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인 임금 적극적으로 받아드립니다.’ ‘노조 필요하지 않으세요. 노동조합, 노조원 절찬 모집.’ ‘아프지 않으세요, 아픈 곳이 있다면···’
시화노동정책연구소가 경기 시흥스마트허브(구 시화공단) 골목에 붙인 선전물들이다. 지게차, 크레인 홍보 광고물 사이에서 체불임금을 받아주고, 노동조합 가입을 도와주고, 아픈 노동자들을 돕겠다면서 벽 붙이고, 전신주에 걸어놓은 선전물이 시선을 끈다.
축구장 32개 크기인 22만6천㎢에 1만 개 넘는 기업이 입주해 있고, 일하는 노동자가 12~13만 명에 이르는 이곳에 시화노동정책연구소가 문을 연 지 올해로 22년째다. 공계진 시화노동정책연구소 이사장은 미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조합을 조직하겠다는 계획으로 2001년 이곳에 연구소를 열었다. 수많은 노동자를 만나 상담을 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시흥안산일반노조를 만들었고, 2002년엔 일반노조에서 금창공업에 노조를 만들었다. 곧 다른 공장들에도 노조가 결성되며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 같았지만, 금창공업 노동자들은 사용자의 탄압에 맞서 1년이 넘게 장기투쟁을 벌여야 했다. 지방자치단체, 경찰, 기업이 총력대응에 나서면서 결국 노조는 깨져버리고 말았다. 시화공단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조 조직 사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힘에 부칠 수밖에 없다.
공계진 이사장은 지난 4월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린 인사말을 통해 “매년 약 500건에 달하는 무료상담을 진행하였고, 30권이 넘는 연구보고서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1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시화공단은 아직도 노동인권 불모지다. 99%가 50인 이하 사업장이다 보니 노동조합이 없다. 그로 인해 이곳 노동자들은 기본적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장시간노동, 저임금노동, 산업재해 노출”이라고 말하며 20년 넘게 지났지만 여전한 시화공단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40년 넘는 세월 동안 세 번 구속되고, 금속노조 노동연구원장, 민주노동당 정책위 부의장과 사무부총장 등으로 활동해온 그는 육십 대 중반인 지금도 미조직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기 위해 현장에서 뛰고 있다. 다리에 장애가 있어 지팡이와 목발에 의지해 생활하던 그는 지금은 휠체어를 사용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노동인권 불모지’인 시화공단 노동자를 위해 일하겠다는 열정은 여전하다. 지난 7월 12일 연구소를 찾아 공 이사장을 만났다.
“시화공단은 노조는 접해본 적 없는 말 그대로 자연 상태로 존재하는 DMZ 같은 지역이에요 노조를 만들면 무엇이 좋은지 모르고 노조를 만들어 승리한 경험을 들어본 적도 없는 곳입니다”
“솔직히 조직화 사업하기 어려운 곳이에요. 인터뷰도 하고 선전물도 뿌리면서 노동자들을 만나려고 하지만 쉽지 않아요, 지난해 이곳에서 근무하는 노동자 가운데 무작위로 뽑아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한 여성 노동자가 연구소에 와서 하는 말이 우리 연구소가 ‘장기매매하는 곳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구요. 또 여성 노동자 2명을 인터뷰하는데, 노조나 연구소에서 나눠준 선전물을 받은 적이 있냐고 물으니 한 번도 없다고 답했어요. 2명 모두 15년 넘게 여기서 일했다는 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20년 넘게 활동했는데도 그만큼 존재감이 없었다는 거예요.”
연구소는 물론 노동조합 등에서 선전물을 뿌렸다는데 왜 15년 동안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걸까? 선전물은 역 위주로 뿌려졌고, 회사 버스로 출퇴근하는 경우 등 넓은 공단 지역에서 다양한 조건으로 일하는 이들을 접촉하기 쉽지 않았다. 그는 시화공단을 “노조는 접해본 적 없는, 말 그대로 자연 상태로 존재하는 DMZ 같은 지역이에요. 노조를 만들면 무엇이 좋은지 모르고, 노조를 만들어 승리한 경험을 들어본 적도 없는 곳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상태에서 노조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만 언론을 통해 접하다 보니 노조와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또 어떤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어봤자 깨질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체념하는 이들도 많다. 몇 해 전 이곳 노동자 대상 설문조사에서 회사에서 억울한 일이 생기면 누구를 찾아가냐는 질문에 대부분이 회사 관리자를 꼽았고, 노조나 정당을 찾는다는 사람은 0.4% 정도에 그친 것도 이 때문이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관리자를 찾아가 이게 1순위에요. 그리고, 다음으로 그냥 회사를 그만둔다는 응답이 많았습니다. 억울한 일 있으면 관리자한테 얘기했다가 거기서도 해결이 안 되면 그냥 그만두는 거예요.”
“몇 해 전부터 민주노총 시흥지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어요 시흥시 전체로 보면 약 19만 명의 노동자가 있고 그 가운데 10만 명 이상이 시화공단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곳엔 민주노총 조직이 없어요”
2001년 시화공단에 자리를 잡고, 2002년 시화노동정책연구소를 연 이후 금속노조 노동연구원장과 민주노동당 장책위 부의장 등을 맡아 활동했던 기간을 빼곤 쭉 이곳에서 활동을 이어온 공 이사장은 이런 현실이 마음 아프다. ‘노조 필요하지 않으세요’, ‘떼인 임금 적극적으로 받아드립니다’라고 적힌 선전물을 공장 골목골목에 붙인 것도 이런 현실을 조금이라도 극복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공 이사장은 이런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선 민주노총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몇 해 전부터 민주노총 시흥지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어요. 시흥시 전체로 보면 약 19만 명의 노동자가 있고, 그 가운데 10만 명 이상이 시화공단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곳엔 민주노총 조직이 없어요. 시흥시 정왕동 일대는 민주노총 안산지부에서 관리하고, 구도심인 신천동 일대는 민주노총 부천시흥김포지부에서 관리하고 있어요. 근데 안산지부는 반월공단 중심이고, 부천시흥김포지부는 부천 중심이기 때문에 이곳은 일종의 사각지대예요.”
현재 금속노조 경기지역지회 시흥안산일반분회가 만들어져 있고,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민주노동자 시흥연대’를 꾸려 활동하고 있지만, 공 이사장은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결국, 민주노총이 나서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곳 시화공단을 개척하는 건 이미 우리 같은 작은 노동단체에서 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고 봅니다. 조직력이 있고, 자금과 사람을 가진 민주노총에서 나서야 해요. 민주노총 시흥지부를 만들고 민주노총이 책임지고 작은 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들 관심이 없는 거 같아요.”
그는 늘 기회가 있을 때마다 50인 미만 사업장, 작은 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겐 여전히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꿈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꿈을 가지고 노동정책을 연구해왔고, 그런 꿈을 가지고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에서 활동해왔고, 그런 꿈이 있기에 작은 공장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중요하다고 계속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의 마음은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의 길을 걸으며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만났던 광주항쟁 광주항쟁 3주년을 맞아 교내 시계탑에 몸을 묶고 외쳤던 “전두환 타도”
그는 1980년 대학에 들어갔다.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졌던 바로 그해 고려대학교 화학과에 입학했다 ‘민주화의 봄’이라 불리던 그때 매일 같이 시위가 이어졌다. 대학생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휴교령이 반복됐고, 교정엔 최루탄 냄새가 가득했다. 이런 시대에 무언가 해야 한다며 길을 찾고 있던 그에게 불교학생회가 눈에 띄었다.
“수업 시간에 한 친구가 사회과학 서적을 보고 있더라구요. 그 친구에게 나도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싶다면서 소개를 부탁했는데, ‘불교학생회’를 알려줬어요. 당시 불교학생회는 종교모임 성격의 서클에서 이념 서클로 바뀌는 과정이었어요. 거기서 79학번 선배들을 만나 학습을 시작했고, 얼마 뒤엔 지하 서클에 가입해 활동하게 됐어요.”
2학년이던 1981년엔 남양주로 서클 MT를 갔다가 칼빈소총으로 무장한 남양주경찰서 경찰들에게 연행돼 성북경찰서에서 조사받기도 했다. 그는 “경찰에 잡혀간 건 이때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4학년이던 1983년 5월 18일엔 광주항쟁 3주년을 맞아 학내에서 친구들과 함께 고공 시위를 벌였다.
“친구들과 함께 광주항쟁을 맞아 시위를 준비했어요. 저를 비롯해 몇몇 친구들이 치고 나가고 후배들이 그때를 틈타 교문 밖으로 나가는 게 계획이었어요. 저는 시계탑에서 치고 나가기로 했고, 다른 친구는 사범대 건물에서 치고 나가기로 했어요. 저는 장애인이어서 그런 역할은 잘하지 못했는데, 건물에 몸을 묶고 버틸 수는 있겠다는 생각으로 시계탑에 몸을 묶었어요. 다른 친구는 구호도 제대로 못 외치고, 학내에 상주하던 형사들한테 잡혔다는데, 저는 밧줄로 몸을 묶었기 때문에 10분은 버텼어요. 그러다 잡혀갔는데, 나중에 후배들에게 들으니까 교문 밖을 나가 신설동역까진 진출했다고 하더라구요.”
공 이사장은 지난 5월 19일 당시 시위를 주동했던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도 가졌다. 밧줄로 몸을 묶으며 시위에 나섰던 20대 청춘들은 어느새 70대를 앞둔 노년의 모습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전두환 타도”를 외쳤던 열정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시화공단 골목에 선전물을 붙이며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일에 나서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그는 1983년 5월 시위 때문에 처음으로 구속됐다. 구속·수배를 반복했던 고통의 시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며 얼굴에 수건을 덮고, 주전자로 물을 뿌리는 고문도 당했다. 결국, 서울구치소로 넘겨져 징역 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수많은 대학생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싸우면서 구치소도 대학생으로 넘쳐났어요. 시범케이스라도 만들려고 했던 건지 학내시위를 했던 저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형량이 높았던 건데 당시엔 그런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러다 그해 12월 성탄절 특사로 석방됐어요.”
1983년 대학 복학을 포기하고 구로동 봉제공장 부흥사 입사하며 뛰어든 노동운동
석방되자마자 그는 갈림길에 섰다. 그를 비롯해 많은 대학생 ‘빵잽이’들이 대거 석방되면서 이후 진로를 두고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복학해 민주화운동을 이어가자는 ‘복학파’와 대학 내 민주화운동은 재학생 후배들에게 맡기고 사회로 나가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는 ‘반복파’가 논쟁했다.
“전 당시에 사회로 나가 노동운동을 하자는 이른바 ‘반복파’였어요. 그렇게 마음을 먹고 공장에 들어갈 준비를 했습니다. 근데, 저는 솔직히 고민이 많았어요. 노동운동을 마음먹었지만, 저는 장애인이어서 공장에 들어가 일하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었거든요. 한 친구한테 그런 고민을 털어놓으니까 ‘운동한다는 놈이 해보지도 않고 못 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말하더라구요.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았어요. 해보지도 않고 못 한다는 건 운동가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공장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는 공장에 들어가기 위해 팀을 꾸렸다. 이것저것 준비했지만, 아주 기초적인 수준으로 노동법을 공부하는 정도였다. 준비한 뒤 1984년 9월 취업을 위해 구로동으로 향했다. 하지만, 공장에 취업하는 건 쉽지 않았다.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면접은커녕 번번이 공장 정문을 지키는 경비원들에게 막혀 공장은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좌절을 거듭하고 있을 때 당시 속해 있던 조직에서 구로에 있는 봉제공장 부흥사에 ‘꼭 입사해야 한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어떻게 해서든 입사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부흥사로 향했어요. 재단, 봉제, 아이롱(다리미) 가운데 아이롱 업무로 들어가기로 했어요. 공장에 찾아갔는데 처음엔 경비실에서 쫓겨났어요. ‘당신은 이런데서 일하기 힘드니깐 가라’고 하더라구요. 그래도 포기할 순 없어서 세탁소에 가서 아이롱 업무에 대해 대강 듣고서 다음 날 또 갔어요. 한번도 아이롱 업무를 해본 적 없는 ‘쌩초짜’였는데 ‘수년간 아이롱 업무를 해왔고, 팔 힘도 강해서 자신 있다’고 말했어요. 그제야 경비실에서 들여보내 주더라구요.”
우여곡절 끝에 관리자를 만나 면접을 봤다. 하지만, 관리자는 공 이사장을 보자마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가셔라’고 말했다. 그래도 일할 수 있다고 계속 사정을 하자 관리자는 ‘일을 못 한다고 판정될 시 자진 퇴사해야 한다’는 식의 각서를 요구했고, 결국 각서를 쓴 뒤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에서 가정용 다리미 만져본 게 전부인 그에게 공업용 스팀 다리미로 일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아서 금방 내 정체가 들통나겠다 싶었어요. 부서에 배치돼 일하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전전긍긍하다 보니 옆에 있는 동료 노동자들이 도와줬어요. 그 사람들도 딱 보면 거짓말하고 들어온 줄 알잖아요. 왕따시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잘 도와주셨어요. 일을 조금씩 배워갔지만, 너무 힘들었어요. 각서까지 쓰고 들어왔기 때문에 잔업도 일부러 나서서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 보니 한 달 정도는 너무 힘들더라구요. 안 그래도 장애가 있는데, 다리가 너무 아파서 걷기고 힘들 지경이었어요.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면 동료들과 술 한잔도 하는데 그때는 제가 힘들어서 동료들을 피했어요. 끝나면 집에 가서 쉬기 바빴죠.”
하지만, 인간은 적응을 잘하는 동물이다. 도저히 적응하기 힘들 것 같던 아이롱 업무도 한 달이 넘어가자 적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원할 것 같은 전두환의 ‘겨울 공화국’에도 조금씩 봄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1984년 대구와 부산의 택시기사들이 노조를 만들고 사납금 투쟁을 벌이면서 노동운동의 기운이 조금씩 생겨났다. 전두환 정권은 이런 노동운동 흐름을 막기 위해 가혹하게 탄압했지만, 노동자들의 열기를 막을 수 없었다. 1985년 노동쟁의는 265건으로 1984년에 비해 120% 증가했다. 1985년 4월 대우차 부평공장 노동자들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파업은 인천공장, 부산공장으로 퍼져나갔다. 노동자들은 건물을 점거하고,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결국, 파업 10일 만에 임금인상과 근로 조건 개선을 약속받고 파업은 끝이 났다.
부흥사 노동자들과 함께 동참했던 1985년 구로동맹 파업
8명이 구속되는 등 희생이 있었지만, 이날의 승리는 많은 노동자와 현장에 투신한 활동가들에게 희망이 됐다. 공 이사장은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스크럼을 짜고 공장을 돌며 투쟁하는 흑백사진이 활동가 사이에 돌았어요. 저를 비롯해 활동가들이 그 사진을 보며 고무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고무된 열기는 여러 공장으로 퍼져나갔다. 대우그룹 계열의 의류봉제 수출회사인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2차례 투쟁을 통해 임금을 인상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하자 전두환 정권은 와해공작에 나섰다. 1985년 6월 22일 김준용 위원장, 강명자 사무국장, 추재숙 조합원 등이 구속된 것이다. 여기에 각종 민주화운동 단체는 물론 노조들이 연대 투쟁으로 맞섰다. 6월 24일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의 항의 파업을 시작으로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노조가 파업에 동참했다. 6월 25일에는 구로공단의 남성전자, 세진전자, 롬코리아 노동자들이 작업시간 이후 지지농성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공 이사장이 일하던 부흥사 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당시 부흥사에도 노조가 있었어요. 노조는 있었지만, 거의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어용이라기보다는 무능에 가까웠어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도 동맹파업에 동참하려고 노동자들을 설득했어요. 퇴근할 때 일부러 노동자들을 데리고, 투쟁 현장을 지나기도 했어요. 조금씩 마음이 열렸고, 부흥사도 파업에 함께할 수 있었어요.”
6월 27일 부흥사 노조 일부 간부들과 활동가 20여 명이 모여 파업 ‘작전 계획’을 세웠다. 다음날인 28일 부흥사 노동자 120여 명이 출근과 동시에 구속자 석방, 노조 탄압 중지, 근로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투쟁을 시작했다.
“공장 3층에 있던 재단 작업장을 점거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봉제공장은 남자가 적어요. 남성 노동자 8명이 파이프 등으로 무장하고, 작업장을 차지하면서 점거 농성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부흥사 노동자들의 점거투쟁은 오래가지 못했다. 경찰과 회사 관리자, 재단사들이 주축이된 구사대가 난입해 이들의 농성을 폭력 진압했다. 농성하던 부흥사 노동자 120여 명은 전원 연행됐다. 이후 80여 명이 강제사직서를 썼고, 회사는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공 이사장은 또다시 구속됐다.
“다른 노동자들은 1심에서 풀려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는 학생운동을 하다 구속됐던 전력도 있다 보니 괘씸죄에 걸려서 1년 6개월 실형이 나왔어요. 그나마 형을 다 살진 않고, 1년 2개월 정도 갇혀있다가 1986년 8월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어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의 길을 걷게 된 겁니다.”
감옥에서 나온 뒤 시작했던 서울남부지역노동자동맹 활동
그는 서울남부지역노동자동맹(남노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남노련은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에 참여하지 않고, 대중적인 노조결성을 노동운동의 당면목표로 삼고 활동했던 단체다. 교도소에서 출소한지 얼마되지 않았던 그는 노동운동 활동가들을 교육하기 위해 남노련에서 만든 ‘노동자해방사상연구회’에서 교육도 받았다. 1986년 신민당 등이 전국을 순회하며 ‘개헌추진 시도지부 결성대회 및 현판식’을 통해 대중투쟁에 나섰고, 남노련도 그해 10월 ‘민주헌법쟁취 노동자투쟁위원회’를 구성해 동참했다.
“그해 11월쯤이었어요. 현판식이 용산인가 어디서 있다고 해서 우리도 함께했어요. 제가 있던 조에서 맡았던 역할은 현수막을 만들어 행사장으로 가져가는 거였어요. 제작한 현수막을 배에다 묶고 검문을 피해 전달하는 역할이 제게 주어졌어요. 그래서, 밤새 만든 현수막을 배에 묶고 행사장으로 갔어요. 그 뒤에 전달했는지 못했는지 기억이 확실치는 않은데 한 명이 현장에서 잡혀가면서 도망을 가게 됐어요. 당시 누나 집에서 지낼 땐데 누나 집에 전화하니깐, ‘경찰들이 이미 와서 네 방 뒤지고 책도 다 가져갔다. 절대 집에 오면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공 이사장은 경찰이 자신이 이미 누구고, 어디 사는지도 알고 있는 만큼 ‘단선처리’(조직과 연락을 끊는 것)를 한 뒤에 ‘도바리’(수배를 피해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피해 다녔다. 그러다 해를 넘겨 1987년 1월 부천시 원종동에서 붙잡히고 만다. 공 이사장은 자신이 잡힌 시점이 1월 13일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20년 넘게 지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정리한 자료를 확인해보니 1월 12일이었다고 한다.
“원종동에 있던 우리 모임방에 갔어요. 그날은 눈이 와서 조금 일찍 나갔는데, 모임 장소에 도착하니깐 ‘이 새끼 제 발로 기어 들어오네’하면서 사람들이 저를 잡더라구요. 이미 발각이 돼서 오지 말라고 조직에서 저에게 연락하려 했지만, 단선처리가 되는 바람에 실패한 거에요. 나중에 들으니 제가 오는 길목에 사람을 배치해서 연락을 취하려고 했다고 하더라구요.”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갔던 남영동 대공분실 “극한의 공포가 느껴졌어요 물이 차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지만 정말 길게 느껴졌어요 어떻게 하면 공포를 느낄 수 있는지 아는 놈들 같았어요”
그는 잡힌 뒤에도 누구에게 잡힌 건지, 어떤 상황인지 몰랐다. 선배 한 명과 같이 잡힌 공 이사장은 눈이 가려지고, 고개가 짓눌린 채 차에 실렸다. 꼼짝할 수 없는 상태로 차에 갇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를 잡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회사’라고만 이야기할 뿐이었다. 공 이사장은 “아무것도 몰랐고, 한강다리를 건너는 것 같다는 느낌 정도만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컨테이너 같은 건물에 도착했다. 그러자 공 이사장을 잡아 온 그들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기 남영동이야. 지금 여기서 안 불면 5층으로 올라가야 하니깐 빨리 불어.”
그곳은 고문으로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경찰청 산하 대공수사기관이었던 그곳에선 고문기술자였던 이근안 등이 학생, 노동자, 민주화운동가들을 고문하며 공안사건을 조작했던 곳이다. 그곳에 있던 컨테이너 건물에서 진술하지 않으면 조사실이 있는 남영동 대공분실 5층에서 공 이사장을 고문하겠다는 협박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할 수 없었다. 사실 단선처리 후 도망 중이어서 아는 것도 없었다. 결국, 그는 다시 눈이 가려진 채 조사실이 있던 5층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계단으로 끌려갔는지, 엘리베이터를 탄 건지조차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공포를 느꼈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남영동 대공분실은 인간의 공포를 극대화하고, 조사받는 이들의 심리를 위축시키기 위한 공간으로 설계됐다. 조사받는 사람이 이동하는 계단을 나선형 철제 계단으로 만들어 방향감각을 잃게 했다. 조사실 사이의 문들이 서로 마주 보지 않게 해 조사받는 사람들끼리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고문받은 이의 비명과 조사관의 호통 소리가 벽을 타고 전해진다. 5층 조사실엔 욕조와 침대 그리고 조사를 받는 작은 책상이 한 공간에 있다. 다른 층엔 넓은 창이 있지만, 조사실이 있는 5층의 창은 좁게 세로로 만들어져 햇빛도 잘 들지 않았다.
“두 명이 들어와서 저를 욕조 앞에 앉히고, 욕조에 차 있던 물을 다 뺐어요. 그리고, 담배를 하나 주면서 욕조에 물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물이 다 찰 때까지 시간을 줄 테니깐 불어라’하고 말하더라구요. 남노련 중앙에 제 동기들이 2명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어디 있는지 불라는 거였어요. 솔직히 전 아무것도 몰랐거든요. 모른다고 하면서 계속 기다리는데 극한의 공포가 느껴졌어요. 물이 차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지만, 정말 길게 느껴졌어요. 어떻게 하면 공포를 느끼는지 아는 놈들 같았어요. 물이 다 차고 나니 제 손을 뒤로 해서 수갑을 채웠어요. 그리고, 한 놈이 취조를 했고, 한 놈은 제 머리를 물에 집어넣으며 고문을 했어요. 아마도 이근안이었던 것 같은데 공포가 크니 얼굴을 기억하고 그럴 상황이 아니었어요. 머리를 물에 처박고 고문하다 보면 숨이 차다가 뒤로 나자빠져요. 그러면 제 몸을 다시 일으켜서 불라고 강요하고, 안 하면 또 고문하고 그렇게 반복됐어요. 그렇게 여러 차례 반복되니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요. 전에 성북경찰서에 검거됐을 때도 맞으면서 조사받고 했었는데, 그런 것 하곤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이었어요.”
24시간 넘게 그는 버텼다. 하지만 고문이 이어지면서 그는 무어라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만날 약속 장소를 거짓말로 꾸며서 이야기하기로 한 것이다. 아무리 거짓말이지만, 동기들과 자주 만나던 곳을 이야기하면 혹시나 우연으로라도 잡혀갈까 하는 걱정에 그는 동기들과 자주 만나던 개봉동 쪽이 아닌 자신의 모교인 우신고 동창들과 자주 만나던 약속 장소인 영등포 연흥극장 밑에 있던 다방에서 다음날 5시에 보기로 했다고 거짓 자백을 했다. 그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이 새끼 거짓말치네’라며 이번엔 그의 온몸을 욕조에 넣었고, 다시 고문이 이어졌다. 공 이사장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내가 뱉은 말을 번복하면 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처음에 한 말이 사실이라고 계속 주장했어요”라고 했다. 그의 주장이 계속되자 고문을 멈추고, 그제야 공 이사장의 말을 믿었다.
순간의 거짓말로 고문은 멈췄지만, 그때부터 또 다른 공포가 시작됐다. 그가 거짓으로 불었던 약속시간은 바로 다음 날이었고, 하루가 지나 거짓말이 발각되면 이번엔 어떤 고문이 이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문하던 사람들이 모두 조사실을 떠난 뒤 그는 혼자 남겨졌다. 공포 속에서도 시간은 흘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불안감과 공포는 더욱 커졌고 그의 눈에 조사실 창문이 들어왔다.
“그 순간 알게 됐어요. 5층 조사실 창문이 왜 세로로 좁게 만들어진 건지. 자살 충동이랄까. 창문을 보는 순간 계속됐던 고문이 떠오르면서 창밖으로 몸을 던지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창이 조금만 더 커서 내 몸이 통과할 수 있는 크기였다면 정말로 몸을 던졌을지도 몰라요. 이놈들이 죽지도 못하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종철 열사 때문에 살 수 있었어요 제가 죽을 수도 있었거든요”
공포와 불안 속에서 하루가 지났다. 거짓으로 말한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공포는 더욱 커졌다. 거짓말은 곧 발각될 것이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은 이미 지난 것 같았고, 밖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가끔 들리긴 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고도의 심리전을 펼친다더니 이게 그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날 밤 그는 남영동 인근 남대문경찰서로 옮겨졌다. 그때부터 낮에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밤에는 남대문경찰서로 이동해 잠을 잤다. 남대문경찰서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남영동에서 학생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남영동 대공분실 5층에서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겁니다. 박종철 열사가 사망하자 저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을 강도 높게 조사할 수가 없었던 거고, 밤에는 경찰서로 보내 재우기로 한 모양이에요. 저는 박종철 열사 때문에 살 수 있었어요. 제가 죽을 수도 있었거든요.”
공 이사장은 1987년 1월 13일 남영동 대공분실에 왔고, 박종철 열사는 다음날인 14일에 와서 조사를 받다 사망했다. 공 이사장에겐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깊은 부채감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주어진 값진 삶을 허투루 보낼 순 없었다. 공안세력은 그에게 반성문을 강요했지만, 끝까지 거부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뒤도 싸움을 계속하다 빛조차 안 드는 징벌방인 ‘먹방’에 갇히기도 했고, 끝내 부산구치소로 이감됐다.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그는 1987년 6월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감옥에 갇힌 채 맞이했다. 당시 감옥에서 잡지에 실린 사진을 통해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수십만 명의 인파가 참여해 서울시청 광장을 가득 채운 모습을 만났을 때 그는 가슴이 뜨거웠다고 했다. 거리엔 민주화의 열기가 가득했다. 곧 풀려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해를 넘길 때까지 그는 감옥에 갇혀있었다. 6.29 선언 1주년을 맞아 가석방을 기대해 짐까지 쌌지만, 풀려나지 못했다. 결국, 부산구치소에서 마산교도소로 이감된 뒤 1988년 8월 15일 가석방됐다.
“감옥에서 나온 뒤 몸이 많이 상했어요. 그래서 조직 활동보다는 좀 더 대중적인 활동을 하겠다는 생각에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소개받아 노동자 교육 사업을 했어요. 그러다 1991년 경기도 안산으로 내려갔어요. 제가 안산으로 갈 때만 해도 혈혈단신이었어요. 그래서 서울에 있던 동지들이 우려를 많이 했어요. 혼자 내버려 두면 운동 그만둘 거라면서 말리는 이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의지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마음이었거든요. 그러다 혼자서는 힘들겠다는 생각에 조직이랑 ‘선’을 연결해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톨릭 노동사목’을 소개받아 공개적인 활동은 거기서 했고, 조직활동을 함께했던 이들도 만났구요. 당시 자민통 운동 진영에선 ‘산개론’이라고 각자 흩어져 공장에 들어가는 등 개별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함께 모여 투쟁해보자는 제안이 있었고, ‘한벗노동자회’라는 이름으로 단체를 꾸렸어요,”
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 정책실장을 맡아 금속노조를 만들어 산별노조의 첫발을 이끌다
‘한벗노동자회’를 통해 노동운동과 함께 지역운동을 펼쳤다. 1992년엔 민주대연합 노선을 따라 민주당 김대중 후보 당선을 위해 뛰기도 했다. 공 이사장은 “밤낮없이 뛰었어요. 민주당보다 우리가 지역에선 더 열심히 뛰었거든요. 제가 오토바이를 몰고 다녔는데, 오토바이를 타면서도 졸 수 있구나하는 아찔한 경험까지 했어요”라고 말했다. 이후 농산물 개방을 요구했던 우르과이라운드 저지 투쟁 등을 벌이며 지역 활동을 이어갔다.
1997년 그는 자동차연맹에서 간부로 활동을 시작했다. 기아자동차, 쌍용자동차,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이 모여서 만든 조직이었다. 그가 활동을 시작한 1997년부터 민주금속연맹, 자동자연맹, 현총련 3개 조직의 통합 논의가 본격화됐다. 이듬해인 1998년 2월 15일 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이 출범했고, 단병호가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IMF 구제금융 시기를 거치며 정리해고 때문에 줄었지만, 출범 당시 조합원은 20만 명에 이르렀다.
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은 2000년 열린 대의원대회에서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전환을 공식결정했다. 당시 위원장은 문성현이었고, 공 이사장은 정책실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정부가 주도해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등 노동자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기업별 노조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었고, 공 이사장은 문성현 위원장과 함께 전국을 돌며 당시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산별노조를 알렸다. 그리고, 2001년 2월 8일 산업별 노동조합인 전국금속노동조합이 공식 출범했다.
“근데, 금속노조가 산별노조로 출발하자마자 시화로 내려왔어요. 원래 산별 전환되기 1년 전에 정책실장을 맡으면서도 1년만 활동하고, 시화공단 개척을 위해 내려가겠다고 했었거든요.”
“당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통합’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결국 당은 깨졌고, 너무 아쉬웠어요”
공 이사장은 시화노동정책연구소를 통해 무료노동법률상담, 노동법률학교, 노동조합 지지·지원 활동, 시화공단지역의 노동정책생산 등에 나섰다. 지역 노동자들과 함께 민주노동당 시흥시위원회를 만들고 위원장을 맡는 등 진보정치 활동에도 임했다. 그렇게 지역에서 활동하던 그는 2004년 민주노동당 원내진출 이후 꾸려진 1기 최고위원회 산하에서 사무부총장을 맡으며 진보정당 당직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2기 최고위에선 정책위 부의장을 맡았다.
“당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통합’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소위 NL 정파의 추천으로 당직을 맡았지만, 통합을 위해 정파적으로 운영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일부러라도 PD쪽에 대해서도 배려를 많이 하고 그랬었죠. 정책위 부의장을 맡았을 때 소위 PD쪽 연구원들이 처음엔 저를 굉장히 무시하거나 불손한 태도로 대했어요. 그래도 통합적 운영을 위해 노력하다보니 조금씩 마음을 열더라구요. 그런 노력에도 결국 당은 깨졌고, 너무 아쉬웠어요.”
2008년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는 그에게 아프게 다가왔다. 같이 활동하던 동지들을 ‘종북’으로 몰아세운 것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그가 민주노동당에 남아 비상대책위 활동 등을 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비대위에서 사무처장으로 임명된 공 이사장은 그해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선거대책위원회 상황실장을 맡아 당 살림을 책임졌다. 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과 비교해 절반으로 줄어든 5석에 그쳤지만, 최악의 결과를 피하면서 분당 위기를 어느 정도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과정에서 지적됐던 ‘패권주의’와 관련해선 그는 지금도 반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패권주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통합주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당에 갔는데, 제가 사무부총장으로서 또는 정책위 부의장으로서 이렇게 운영되는 걸 볼 때 그렇지 못했던 부분도 많았다고 느꼈거든요. 결과적으로 상대 진영이 자괴감을 느끼게 한 건 너무 아쉬워요.”
“솔직히 진보진영이 전체가 합쳐도 될까 말까 한 상황인데 현재로선 교섭단체는커녕 생존을 위해 발악하는 단계잖아요”
2012년 통합진보당 분당 과정에서도 그는 비슷한 아쉬움을 느꼈다. 당시 공 이사장은 금속노조 노동연구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2008년 총선 직후 금속노조 초대 노동연구원장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 한참 전부터 금속노조 정갑득 위원장이 연구원장 제안을 했었어요. 당시엔 지금 당장 민주노동당 활동을 그만두기 힘들다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던 거에요”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2012년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은 13석을 얻었지만, 극심한 내분에 시달렸다.
“사실 국민참여당과의 합당에 반대했었어요. 하지만, 기왕 통합진보당이 출범한 만큼 잘되길 기원했습니다. 하지만, 선거 결과를 두고 국민참여계가 불만이 많았어요. 어찌 되었든 통합을 이룬 만큼 특정 세력이 독식하는 식의 결과는 피하는 게 좋았다고 봅니다.”
또다시 당은 갈라지고 말았다. 통합진보당의 선택을 두고 공 이사장은 아쉬움이 많았지만, 당에 남았다. 불만은 있었지만, 당시 통합진보당이 공안세력의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 탈당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2014년 박근혜 정권에 의해 해산당할 때까지 그는 통합진보당과 함께했다. 통합진보당이 해산된 지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진보운동이 분열했던 과거를 두고 짙은 아쉬움이 남는다.
“저는 정파를 인정하는 편이에요. 선의의 경쟁은 좋아요. 하지만, 정파 대립이 극에 달하고, 정파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가면 망할 수밖에 없어요. 진보운동이 서로 싸워서 잘된 적이 없거든요. 통합진보당은 결국 해산까지 갔고, 정의당은 정의당대로 국민참여당 세력과 색깔 없이 10년을 함께하다 드디어 한계가 왔어요. 최근 진보당도 보궐선거에서 강성희 의원이 당선되면서 부활을 기대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잖아요. 솔직히 진보진영이 전체가 합쳐도 될까 말까 한 상황인데, 현재로선 교섭단체는커녕 생존을 위해 발악하는 단계잖아요.”
윤석열 정권이 노동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있는 지금 진보정당의 암담한 현실은 그를 안타깝게 한다. 어쩌면 윤석열 정권이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을 대놓고 공격할 수 있는 건 진보정치 세력의 분열로 약해진 노동자 정치의 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2000년 금속산업연맹 정책실장으로서 전국을 돌며 조합원들에게 단일노조 산별노조를 호소했고, 이후 민주노동당과 금속노조에서 정책을 연구하며 뛰어왔던 건 노동자가 주인되는 정치,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노동진영도, 진보정당도 이런 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그는 걱정스럽다. 지난 2019년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홈페이지에 올린 칼럼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산별노조는 공장의 벽을 넘어 산업별로 뭉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산업의 벽을 넘어 전체 노동자의 하나됨을 지향하며, 그 하나된 힘을 무기로 자본중심의 세상을 노동중심의 세상으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현재의 금속노조는 산업의 벽을 넘으려 하기 보다는 그 안에 갇혀있으며, 노동중심 세상건설이라는 과제는 멀리한 채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진보정당에게 중요한 건 계급적 기반이에요 노동을 기반으로 계급적 색채를 분명히 하면서 진보정당의 외연을 넓혀야 합니다 옛날 민주노동당처럼 가야 해요”
그는 진보진영에 연구자들이 부족하고, 진보진영 연구소들은 정당과 노동조합을 막론하고 연구 분야에 대한 투자가 인색했다는 지적도 했다. 이렇게 진보진영이 정책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하면서 정국을 주도하는 힘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이슈 가운데 진보정당이나 민주노총 등 노동진영이 주도하는 이슈가 별로 안 보여요. 민주당 또는 국민의힘이 하는 걸 반대하거나, 거기에 올라타 함께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어요, 그런 구도에 빠져서 진보당도, 정의당도 허우적대고 있다고 봅니다. 최근 오염수 문제에 진보당과 정의당도 모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데, 물론 국민의 건강권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지만, 우리가 주도하려면 우리만의 대안도 필요하고, 정책도 필요한데 잘 보이지 않아요.”
그는 진보정치가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마음먹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진영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정의당 내부에선 당의 진로를 두고 여러 의견이 오가고 있는 가운데 그는 ‘노동중심의 진보정당’을 주장하고 있다. 공 이사장은 “현재 진보정당은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처럼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 하지만, 진보정당에게 중요한 건 계급적 기반이고, 그 기반이 바로 노동이에요. 노동을 기반으로 계급적 색채를 분명히 하면서 진보정당의 외연을 넓혀야 합니다. 옛날 민주노동당처럼 가야 해요”라고 강조했다.
지난 5월 11일 ‘정당과 노동은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하는 제목으로 열린 정의당 내부 토론회에서 공 이사장은 “이제 몰계급적 연대가 아닌 계급성, 당파성을 가미한 연대를 추진해야 한다. 이런 연대를 바탕으로 조직되지 못한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나서서 민주노총 등 조직노동자를 포함한 다수자연합, 광범위한 계급연합을 형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정치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의회중심주의 전술을 버리고, 거대한 소수전략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 지역의 활동을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자산으로 삼아 다시 활성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그는 쉽진 않지만, 진보정치 세력의 단결을 여전히 꿈꾸고 있다. 지난 2017년 정의당에 입당했을 때에도 정의당 내부에서 진보정치 세력의 통합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바람에서였다. 하지만, 현실의 벽이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의당과 진보당 모두 준비가 안 돼 있어요. 정의당과 진보당 모두 서로에게 앙금이 남아있어요. 서로 인정할 건 인정하고, 반성할 건 반성하는 등 함께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해요”라고 강조했다.
“제 나이에 맞는 영역에 도전해보려구요 저는 생애 주기에 맞춰 진보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공 이사장은 인터뷰 내내 열변을 토해냈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3시간을 훌쩍 넘겨 1시 30분까지 이어졌다. 그는 애환 많은 ‘58년 개띠’다. 7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열정으로 가득하다. 나이가 들면서 시화노동정책연구소 관련 일은 후배들에게 조금씩 넘기고, 그는 새로운 준비를 하고 있고, 이를 위해 사회복지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끝으로 이렇게 말했다.
“제 나이에 맞는 영역에 도전해보려구요. 저는 생애 주기에 맞춰 진보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곧 70대가 되는 만큼 노인 복지와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어요. 제가 지금 사회적협동조합 품마을 상임이사로 있는데, 그게 원래 장노년층 일자리를 위한 사업이거든요. 좀 더 그런 부분에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장애인 운동과 관련한 활동도 할 생각입니다. 저도 장애인이지만, 그동안은 제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장애인 운동은 안 했거든요. 늘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같은 장애인 활동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어요. 그런 활동도 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노동운동도 주도하진 못해도, 가끔씩 훈수 두는 정도로 끼어들긴 해야죠. 또 진보정당 운동 등 세상을 바꾸는 일도 게을리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나이에 맞게 열심히 뛰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