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 포청천’은 소설 [칠협오의]를 소재로 한 대만드라마였다. 포청천의 이야기는 중국 명나라 시절 이미 경극이나 송사소설로 만들어져 사랑받았는데 이를 정리한 것이 [칠협오의]다. 이 드라마는 1970년대 대만, 홍콩, 중국 등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선 1993년 KBS에서 ‘판관 포청천’이란 제목으로 방영돼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포청천이 “여봐라! 개작두를 대령하라!”라고 외치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판결을 내리는 모습을 볼 때 시청자들은 통쾌함과 희열을 느꼈다. 억울함을 호소할 길 없는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듣고 살피는 모습이 감동을 줬다. 그 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것은 그렇지 못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서였다.
고선웅 연출의 중국 고전 신작 연극 ‘회란기’는 연극 무대에서 그리운 포청천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어 반가운 작품이다.
고전에 풍자와 해학을 입혀 만들어낸 ‘특별함’
연극 ‘회란기’는 중국 원나라 시절인 1200년대 중반 극작가 이잠부가 쓴 잡극이다. 원제는 ‘포대제지감회란기(包待制智勘灰闌記)’로 ‘포 대제가 슬기롭게 석회 동그라미로 판결을 내린 이야기’라는 뜻이다. ‘한 아이를 두고 자신의 아이라고 다투는 두 여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회란기’는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대표작 ‘코카서스의 백묵원’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연극 '회란기' 공연사진 ⓒ극공작소 마방진
일반적으로 고전은 교과서적인 이야기 구성에 평면적인 인물, 주인공에게 집중된 불운과 비극, 정의로운 권력자의 현명하고 지혜로운 도움, 권선징악의 결말을 갖고 있다. 고선웅 연출은 이 같은 원작을 패턴을 해치지 않으면서 한국식 풍자와 해학을 입혀 ‘특별함’을 만들어냈다. 1200년대 중국 원나라의 사회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다.
과연 에미는 누구인가?
예쁜 외모에 똑똑한 머리를 타고난 ‘장해당’과 놀기 좋아하는 ‘장림’은 남매다. 장해당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기생이 된다. 동네에 소문난 갑부 ‘마원외’는 장해랑에게 한눈에 반해 첩으로 삼는다. 이후 장해랑은 마원외의 아들을 낳는다. 마원외 앞에선 의좋은 척을 하던 ‘마부인’은 를 남편을 죽이고 재산을 차지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던 어느날 장림이 장해당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자, 마부인은 ‘입던 옷과 장신구를 줘도 된다’고 장해당에게 허락해 준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마원외에게 ‘장해당이 내외해야 할 남자에게 옷과 장신구를 주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장해당이 끓여온 국에 독을 넣어 남편을 죽인다. 그동안 못마땅했던 장해당과 그 아들에게 손을 쓴 것이다.
이후엔 남편의 재산을 모두 차지하게 위해 장해당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이라 주장하며 동네 이웃과 산파까지 매수해 거짓 증언을 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을 내연남 ‘조영사’와 미리 짜 둔 마부인은 장해당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운다.
이렇게 장해당의 억울함과 비극적인 삶은 극에 달하게 된다. 이 때 등장하는 이가 표대제, 우리가 알고 있는 판관 포청천이다. 장해당과 오빠 장림은 억울함을 호소하고 포청천은 사건을 면밀히 들여다 보게 된다.
관아에서 자신의 앞에 서게 된 장해당과 마부인에게 포청천은 바닥에 석회로 원을 그리라고 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를 원 안에 세워라. 그리고 두 여인은 아이를 석회 원 밖으로 끌어당겨라!”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세상에 날리는 한방
포청천의 판결은 수백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무릎을 치게 한다. 하지만 관객을 감동케 한 것은 포청천의 판결만은 아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약자의 목소리를 먼저 듣는 자세, 재판의 모든 과정에 어떤 권력도 이해관계도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 것에도 감동 포인트가 있다. 세심하게 사건을 들여다보고 백개의 증거보다 한 사람을 중심에 두고 판결을 한 것도 그렇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세상에 날리는 한 방이 속시원하게 느껴진다.
연극 '회란기' 공연사진 ⓒ극공작소 마방진
복잡한 무대장식을 벗어던진 간결한 무대는 관객이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든다. 표 대제를 제외하고 모든 배우들은 현대식 의상을 입고 나오는데 이것은 고전을 현대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배우들의 놀라운 ‘티키타카’는 마당놀이의 재담을 연상시킨다. 울어야 할 상황을 웃게 만들고 화가 나는 상황을 중화시킨다. 정신없이 배우들의 재담 속에 빠져있다 보면 1부가 막을 내린다.
등장인물들의 과장된 표정과 행동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권력을 가진 이들의 허상을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다. 돈으로 증거와 증인을 사는 마부인의 대담함은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700여 년의 시간이 무색한 이 이야기는 자꾸 우리가 사는 세상을 대비하여 생각하게 한다. 연극 속 대사는 그래서 더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다.
“진실은 감추려 해도 해처럼 일어나고, 거짓은 덮으려 해도 쇠꼬챙이처럼 일어난다.”
연극 ‘회란기’
공연날짜 : 2023년 3월 10일(금) – 4월 2일(일) 공연장소 :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공연시간 : 평일 19시30분 / 토요일 14시,18시 / 일요일 14시 (월 공연 없음) 러닝타임 : 약 125분 (1막 65분, 인터미션 15분, 2막 45분) 관람연령 : 14세 이상 관람가 (중학생 이상 관람가) 원작 : 이잠부 창작진 : 번역 문성재/각색,연출 고선웅/프로듀서 고강민/작곡 김주형/무대디자인 백혜린/조명디자인 박성희/분장디자인 박효정/형제작 김정란/무대감독 최정환 출연진 : 박상원, 호산, 이서현, 박주연, 조영규, 견민성, 원경식, 김남표, 조한나, 최하윤, 박승화, 이정훈, 강득종, 남슬기, 조영민, 조용의, 김동지, 임진구, 박해용, 고영찬 티켓예매 : 인터파크 티켓, 두산아트센터 공연문의 : 극공작소 마방진 02-6956-56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