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십 평생에 처음 겪어보는 더위라고 하셨다. 유례없이 긴 폭염에 어르신들도 당황스럽다고 하셨다. 여름은 더워야 제맛이라지만 습기를 머금은 폭염은 참기 힘들었다. 해 뜨기 전 이른 새벽 밭일에 나섰어도 소용없었다. 아직은 어둑한데 호미질 몇 번에 땀으로 샤워하기 일쑤였다. 부리나케 새벽일을 마친 정00 어르신은 ‘책가방’을 챙기고 학교 갈 채비를 서둘렀다. 공부하러 학교 간다는 생각에 전날부터 들뜨고 설렜다고 한다. ‘사람을 찜쪄먹고도 남을’ 더위지만, 묘량중앙초등학교에서 열리는 ‘청춘 교실’에 가는 발걸음은 10대 소녀만큼이나 발랄하고 경쾌하다.
호미 잡던 손으로 연필 잡으니 이렇게나 좋아!
영광군 묘량면에 유일하게 남은 학교인 ‘묘량중앙초등학교’는 올해 처음으로 어르신들이 학생으로 참여하는 여름학교를 열었다. 학교 건물 개방의 수준을 넘어 학교가 보유한 교육자원들(인력, 교육과정 등)을 마을과 나누려는 적극적인 노력이다. 여름 방학 동안 한글, 미술, 스마트폰 활용, 가야금 등 총 4개 과목을 개설했다. 각 수업의 강사로는 학교 교사들과 방과후 강사들이 직접 나섰다. 교육과정 라인업은 완성했으나 ‘이동’이 문제였다. 통학버스를 운영할 수 없으니 다른 수단을 고민해야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운 시골 형편에 ‘이동권’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계획 자체가 무산된다. 뾰족한 방법이 없던 차에 마을이 나섰다. 하루 두 번 승합차를 이용해 어르신들의 안전한 등하교를 ‘여민동락’이 책임졌다. 학교와 마을의 협력은 자연스러웠고 묘량면에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배움의 장이 열렸다. 2012년 폐교 위기 극복 이후,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을 학교와 마을이 함께 하는 ‘지역사회운동’으로 전환시키며 꾸준히 연계 협력을 강화해 온 덕분이었다. 이렇게 개교한 이번 여름학교의 이름은 ‘꽃보다 청춘 교실’이다.
어르신들의 호응은 폭발적이었다. 도시 사는 자녀들에게 전화해 “엄마도 학교에 다닌다”고 자랑을 하셨다는 어르신, 다 늙어서 무슨 공부인가 싶었는데 학교 선생님이 한글을 가르쳐주니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며 뿌듯해하는 어르신, 손가락 끝에 물집이 잡히고 쓰라려도 가야금 수업이 신기하고 재밌어서 아픈 줄 모르겠다는 어르신, 자녀들과 ‘카톡’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신나고 좋다는 어르신, 평생 호미만 잡고 살았지 연필 잡고 공책에 글을 쓸 날이 올 줄은 몰랐다는 어르신, 학교에서 받은 교재를 밤새 쳐다보고 쓰다듬다가 ‘책보’에 고이 싸놨다는 어르신 등.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청춘 교실 학생들의 행복한 표정을 ‘수료식’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르신들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과 보릿고개를 넘어오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평생 농사일로 자식들 건사하며 악착같이 살다 보니 구십이 가까운 나이가 되어 버렸다. 평균 60년 이상 경력을 자랑하는 어르신들은 어마어마한 지식과 경험을 보유한 농사 전문가들이다. 청춘 교실 수료증은 살아있는 ‘농사 문화재’, 걸어 다니는 ‘도서관’, 지식과 경험의 유산이 가득한 ‘박물관’으로 불리어도 손색없는 마을 어르신들께 바치는 헌사이다.
청춘 교실이 예고하는 시골 학교의 미래
수료장을 받은 어르신들은 청춘 교실이 지속되기를 원하셨다. 한글을 계속 배워 편지를 쓸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내친김에 영어도 배워보고 싶다고 하셨다. 늘그막에 배움이 이렇게 즐겁고 재미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또 학교를 열어준다면 무조건 참여하시겠단다. 돌아오는 겨울 방학에 청춘 교실 시즌2를 열기로 약속했다.
본디 교육은 지역공동체의 의무였다. 국권을 찬탈당한 망국의 현실에서도,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학교부터 세우고 보는 게 우리 민족이었다. 교육과 삶이 동기화된 시대에는 온 마을이 배움터였고, 서로 배우며 모두가 학생이고 스승이었다. 20세기 근대화 이후 학교는 지역으로부터 괴리되고 교육은 삶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경제위기와 생태위기가 중첩된 파멸적인 위기 앞에서 기존 패러다임을 고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근대 학교 교육의 유효기간은 지났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삶과 동떨어져 ‘성찰의 힘’을 잃어버린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마을’이 호출되었다. 대한민국 교육은 학교의 전유물에서 지역공동체의 의무로, 지식 중심에서 역량 중심으로, 획일화에서 다양화로, 표준화에서 개별화로, 국가교육에서 지역교육으로 전환을 시도 중이다.
자연스럽게 학교의 기능과 역할을 ‘지역성’을 중심으로 재구조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 농촌 마을에서 학교는 단순히 아이들을 교육하는 기관을 넘어서는 사회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농촌은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사회 인프라가 붕괴 지경에 이르렀고 지속 가능한 삶터로서의 기능을 대부분 상실하였다. 학교는 시골 마을에 남은 거의 유일한 사회 문화적 자산이다. 오늘날 ‘지역교육력’1) 향상은 지역사회 지속가능한 발전의 핵심 키워드이다. 로컬 지향의 시대, 학교는 ‘지역공동체 강화’라는 지향점을 분명히 하며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배움의 요람이자 지역주민의 평생 학습터, 문화의 아궁이로 역할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학교와 지역을 분리하는 단절된 시각에서 탈피해 ‘지역 속의 학교’ ‘지역교육력의 핵심 구성 부분으로 기능하는 학교’ ‘지역사회 문제 해결에 참여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2) 독점적이고 관료적인 근대 학교 교육 모델에서 탈피해 마을 기반의 협력적 지역교육네트워크로 학교가 기능해야 한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생애주기별로 배움과 돌봄이 가능한 ‘평생학습마을’을 만드는데, 지역교육력의 핵심 자원인 학교를 빼놓고 논할 수는 없다. 만약 ‘미래 교육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미래를 만드는 ‘오늘의 교육’이라고 답할 것이다. ‘꽃보다 청춘 교실’은 미래 학교의 예고편이다. 이와 같은 시도를 중단하지 않는 한, 학교와 마을이 협력하고 작당하는 일들이 많아지는 한, 미래는 이미 ‘오늘’에 속한 것이다.
필자주
1)일본교육학회(2017)『일본의 지역교육력』 학지사 17쪽 “지역교육력의 개념과 관련하여 이라이 이쿠오는 ‘지역은 그곳에 살고 있는 아동의 인간 형성에 미치는 영향력’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때 지역이란 지역적 특성으로서 ‘시간적’ 전통과 ‘공간적’ 개념 뿐만 아니라, 원로와 어른 등 ‘인간적’ 요소를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 지역교육력은 ‘학교교육’과 대구를 이루는, 즉 학교교육력을 제외한 교육적 힘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지역교육력은 학교교육까지 포괄하는 포괄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2)이인회(2020) 『마을로 돌아온 학교 : 마을교육학의 기초』 교육과학사 232쪽 “향후 학교와 지역사회의 관계는 학교가 본래 가지고 있는 교육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하여 지역사회로부터 지원을 받으면서, 동시에 학교는 지역 주민들의 학습과 성장을 위해 그리고 지역사회의 공동체성 회복을 위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능도 수행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학교와 지역사회는 지역의 교육자원을 공유하고 상호 공통적인 것을 만들기 위하여 동행하는 파트너의 관계로 발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