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5월 20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시찰을 마친 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연설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2022.05.20. ⓒ뉴시스
미국이 반도체법(CHIPS Act)상 중국 내 투자를 제한하는 ‘가드레일’ 조항 세부 내용을 내놨다. 한국 반도체 기업 타격이 만만치 않다. 추가적인 고강도 규제도 예고돼있다. 미국에 끌려다니던 정부는 “성과를 거뒀다”며 자화자찬한다. 오는 4월 말 한미 정상회담이 예정된 가운데, 정부 대미 외교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29일 대통령실에 따르면,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은 미국 상무부가 반도체법 가드레일 조항 세부 규정안을 발표한 지난 22일 “우리 기업이 중국 내 보유 중인 제조 설비 운영에 차질이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정부는 미국의 가드레일 규정 발표와 관련해, 그간 진행한 협상의 성과라고 평가했다. 최 경제수석은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이후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비롯한 상하원 의원 등 미국 정계 인사와 만남에서 한미 간 첨단산업 협력과 함께 우리 기업이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미국 측에 적극 요청해왔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정부를 향해 “자화자찬할 때가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이번에 발표된 가드레일 규정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반도체 공장 운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내용이 포함됐다. “차질이 없다”는 정부 인식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미국의 중국 규제는 여전히 불확실성에 둘러싸인 채 한국 반도체 산업의 위험 요인으로 남아있다. 미국이 추진하는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가 본격화하면, 이번 가드레일 규정에서 일부 허용된 공장 최신화도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
‘적극 협의 중’ 되뇐 정부, 독소 조항에도 자화자찬
그간 반도체법 관련 정부의 대미 협상에 대해 ‘소극적’, ‘늑장 대응’이라는 평가가 끊이지 않았다.
미국 반도체법은 지난해 8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서명하면서 공포됐다. 미국에 공장을 짓는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되, 조건을 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중국 등 우려대상국에 대한 투자가 제한된다는 가드레일 조항이 제시됐다. 이번 발표 내용은 당시 제시된 가드레일 조항의 세부 규정이다.
정부 대응은 시작부터 뒤처졌다. 미국 반도체법이 공표된 날,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9월에는 통상교섭본부장뿐 아니라 저도 방미 계획이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될 것으로 생각한다”도 말했다. 보름 뒤 업계 간담회를 가진 이 장관은 “당초 반도체법 초안에는 가드레일 문안이 없었으나, 의회 논의 과정에서 추가됐다”는 해명을 내놨다. “반도체법 논의 초기 단계부터 우리 기업에 대한 차별 없는 지원을 당부했으며, 이 장관은 반도체법 발효 직후 미국 측에 가드레일 예외 관련 협의를 당부하는 서한을 전달했다”는 정부 설명은 공허했다.
대미 협상은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하기 전, 의회 논의 과정에서 있어야 했다.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520억달러(약 68조원) 예산 배정하는 반도체법이 미국 상원에 발의된 건 지난 2021년이다. 중국 견제와 미국 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한 패키지 법안인 미국 혁신경쟁법(USICA)에 포함됐다. 반도체법은 처음부터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초안에 가드레일 조항이 들어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중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규제가 포함될 가능성이 있었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가 한국 기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부는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간 협상 과정에서 한국 기업에 불리한 조항이 추가되는지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했다.
미국 의회에서 반도체법을 두고 조율이 본격화된 지난해 상반기에도 정부 태도는 안일했다. 윤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과 삼성전자 평택 공장을 찾은 자리에서 “취임 이래 글로벌 공급망 핵심으로 반도체 중요성을 강조해온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법의 의회 통과를 위해 많은 노력을 쏟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아울러 공급망 정상회의를 직접 주재하고, 글로벌 공급망 안정을 위한 국제협력을 이끌고 있다”고 추겨세웠다. 그러면서 “오늘 방문을 계기로 한미 관계가 첨단기술과 공급망 협력에 기반한 경제 안보 동맹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반도체법이 한국 기업에 독이 될 수 있다는 신중함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 정부와 기업의 실익을 보장받아야겠다는 메시지는 없다. 자국 우선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동맹국 불이익도 개의치 않겠다는 미국에 경제 안보 동맹을 호소했을 뿐이다.
반도체법 공표 이후에도 정부의 대미 외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가드레일 조항 자체를 뒤집기는 무리여도, 세부 규정에서는 최대한 한국 기업 피해가 없도록 전방위적인 외교 활동이 요구되던 때다. 중국 반발 우려를 무릅쓰고 가입한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조정그룹 ‘칩4’를 가드레일 규정 협상 창구로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부는 “칩4는 한국·미국·일본·대만 간 다자회의체로 각국 이해관계가 달라 가드레일 등 양자 이슈를 논의하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입장을 내놨다. 미국과 1:1로는 협상력을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기왕에 참여한 칩4를 활용해 미국 반도체법과 이해관계가 얽힌 주변국과 함께 다자 외교로 풀어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제안은 무시됐다.
정부는 수차례 설명자료를 내 미국과 적극적으로 협의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상황은 점차 악화됐다. 지난달 발표된 반도체법 지원금 심사 기준에는 가드레일 조항뿐 아니라 초과이익환수, 미국 안보 기관에 대한 공장 접근권 제공 등 독소 조항이 대거 담겼다. 반도체법 공표 당시 뒤늦게 ‘가드레일 조항이 중간에 추가됐다’고 했던 것처럼, 각종 심사 기준과 관련해서도 사후 인지·대응하는 모양새가 이어졌다.
위기가 덮쳐오는 상황에서 정부 대미 외교는 미일 동맹의 하위파트너로 들어가는 한미일 안보 협력 강화 기조에 매몰돼,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치달았다. 일본에 대한 굴욕외교 참사로 꼽히는 정부의 지난 6일 일제 강제동원 해법안은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을 거라는 의심이 제기된다. 실제 정부의 해법안 발표 당일, 바이든 대통령은 준비한 듯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인 두 나라의 협력과 파트너십에서 획기적으로 새로운 장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환영 성명을 내놨다.
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정부의 대미 협상이 이어졌다. 가드레일, 초과이익환수, 공장 접근권 등 개별 조항에 대한 세부 규정 발표가 예정된 가운데, 지난 8~10일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을 방문해 상무부·백악관 인사 등을 만났다. 당시 안 본부장은 “우리 기업의 중국 내 공장 가동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지만, 이번 가드레일 규정을 보면 협상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는 “이번 가드레일 규정에 대해 업계는 대외적으로 ‘급한 불은 껐다’고 코멘트한 것 같은데,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소금 뿌리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해 8월 25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미국의 반도체, 전기차 지원법 대응 업계 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2022.08.25. ⓒ뉴시스 정부 성과로 내세운 ‘기술 업그레이드’, 유명무실 우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보조금을 받으면, 중국 공장의 생산 능력 증대가 제한된다. 이번 가드레일 규정에서 미국 상무부는 생산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반도체를 만들 때 투입하는 웨이퍼 수를 제시했다. 생산되는 반도체 물량 자체를 제한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공정 효율화 등을 통해 한 장의 웨이퍼에서 더 많은 반도체를 생산하는 건 허용된다.
증설을 통한 웨이퍼 투입량 증가 폭은 10년간 5~10%로 제한된다. 첨단 반도체는 상한이 5%이고, 범용 반도체는 10%까지 허용한다. 첨단 반도체 기준을 보면, D램은 선폭 18nm 이하, 낸드플래시는 단수 128단 이상이다. D램 공정에서 회로를 새기는 선폭이 얇을수록 집적도가 올라간다. 동일 크기에서 성능을 높이거나, 동일 성능의 더 작은 반도체를 만들 수 있다. 낸드플래시는 단수가 높아질수록 면적당 용량이 커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 물량 상당수는 첨단 반도체로 알려졌다. 가드레일 규정을 어기면 지원금을 전액 반환해야 한다.
미국이 생산 능력 증대를 일부 허용한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생산 능력 증대를 연간으로 환산하면 0.4~0.8% 수준에 불과한 탓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웨이퍼 투입량을 연 1% 이내에서 늘릴 수 있다고 한들 생산량이 얼마나 증대되겠느냐”며 “한국을 배려했다기보다는, 제한이 너무 타이트하면 반발이 심할 테니 이를 무마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한을 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이번 가드레일 규정에서 성과로 평가한 지점은 ‘기술 업그레드’다. 최 경제수석은 “기술 업그레이드가 가장 큰 관심이었으며, 그 부분에 대해 요청했고, 반영된 결과”라고 말했다. 이 장관도 “중국 사업을 철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극단적인 얘기도 많았다”며 “이번 발표로 중국 내 우리 기업의 기술 업그레이드 불확실성이 해소됐다. 정부도 그 부분에 상당히 주안점을 뒀다”고 언급했다.
이번 가드레일 규정에 기술 업그레이드 규제가 포함되지 않은 건 맞다. D램 노광 공정 선폭을 줄이거나, 낸드플래시 적층 단수 확장은 제한 없이 가능하다. 일견 앞으로도 중국 공장에서 고도화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문제는 더 큰 규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고도화된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고도화된 장비가 필요한데, 중국으로의 장비 반입이 금지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반도체법과 별도로, 지난해 10월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를 시행 중이다. 18나노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등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한 장비는 중국으로 넘어갈 수 없다. 규제 대상은 미국 기업에 한정되지 않는다. 미국 기술을 활용해 생산한 제품도 미국산으로 간주해 중국 수출이 금지된다.
일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중국 내 다국적 기업은 오는 장비 수출 규제에 대해 오는 10월까지 1년간 유예를 받았지만, 유예 연장은 전망이 밝지 않다. 미국은 오히려 규제 수위를 높이는 분위기다. 최근 블룸버그통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자국 기업에 대중 장비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브리핑하고 새 수출 규제 방안을 오는 4월 중 발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현재 규제 대상 장비는 17개 정도인데, 새 방안이 도입되면 그 수가 2배가량 늘어날 수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반도체 장비 시장은 미국의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KLA, 램리서치와 네덜란드의 ASML, 일본의 도쿄 일렉트론이 장악하고 있다. 네덜란드와 일본도 미국의 대중 규제 확대 동참을 공식화하고 있다.
리셔 스레이네마허르 네덜란드 대외무역·개발협력 장관은 이번 달 초 의회에 제출한 서한을 통해, 올해 여름 전에 장비 수출 규제 강화 방안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수출 규제 대상으로 중국과 ASML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심자외선(DUV) 노광 장비를 포함해 고사양 시스템이 제재 대상에 포함될 것”이라고 단서를 남겼다. DUV는 비교적 선폭이 두꺼운 기성 장비다. 선폭 10나노 이하 공정은 극자외선(EUV) 장비가 필요하다. 네덜란드 정부는 미국의 압박으로, 2019년부터 ASML EUV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해왔다. 스레이네마허르 장관의 서한은 DUV 장비도 규제 대상에 포함해, 중국의 범용 반도체 생산까지도 막겠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앞서 지난 1월에는 미국과 네덜란드, 일본이 워싱턴 DC에서 국가안보 고위급 간부 회의를 열고, 대중 장비 수출 규제에 합의했다는 외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김 전문연구원은 “이번 가드레일 규정이 우려보다 악화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정부가 협상력을 발휘했다고 평가할 측면도 있다”면서도 “이번 발표는 정부가 자화자찬할 만큼 중요한 이슈는 아니었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오는 10월 유예 만료가 예정된 대중 장비 수출 규제에 잘 대비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중국 시안에 위치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내부 모습(자료사진) ⓒ제공 : 뉴시스 경제성 약화 위기 처한 삼성·SK 중국 공장…장비 수출 기업도 타격
대중 장비 수출 규제 유예가 끝나면 기술 업그레이드뿐 아니라, 미미하게나마 허용된 생산 능력 증대에도 차질이 빚어진다. 박정호 특임교수는 “중국으로 장비 수출이 원칙적으로 금지돼 핵심적인 설비 투자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실제 증설이 이뤄질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며 “가드레일 규정에서 5% 증설이 가능하다는 조항이 실질적으로 워킹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대중 장비 수출 규제에는 중국에 포진된 첨단 반도체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담겼다. 중국 공장은 범용 반도체 생산만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기술 업그레이드와 생산 능력 증대가 제한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은 점차 경제성이 떨어지게 된다. 중국 철수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박 특임교수는 “10년의 기간을 줄 테니 중국에서 철수하라는 것”이라며 “대중 장비 수출을 제한하는 건 다음 단계의 반도체는 중국에서 생산하지 말라는 얘기”라고 말했다.
반도체를 둘러싼 산업 환경에 발맞추지 못하는 공장은 살아남기 어려워진다. 미국 오픈AI의 챗GPT로 대표되는 인공지능 챗봇 서비스와 자율주행 기술의 발달은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저장할 수 있는 고도화된 반도체를 필요로 하게 된다. 박 특임교수는 “이제부터는 반도체 사양과 용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며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활용하게 되면서, 요구되는 데이터 범주와 양이 대폭 증가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대중 장비 수출 규제에 따른 파급력은 가드레일 규정보다 광범위하다. 김양팽 전문연구원은 “가드레일 규정에 해당하는 한국 기업은 한 곳이지만, 대중 장비 수출 규제는 중국에 장비를 파는 국내 여러 중소기업이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가드레일 규정 영향을 받는 기업은 엄밀히 말해 삼성전자 한 곳뿐이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에 170억달러(약 22조원) 규모의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고 조만간 보조금 신청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SK하이닉스는 미국 내 반도체 기술개발(R&D) 협력과 패키징 제조 시설에 150억달러(19조 5천억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지난해 밝힌 바 있으나, 아직 일정과 부지 등 구체적인 계획은 공개되지 않았다.
중국은 한국 반도체 장비 수출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 수출국이다. 한국무역협회는 지난해 말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따른 한국의 기회 및 위협요인’ 보고서에서 “미국의 대중 장비 수출 제한이 지속·강화된다면 한국 수출이 큰 폭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지속적인 투자·교체가 중요한 반도체 장비 특성상 중국 현지 공장으로 장비 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설비 노후화로 5~10년 이내에 정상적인 공장 가동이 불가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대보다 걱정 앞서는 4월 한미 정상회담
반도체법이 한국 기업에 부담으로 작용하는 데 대한 우려가 나온다. 미국 압박이라는 대외적인 요인은 한국 기업이 경영 판단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을 좁아지게 하고 있다. 김양희 대구대 교수는 “중국이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려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의 중국 공장은 중국이 추격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다”면서도 “중국 디커플링(탈동조화)은 기업 스스로 판단할 부분이지, 미국에 의해 반강제로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되는 방향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반도체법이 구체화하는 국면에서 정부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가드레일 조항은 반도체법 독소 조항의 일부다. 과제가 산적하다. 초과이익환수 조항도 우려가 크다. 반도체법 지원금 심사 기준에 따르면, 보조금을 받는 기업이 초과이익을 낼 경우 보조금의 최대 75%를 미국 정부가 환수한다. ‘사업을 하지 말라는 얘기’라는 말까지 나온다. 반도체는 일정 주기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적으로 오가는 사이클 산업이다. 불황기에는 이익을 보전해주지 않고 호황기에 보조금을 걷어가면 사실상 기업이 받는 지원이라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환수율을 낮추는 등 방안을 미국으로부터 얻어내야 한다.
미국 안보 기관에 대한 공장 접근권 제공도 치명적이다. 정보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 반도체 공장 설계는 주요 영업기밀이다. 장비 배치에 따라 생산성이 크게 달라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공장의 내부 장비 배치가 미국 정부 기관을 타고 다른 기업이 흘러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정보 유출 우려는 점차 현실화하고 있다. 미국이 지난 28일 발표한 보조금 신청 절차를 보면, 보조금 신청 기업은 예상 현금흐름 등 수익성 지표의 산출 근거를 검증할 수 있는 엑셀 파일을 제출해야 한다. 상무부가 제시한 예시에는 생산시설의 웨이퍼 종류별 생산 능력, 가동률, 예상 웨이퍼 수율, 연도별 생산량과 판매 가격 증감 등 항목이 포함된다. 해당 자료는 적정 보조금 지원 규모를 판단하고, 초과이익을 산정할 예상 이익을 판단하는 데 활용된다. 수율과 마진율은 공장 설계와 마찬가지로 주요 기밀 사항이다. 정부 대미 외교의 한계가 또다시 드러난 셈이다.
시선은 오는 4월 말로 예정된 윤 대통령의 방미 일정에 쏠린다. 박 특임교수는 “오는 10월 만료 전에 한미 정상회담이 있으니 여기에서의 논의 결과를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관료가 미국에 대고 큰소리치기 쉽지 않다는 것, 국력에서 열위에 있다는 건 인정한다”면서도 “일부는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는 것도 알지만, 지금까지 보여온 것보다는 성과를 더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에 연달아 뒤통수를 내어온 정부가 대중 장비 수출 금지 유예를 받아낼 수 있을지,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