중가요 시장 바깥에서 구전 등의 독자적 유통구조를 통해 향유하는 노래”라고 규정했다. ‘한국대중가요사’ 등을 쓴 문화평론가 이영미는 민중가요를 “기존의 노래문화에 대한 반성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 기존의 음반시장을 벗어나서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는 노래문화”라고 설명한다.
다양한 규정과 설명이 있지만, 민중가요는 대중가요 등 주류 음악문화와는 확실히 다르고, 주제에 있어 저항의식과 비판의식이 담긴 노래라고 보는 시각이 대체적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론 투쟁 또는 집회할 때 부르는 노래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민중가요와 관련해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노래도 시점과 사람에 따라서 달라져요 시대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 민중가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예요”
“요즘엔 동네 아파트값 하락을 걱정하며 장애인 시설을 반대하는 싸움 현장에서도 민중가요가 흘러나와요. 집단이기주의, 님비, 소수자를 억압하는 공간과 집회에서 흘러나오는 그 노래를 민중가요라고 할 수 있을까요? 민중가요로 만들어졌지만, 그런 쓰임으로 쓰이지 않는데도 민중가요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리고, 이런 그의 질문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애국가’를 둘러싼 모순적인 상황으로 이어진다.
“1980년 5월 21일 옛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은 애국가가 끝남과 동시에 광주민중에게 집단 발포를 했어요. 그런데, 집단 발포의 신호였던 애국가는 당시 시민군을 비롯한 광주 민중이 투쟁하며 불렀던 노래이기도 합니다. 광주 민중들은 애국가는 물론 군가였던 ‘멸공의 횃불’, ‘진짜 사나이’ 등을 투쟁가로 불렀어요. 같은 노래도 시점과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져요. 시대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 민중가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예요. 저의 박사 과정을 지도하시는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도 민중가요를 단순히 ‘함께 힘을 모으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부르는 노래’라고 규정한다면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서 불리는 노래는 무엇인지 제게 질문한 적이 있거든요.”
또한, 우리의 민중가요는 외국 사례와 비교해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다. 민중가요는 흔히 영어로 투쟁음악, 저항음악을 뜻하는 ‘Protest Song’으로 번역한다. 그런데 외국의 저항음악은 독자적인 분야라기보다는 대중음악 가운데 저항적 성격을 가진 음악을 지칭하는 단어일 뿐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음악매체인 u디스커버뮤직닷컴(www.udiscovermusic.com)이 노동절이던 지난 2022년 5월 1일 발표한 ‘역사상 최고의 저항노래 20곡’을 살펴보면 우리와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백인에 의해 폭행당하고 나무에 매달려 죽어간 흑인들의 끔찍한 비극을 노래한 빌리 할리데이(Billie Holiday)의 재즈 명곡인 ‘Strange Fruit’(1939년), 반전 메시지를 담은 밥 딜런(Bob Dylan)의 ‘Masters Of War’(1963), 존 레논(John Lennon)의 ‘Imagine’(1971) 등이 당시 저항노래 20곡 안에 들었다. 모두 대중가수로 이름을 알린 사람들이고, 우리도 이름을 아는 유명 가수들이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칠레 가수 ‘빅토르 하라(Víctor Lidio Jara Martínez)’가 부른 ‘Venceremos’(승리하리라), ‘Manifiesto’(선언)는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얻은 음악이었다. 그를 비롯한 남미의 음악가들이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면서 벌인 ‘새로운 음악’이라는 뜻의 음악운동인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ón)’은 남미의 주류 음악이 됐다.
“하지만, 우리의 우리 민중가요는 주류에 속해 본 적이 없어요. 우리 민중가요의 그런 특성 때문에 과거 민중가요를 ‘주류 음악 질서에 속하지 않는 노래’로 규정하기도 했던 겁니다. 이런 규정이 낡았다면서 어떤 이들은 이젠 민중가요라는 용어를 버려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민중가요가 이젠 그 역할이 끝났다고 말하는 분도 있어요. 저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민중가요의 역할이 끝났다는 생각엔 동의하지 않아요.”
“민중가요는 대중가요와 다르게 대부분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모여 집회 현장, 동아리방 등 함께 부르며 전해진 음악이에요 굳이 따지면 수용자가 곧 연행자(演行者)인 거죠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커버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어요”
민중가요사료관 설립은 민중가요의 개념을 새롭게 정리하는 과정이다. 그동안 민중가요와 관련한 여러 연구가 있었지만, 꽃다지, 노래를찾는사람들 등 서울 지역 유명 노래패 중심으로 진행되며 한계도 많았다. 그는 유명 노래패들의 활동도 의미가 크지만, 민중가요를 향유했던 다양한 사람들의 기록도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민중가요는 대중가요와 다르게 대부분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모여 집회 현장, 동아리방 등 함께 부르며 전해진 음악이에요. 굳이 따지면 수용자가 곧 연행자(演行者)인 거죠.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커버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어요.”
모두가 ‘수용자’이자 곧 ‘연행자’였기 때문에 민중가요는 다양했다. 전국의 대학은 물론, 학과별 노래패가 있을 정도였으니 노래 한 곡에 수십, 또는 수백 개 다른 버전이 있었던 셈이다. 그런 자료들은 그동안 제대로 수집되거나 연구되지 못했다. 민중가요사료관은 그런 자료들까지 수집하고 보관하고 분류하고 연구할 계획이다.
“대학별 노래패, 각 노래단체는 물론 과 노래패의 공연 팸플릿, 티켓, 포스터, 공연을 녹음한 테이프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할 겁니다. 노래책도 수집하고 있는데 노래책에 당시 시대적 고민을 담은 글이나, 낙서가 있는 것까지 모으려고 해요. 또, 예전엔 테이프에 자신이 선곡한 노래들을 녹음해 후배들이나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는데, 그런 자료들도 모을 겁니다. 그런 자료에도 선곡하고, 녹음한 사람의 고민이 녹아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공연 기획자료, 회의자료 등 민중가요와 관련한 모든 자료를 수집해 디지털화할 계획이에요. 사료관 사단법인이 만들어지면 현재 피엘송닷컴이 소장한 자료도 모두 이관할 겁니다. 피엘송닷컴은 민중가요사료관의 디지털 사료관 개념으로 운영할 거예요. 그곳을 통해 노래책, 악보, 음악을 인터넷은 물론 앱으로도 들을 수 있게 할 계획이에요.”
아직은 추진단이 꾸려진 정도지만, 추진위원회 형태로 확대·개편해 사단법인화하는 게 그의 1차 목표다. 아직 추진위가 꾸려지지 못했지만, 이미 자료 수집은 시작됐다. 자료들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최근에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료를 얼마 전에 버렸다면서 안타까워했던 이를 만났다.
“지금도 많은 자료가 사라지고 있어요. 버리지 말고 보내주시면 지금 당장 디지털화하지는 못해도, 분류해 보관하다 디지털화 작업을 할 예정이에요. 추진위가 꾸려지고, 재정이 확보되면 디지털화 작업을 최우선으로 진행한다는 계획입니다.”
그는 민중가요와 관련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자료든 자신에게 보내 달라고 말했다. (우편번호 04625, 서울시 중구 퇴계로36길 19 서부빌딩 2층 서울민예총 부설 민중가요사료관추진단 앞, 연락처 010-9619- 7265) 이렇게 자료를 수집·정리해놓으면 당장은 아니어도 나중에 민중가요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기대한다.
“비 오는 날, 궂은 날에 쓰는 우산처럼 민중가요는 어려운 일이 닥친 사람들에게 필요한 노래에요 지금은 맑은 날일지라도 언젠가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에 민중들을 보호할 우산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민중가요사료관을 만들 겁니다”
그는 민중가요가 소중한 역사적 자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에게 민중가요는 지나간 역사만이 아닌 오늘을 위한 노래다. 이제는 민중가요를 추억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이들이 많다. 7080세대 음악이 유행하는 것처럼 추억으로만 소비되는 걸 그는 안타까워했다.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 등 지금도 많은 이들이 민중가요라고 이야기하며 발표하는 노래가 있어요. 민중가수 또는 민중가요라 불릴 수 있는 활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음악이 민중가요는 아니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민중가요가 이미 낡아서 수명 다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지금도 누군가는 민중가요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민중가요는 언제나 가장 어려운 사람들 옆에서 사람들을 위로하는 노래, 함께하는 노래로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어요.”
그는 민중가요는 ‘우산’과 같다고 말한다. 조국과청춘과 명인 등이 불렀던 민중가요 ‘우산’엔 ‘이 비 다 개고 맑은 세상 오면 깊은 신장 속에 세워져 잊혀지더라도 다시 어려운 날 오면 누군가의 머리 위에 내 몸을 펼쳐 가려줄 꿈을 꾸네’라는 가사가 나온다. 그는 민중가요가 그런 우산이 될 것이라 믿으며 민중가요사료관 건립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끝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산은 비바람 불던 날엔 몸을 활짝 펼쳐서 사람들을 가려줬는데 날이 맑아지면은 신발장 구석이나 전철 좌석에 버려지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다시 비 오는 날이 오면 몸을 펼쳐서 사람들을 가려줄 그런 날을 꿈꾸잖아요. 저는 민중가요가 딱 이런 우산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맑은 날이어서 필요가 없다가도 이런 노래들이 필요해지는 시기가 오면 언제든 다시 쓰일 수 있거든요. 비 오는 날, 궂은 날에 쓰는 우산처럼 민중가요는 어려운 일이 닥친 사람들에게 필요한 노래예요. 저도 그런 민중가요와 함께 계속 살아가고 싶어요. 지금은 맑은 날일지라도 언젠가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에 민중들을 보호할 우산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민중가요사료관을 만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