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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그냥 김문수를 총살 시키자

이 칼럼을 통해 한 번 밝힌 바가 있는데, 나는 사형제에 단호히 반대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누구를 미워해도 절대 “그를 사형시키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단호한 합의가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그렇지 못한 사회보다 더 옳은 사회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고용노동부장관으로 임명된 김문수를 매우 꼴같잖게 생각하지만 그를 향해 “너 같은 놈은 총살시켜야 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김문수는 그럴 정도의 비중이 있는 인물도 아니다. 내가 한 평생 사용하지 않을 것 같았던 ‘총살’이라는 단어를 굳이 누군가에게 써야 한다면 최소 전두환쯤은 돼야지, 그 찌질한 배신자가 뭐라고 그에게 총살을 운운하겠나?

그런데 이 사회는 나 같은 사형 반대론자에게조차 “김문수를 총살시키자”라는 말을 하도록 만든다. 이 문제는 실제 그를 총살시켜야 하느냐 마느냐는 논쟁이 아니다. 한 나라의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의 논리 구조가 얼마나 개떡 같은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이 개떡 같은 감수성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 총살이라는 단어는 김문수가 먼저 사용한 것이었다. 2019년인가? 국민의힘 전신인 한국당 토론회에서 김문수가 박근혜, 이명박을 옹호하며 “문재인은 총살감이지”라고 발언을 한 것이다.

하도 말의 앞뒤를 다 잘라먹고 문제가 될 법한 부분만 강조한다고, 그래서 말의 전체 맥락을 보지 않는다고 국민의힘 의원들이 지랄들을 하시기에 그 토론회 영상을 꾹 참고 다 지켜봤다. 말의 앞뒤 맥락을 다 붙여보면 이렇다.

일단 김문수가 그런다. “나는 적어도 박근혜가 나보다 더 깨끗한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그 사람은 돈을 받을 이유도 없고 돈을 받아서 쓸 데도 없다. 박근혜는 자식이 없는데 무슨 뇌물을 받겠나?”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박근혜에게 22년, 이명박에게 17년 형을 내렸는데 그러면 문재인은 총살감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막말 내용과는 별개로 내가 저 발언을 들으며 짜증이 폭발했던 것은 그의 감수성이 너무 후지고 개떡 같았기 때문이었다. 첫째, 김문수는 박근혜가 뇌물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논거가 그가 자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김문수는 저런 말이 얼마나 비혼주의자들을 차별하고 상처를 주는 말인지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 결혼을 안 하고 자식을 안 가지면 돈을 쓸 데가 없냐? 그게 뇌물을 안 받는다는 논거가 되면, 결혼도 하고 자식도 있는 김문수 너는 뇌물 엄청 받아 처먹겠네?

어떤 종류의 차별에도 반대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비혼주의자들에 대한 저런 감수성은 정말로 어이없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아무리 박근혜를 미워했어도 “결혼도 안 해본 여자가 무슨~”이라거나 혹은 “아이도 안 가져본 여자가 어찌~” 이런 식의 발언을 결코 하지 않는다. 발언을 하지 않는 것을 떠나 그런 발언을 하는 사람과 단호히 맞선다.

이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고, 인간의 평등을 믿는 사람들의 기본자세라고 믿는다. 그런데 김문수는 꼴에 박근혜를 옹호한답시고 “자식이 없는데 돈 쓸 데가 어디 있냐?” 뭐 이런 개떡 같은 감수성을 막 쏟아낸다. 주둥이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아는 모양이다.

둘째, 인신구속형과 생명형을 바로 등가교환하는 생명에 대한 개떡 같은 감수성이다. “박근혜에게 22년, 이명박에게 17년 형을 내렸는데 그러면 문재인은 총살감이다”라는 말을 잘 뜯어보라.

이 막말의 저열함이야 지적하면 입만 아프다만, 적어도 이 문장이 최소한의 논리를 가지려면 “박근혜에게 22년, 이명박에게 17년 형을 내렸는데 그러면 문재인은 무기징역감이다”라고 말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인신구속형의 경중을 다뤄야 할 문제에서 총살형이 나온다.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이 3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정진석 비서실장의 윤석열 대통령 정무직 인선 브리핑을 듣고 있다. 2024.07.31. ⓒ뉴시스

이게 왜 문제냐? 우리가 사형제의 찬반을 다룰 때에도 최소한 사형제를 남발하지 않아야 한다는 합의는 갖고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 나는 사형제에 반대하는 사람이지만, 사형제를 찬성하는 사람도 “저 새끼는 돈을 훔쳤으니까 죽여야 해” 이런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그런데 김문수는 “사람을 총살시키자”는 말을 너무나 태연히,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표정으로 내뱉는다. 이런 개떡 같은 감수성이 통용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너무나 허망한 이유로 사람이 죽는 것을 용인하게 된다. 1년에 2,000명의 노동자가 노동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데 “그게 뭐 대수냐? 경쟁에서 졌으면 죽는 거지” 뭐 이런 이야기들이 거침없이 나오게 된다는 거다.

사상의 자유 같은 소리 하고 있다

더 웃긴 대목이 있다. 김문수를 옹호하는 국민의힘 측 논리가 “사상의 자유를 인정해 줘야 한다”는 것이라는 점이다. “상대를 총살시키자”는 게 사상의 자유인가? 이게 사상의 자유라면 내가 “김문수를 총살시키자”고 주장해도 사상의 자유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래도 되냐? 아예 김문수, 윤석열, 김건희를 모두 일렬로 쭉 세워놓고 총으로 빵빵 갈겨버리자고 주장해도 되냐고?

당연히 안 된다. 왜 안 되냐? 우리가 상대의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려면 최소한 상대의 사상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사회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가 자신의 명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제시한 ‘관용의 딜레마’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상대의 사상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상대가 “나는 다른 놈들의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아”라고 주장하다면 그 사상의 자유를 존중해야 할까? 그래서는 안 된다. 그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는 순간 ‘사람이 갖는 사상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퍼는 “아무 제약 없는 관용은 반드시 관용의 소멸을 불러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용의 이름으로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the right not to tolerate intolerance)를 천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대를 존중하는 관용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관용하지 않는 자들을 관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상대를 총살시키자”고 주장하는 자들을 관용할 수 있나? 당연히 안 된다. 상대를 총살시키겠다는 것은 죽여 없애겠다는 건데, 이걸 관용하면 우리는 서로를 절대 관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김문수의 저딴 생각을 사상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관용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만약 이게 무너진다면 우리 사회는 내가 “김문수 그 새끼는 총살시켜버려야 해”라고 주장하는 것조차 아무 문제를 삼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바람직한 사회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는 우리 사회가 최소한의 상식과 도덕, 그리고 논리로 무장한 사회이기를 바라지 아무리 김문수 같은 또라이를 향해서라도 “저런 새끼는 총살시켜야 해”라고 선동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김문수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 저 개떡 같은 감수성에다가 맘에 안 들면 총으로 쏴 죽여도 괜찮다는 반사회적 사상을 가진 소유자는 이 사회에서 격리해야 한다. 김문수는 고용노동부 장관 같은 헛소리 작작하고 제발 이 사회에서 멀리 떨어져 살기 바란다. 아무리 살펴봐도 김문수에게 필요한 것은 취업이 아니라 치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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