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시위 진압 경찰이 연금 개혁 반대 시위대를 막아서고 있다. 지난 16일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가 연금 개혁 법안을 하원 표결 없이 입법하는 헌법 제49조 3항을 전격 발동하면서 격렬한 반대 시위가 프랑스 전역에서 이어지고 있다. 2023.03.20.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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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전역에서 300여 만 명이 연일 거리로 나와 연금수령 연령을 직권으로 올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규탄하며 파업과 시위를 벌이고 있다. 벌써 두 달여 가까이 계속된 시위는 법안의 제정 절차와 유럽연합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마크롱의 출국을 기폭제로 참여 계층과 참여자 수가 급증하며 격화되고 있다. ‘우리는 루이16세를 처단했고,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외치는 시위대는 연금 문제를 넘어 민주주의 수호와 자본주의 타파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번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경우 유류세 인상에 대한 반발로 2018년 말부터 2019년 봄까지 프랑스 전역을 뒤흔든 ‘노란 조끼’ 시위처럼 정부가 다시 한번 벼랑 끝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그 상황을 전한 가디언의 르포 기사를 소개한다.
르노(49)는 파업 노동자들의 바리케이드에 막혀 꼼짝달싹 못하는 트럭의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는 “에마뉘엘 마크롱은 거리의 분노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다. 사람들은 더 이상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22년째 쓰레기 트럭을 몰고 있는 르노는 쓰레기 수거 파업으로 보름째 쓰레기 처리 공장이 폐쇄되고, 파리의 절반이 1만톤의 쓰레기로 뒤덮이는 것을 지켜봤다. 르노는 일당을 포기할 형편이 되지 않아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마크롱이 하원 표결을 건너뛰고 연금 수령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늦추기로 한 법안을 여당이 장악한 상원에 상정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왜 분노하는지 잘 알고 있다. 르노는 모두가 프랑스의 정치 체제가 무너지고 있다면서 수군댄다며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물가가 계속 올라 나도 생계유지를 위해 본업 외에도 목수든 공사장의 인부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시위는 마크롱 정권이 하원의 불신임 투표에서 9표 차이로 간신히 살아남은 20일 이후 격화됐다. 마르세유, 리옹, 릴, 파리를 비롯해 프랑스 전역에서 1,500여 건의 시위가 발생하고, 순환도로와 대학이 바리케이드에 막혔으며, 철도 점거, 파업, 정전 등이 일어났다. 르노 회사의 쓰레기차 차고에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파업을 지지하기도 했다.
파리의 남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아이브리의 시청에서 일하는 노조 활동가 셀린느(53)는 “모두가 참여하고 있다. 정부는 점점 젊은 사람들이 동참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했다. 매일 새벽 차고로 와서 시위에 참여한 그녀는 “민주주의를 무시했다. 마크롱은 자기가 왕이라도 되는 줄 안다. 마크롱이 우리 말에 귀를 기울일 때까지 버텨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고에는 아주 적은 수의 쓰레기차가 천천히 오갔지만 파리의 쓰레기 위기를 완화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마크롱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 1년도 채 안 돼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다. 그의 인기 없는 연금 수령 연령 변경에 반대하는 시위와 파업은 지난 2달 간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정부는 헌법 제49조 3항에 따라 긴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했을 때 국무회의를 통과한 법안을 총리의 책임 아래 의회 표결 없이 통과시킬 수 있다. 정부가 이를 사용하자 일부 야당이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지만 지난 20일 부결됐고, 그와 동시에 표결하지 않은 연금 개혁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이에 한때 128만 명이 거리로 나올 정도로 이미 상당한 규모로 이어졌던 시위가 더욱 커져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고 수백 명이 체포됐다.
일부에서는 새로운 동력을 찾은 이번 시위로 4년 전의 노란조끼 반정부 운동을 떠올리며 우려한다. 마크롱이 거리의 폭풍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엇을 할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측근들은 이미 개각이나 국민투표를 배제한 상태다. 마크롱이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치를 가능성도 없다. 그리하여 제 1 야당인 극우 마린 르펜의 국민전선이 이번 시위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될 전망이다. .
마크롱은 이번 주말에 첫 해외 방문 국가로 프랑스를 선택한 영국의 찰스 3세와 베사유 궁전에서 국빈만찬을 함께 하는 등 예정된 일정을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시위대가 마크롱을 거만한 군주 같다고 비난하는 시기에 말이다.
쓰레기 바리케이드를 담당하는 아이브리 시의원 아클리(48)는 “국민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 이제는 연금이 문제가 아니다. 프랑스의 정치 체제가 문제다. 대통령의 권한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은 프랑스의 전후 사회복지제도를 지켜내는 문제다. 마크롱이 주택 수당에서 실업제도에 이르기까지 와해시키려 하는 우리의 복지국가를 수호하는 문제다. 프랑스 국민은 정보가 많고 정치적으로 각성돼 있어 마크롱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이 모든 사람들에게 귀가를 명령하고 봉쇄시킨 파리1대학 톨비악 캠퍼스의 법대생 아리안(22)도 쓰레기 수거 센터로 왔다. 자본주의 반대 단체 회원인 그녀는 시위대에게 팜플렛을 나눠주고 있었다. 아리안은 “대학 바리케이드 투표를 위해 소집된 학생회 회의에서 너무나 많은 학생들이 경찰 폭력 경험을 얘기했다. 청년들이 화났다. 특히 마크롱의 연금 수령 연령 변경안이 통과된 이후 시위에 참여하는 청년이 급격히 늘었다. 정부는 새로운 청년운동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며 두려워하고 있다”고 했다.
변호사와 치안판사 노조는 수많은 의료진, 학생, 노조 활동가들이 임의적으로 연행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났다며 경찰의 과잉 진압 때문에 정부를 비난해 왔고, 경찰 감시 단체는 지난 주 낭트의 한 시위에서 4명의 젊은 여성이 경찰 통제 과정에서 성폭력을 당했다는 주장을 조사하고 있다.
파리의 뒤페레 미술학교에도 학생들이 쓰레기로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연금 수령 연령을 64세로 올리면 프랑스의 유명한 학생 및 노동자 파업이 일어났던 1968년 5월이 재현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플랭카드가 곳곳에 있었다.
도시 소외계층을 상징하는 파리 방리유 출신의 섬유공학과 학생인 아미나(19)는 “행동하는 민중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나는 경찰 폭력이 두려워서 밤에는 못하겠지만, 낮에는 시위에 참여할 것”이라고 했다. 아미나는 좌파이지만 지난 봄에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르펜을 막기 위해 마크롱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다고 마크롱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다. 연금제도 변화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노동계급일 것이다. 방리유 사람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불평등이 있다.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했다. (아미나는 병원 청소 노동자인 미혼모 어머니와 살고 있다).
리옹 외곽의 농촌에서 온 또 다른 학생 바하(19)는 어머니가 실직과 번아웃으로 고통받는 것을 지켜봤다. 그녀는 “이것은 나라의 민주주의 제도에 관한 문제다. 의회 표결없이 대통령 권한으로 얼마나 더 많은 법안이 통과될까? 우리는 프랑스의 정치 시스템이 망가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