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윤석열은 잊어도 우리는 일제의 만행을 잊지 못한다

생각할수록 분이 가라앉지를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벌인 일본과의 굴욕 외교에 관한 이야기다. 윤 대통령은 입만 열면 “미래를 위한 결단”이라고 강조했다는데 도대체 과거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미래가 어찌 열릴 수 있단 말인가?

일본의 소설가 다카하시 겐이치로(高橋源一郞)의 책 <우리의 민주주의거든>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일본인은 ‘잊어버리기’의 달인이다. 전쟁이나 비참한 공해의 재앙도 우리는 일단 지나버리면 일상생활 속에서 어느덧 잊어버리고 만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금방 잊어버리는 우리는 망각을 유도하는 국가의 압박에 수긍하기 쉽다.”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일본의 지식인이 한 말이다. 일본 정부는 국민들의 망각의 습성을 이용해 끊임없이 “잊으세요. 잊어버리세요”라고 최면을 건다. 이에 넘어간 일본인들은 과거의 끔찍함을 금세 잊어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저질렀던 침략의 만행도 잊고, 끔찍했던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도 잊는다. 이런 망각 속에 일본의 집단지성은 전진을 멈춰버린다. 그런데 일본 총리도 아니고 우리나라 대통령이라는 사람(‘작자’라고 쓰려다 참은 거다)이 “일본과 함께 과거를 잊어버려요~” 노래를 부른다. 이게 도대체 제정신을 가진 자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발상인가?

무엇을 잘 잊고, 무엇을 잊지 못하나?

사람의 망각에 대한 흥미로운 심리학 실험이 하나 있다. 1920년대 중반 러시아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던 대학원생 블루마 자이가르닉(Bluma Zeigarnik)은 식당에 앉아 주문을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자이가르닉은 식당에서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매우 다양한 메뉴를 주문했는데, 웨이터가 그 복잡한 주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주방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웨이터는 자이가르닉의 주문 뿐 아니라 3, 4개 테이블에서 받은 복잡한 주문을 동시에 정확히 암기했다.

놀란 자이가르닉이 식당을 나서면서 웨이터에게 “어떻게 그 많은 주문을 다 암기하신 건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웨이터의 대답이 더 뜻밖이었다. 웨이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실례지만 손님, 아까 뭘 주문하셨죠? 기억이 잘 안 나서요”라며 당황해 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6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한일 정상 소인수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2023.03.16. ⓒ뉴시스

불과 30분 전만 해도 그 복잡한 주문을 완벽하게 기억했던 사람이 단 30분 만에 주문을 모조리 까먹는 기이한 현상. 자이가르닉은 이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시도했다.

자이가르닉은 참가자 164명을 A, B 두 그룹으로 나눈 뒤 두 그룹에 간단한 과제를 냈다. A그룹은 과제를 수행할 때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던 반면, B그룹은 과제 도중 실험실 TV가 갑자기 켜지는 식으로 끊임없는 방해를 받았다. A그룹 대부분이 과제를 끝냈지만 방해를 받은 B그룹 중 상당수는 과제를 마치지 못했다.

실험을 마친 뒤 자이가르닉은 참가자들에게 “조금 전 과제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세요?”라고 물었다. 이때 과제를 무사히 마친 A그룹 참가자 중 과제 내용을 정확히 기억한 사람은 고작 32%에 그쳤다. 반면 과제를 마치지 못한 B그룹 참가자들 중 무려 63%가 과제 내용을 거뜬히 기억해 냈다. 자이가르닉은 이 실험 결과를 박사학위 논문에 게재하며 이렇게 결론지었다.

“인간의 뇌는 완벽하게 끝낸 일은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반면 끝내지 못한 일은 계속해서 뇌리에 남아 잘 기억할 수 있다.”

일제의 만행은 끝나지 않았다

겐이치로는 “일본인들은 망각의 달인들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사실 망각의 달인인 것은 일본인뿐이 아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인류 자체가 망각의 동물에 가깝다.

인간은 낙관의 동물이다. 낙관하기에 모험을 하고 이동을 한다. 숱한 실패를 겪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라고 믿는다. 이런 낙관주의 덕에 인류는 도전과 성취를 계속하고(물론 실패는 그 보다 훨씬 많이 했지만) 역사의 진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뇌가 낙관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피해야 할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 바로 나쁜 기억이다. 과거에 도전을 했는데 엄청난 실패를 겪었다. 그런데 그 기억이 뇌에 강하게 남아있으면 사람은 절대 낙관주의자가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어떤 부족이 사냥을 시도했다가 동물은 한 마리도 못 잡고 부족원들 목숨만 잃었다고 하자. 이 기억이 뇌에 남으면 그 부족은 두려움 때문에 다음에 절대 사냥에 도전하지 못한다.

그래서 뇌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다. 나쁜 기억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야 낙관주의가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을 정립한 인지신경과학자 탈리 샤롯(Tali Sharot) 칼리지런던 대학교 교수는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망각이라는 기법을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사용하는 망각 유도의 수준은 이 정도를 쉽게 넘어서버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도적으로 이런 망각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망각의 뒤편에는 그들 스스로가 “일제의 침략 전쟁은 완전히 끝난 일”이라고 굳게 믿는 심리가 깔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을 그들은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 한들 우리는 다르다. 그 기억이 그렇게 쉽게 잊힐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일본과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그게 끝난 일일지 모르겠지만, 우리한테는 끝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위안부로 끌려가 끔찍한 삶을 산 할머니들이 아직도 살아계신다. 그리고 일본은 이 끔찍한 일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80여 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끝나지 않은 일은 잊히지 않는다. 진정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과거를 완벽하게 마무리를 지어라! 한국 사회에 뿌리박힌 기득권인 친일을 청산하고,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먼저 받아야 한다. 그렇게 끝내지 않는 한 우리는 ‘망각의 달인 윤석열’과는 달리 결코 그 일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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