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해상 정몽윤 회장의 아들 정경선 씨가 싱가포르에서 만든 사모펀드 운용사가 복잡한 소유관계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된 싱가포르 법인들은 페이퍼컴퍼니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부당 지원’ 의혹을 받는 에이치지이니셔티브 매각 대금이 이곳으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싱가포르는 낮은 법인세율, 적은 기업 규제 때문에 그간 조세회피·자산 유출의 통로 역할을 해왔다.
6일 민중의소리 취재를 종합하면 정 씨는 현재 싱가포르에 기반을 둔 '실반그룹'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정 씨는 앞서 2014년 벤처투자사인 '에이치지이니셔티브(HGI)'를 설립해 경제적 가치와 함께 사회적 가치를 함께 고려하는, 이른바 '임팩트 투자'를 내세운 투자 활동을 해왔다.
정 씨는 미국 콜럼비아대 MBA(경영전문대학원)를 졸업한 2019년 이후 점차 싱가포르로 활동 기반을 옮겼다. 2020년 HGI 대표이사에서 사임한 뒤 이사회 의장으로 직함을 바꾸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2022년에는 HGI에서 ESG컨설팅을 맡고 있는 HGI파트너스를 설립 6개월 만에 해산하고, 해당 회사의 기능과 직원을 실반그룹 산하의 '지속가능성연구소(SLL)'로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정 씨가 국내에서 운영하던 HGI 또한 올해 5월 현대해상의 계열사인 현대씨앤알(C&R)이 222억원여원에 인수하면서 정 씨는 HGI에서 완전히 손을 뗀 상태가 됐다. 정 씨는 지난해 5월 기준으로 HGI 지분 64%(125만3043주)를 소유하고 있었다. 해당 지분을 현대씨앤알에 팔아넘기면서 약 140억원의 현금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회사 밑에 회사'...복잡한 소유 구조 뒤에 숨은 정경선
정경선 씨는 싱가포르에서 HGI와 마찬가지로 '임팩트 투자'를 내세운 펀드를 모집했다. 정씨가 싱가포르에 설립한 투자사 '실반캐피탈메니지먼트'(이하 실반캐피탈)가 운용한다.
실반캐피탈은 소유관계가 복잡하다. 현대해상 대기업집단 현황공시에 따르면 2021년 5월 기준 실반캐피탈은 또다른 싱가포르 법인인 '삼라홀딩스(SAMRA HOLDINGS)'가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었다.
최근 ‘민중의소리’가 싱가포르 회계·기업감시국(ARCA) 자료를 확인한 결과 실반캐피탈을 소유한 삼라홀딩스는 'MSKTT'라는 또다른 싱가포르 법인이 지분 91%를 가지고 있다. 정경선씨는 이 MSKTT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다. 실반캐피탈-삼라홀딩스-MSKTT-정경선으로 이어지는 소유구조다.
최근에는 여기에 법인 하나가 추가됐다. 2022년 말 기준 삼라홀딩스 대주주는 MSKTT가 아니다. MSKTT 보유지분은 19%로 줄었다. 보유했던 삼라홀딩스 지분 71%는 또다른 싱가포르 투자사 TSG SG가 매입했다.
정경선씨가 세운 실반캐피탈을 소유한 삼라홀딩스의 최대주주로 올라선 투자사 TSG SG 최대주주는 한국인 전 모 씨다. 전 씨는 정경선 씨와 컬럼비아대 MBA 과정 동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 씨는 정경선 씨와 실반캐피탈을 설립했으며 현재 실반캐피탈 등기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결국, 정 씨를 중심으로 실반캐피탈 소유 법인과 관계자들이 얽히고 설킨 모양새다. 복잡한 소유 구조는 각각의 법인과 거래 과정에서 회계적 불투명성이 커질 우려가 있다.
전 씨가 무슨 돈으로 MSKTT의 삼라홀딩스 보유 지분을 매입한 것인지는 파악되지 않았다. 정경선 씨와 전 씨가 펀드 투자·운영을 겸하는 단순 동업 관계일 수 있지만, 전 씨가 정경선 씨 지분을 차명으로 보유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는 "마치 자금을 세탁하듯 소유지분 관계를 세탁하는 것처럼 보인다"며 “펀드를 실제 운용하고 있다면, 회사 밑에 회사가 있고 또 밑에 회사가 있는 구조라 투자 실패에 대한 책임 소재도 불투명해 투자자 피해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반캐피탈을 둘러싼 싱가포르 법인들은 같은날 일제히 설립됐고 이후 이름을 바꿨다. 앞서 설명한 정 씨 관련 싱가포르 법인은 모두 2019년 9월 25일 같은 날 설립된 것으로 파악됐다. 실반캐피탈, MSKTT, TSG SG는 각각 현재와 다른 법인명으로 설립됐다가 2020년에서 2022년 사이 순차적으로 현재의 법인명으로 변경됐다.
특히 정 씨가 소유한 MSKTT는 국내에서 운영하던 에이치지이니셔티브(HGI)의 이름을 딴 'HG이니셔티브 아시아'로 최초 설립됐다. 같은 날 설립된 삼라홀딩스만 설립 당시 법인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TSG SG 사무실 주소는 싱가포르 업무지구의 한 컨설팅 회사 주소와 동일하다. 해당 주소는 L모 컨설팅 회사 주소로, 싱가포르에서 법인 설립 컨설팅을 제공하는 곳이다. L모사 대표인 한국인 이 씨는 실반그룹과 관련된 싱가포르 법인 중 일부에 등기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이 씨 주소는 삼라홀딩스 사무실 주소와 동일하다. 박상인 교수는 "관련 법인들이 페이퍼컴퍼니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현대해상 계열사 등 통해 마련한 자금은 어디로?
정 씨가 HGI를 매각하고 현대씨앤알로부터 받은 자금 등 현대해상, 혹은 정몽윤 회장의 자산이 우회적으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반그룹은 2020년부터 2,000억원 규모의 '실반 아시아 성장 펀드 I'(Sylvan Asia Growth Fund I)를 모집했다. 실반그룹의 펀드는 블라인드 펀드로 모집 단계에서 투자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신생 투자사가 '임팩트 투자'를 테마로 2,000억원대의 펀드를 모집한 것이다.
펀드를 모집할 당시인 2021년에서 2022년 사이 정 씨는 자신의 현대해상 주식과 아버지 정몽윤 회장이 보유한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알려진 것만 2021년, 2022년 각각 230억여원이다.
당시 재계에선 정 씨가 대출로 마련한 자금으로 지분 확대에 나설 것이라 예상했으나, 정 씨는 현대해상 지분을 0.05%(5만주) 늘리는 데 그쳤다. 당시 주가(주당 21,900원)를 고려하면 약 10억원 규모다. 나머지 자금의 용처는 확인되지 않았다.
최근 HGI 매각으로 현대씨앤알로부터 받은 140억원에 대한 용처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이 자금이 싱가포르 법인에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조세 포탈 등을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박상인 교수는 “국내에선 각종 법률로 계열사와 거래, 자금 이동 등이 규제를 받으니 해외 법인을 통해 규제를 우회하려는 재벌의 시도는 꾸준히 있어왔다"고 지적했다.
HGI를 인수한 현대씨앤알 측은 "HGI 주주가 정경선 대표만 있었던 게 아니고 여러 주주가 있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치른 인수대금을 어디에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