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마을 만세] 마을활동가의 사회적 보상을 둘러싼 어떤 혀들

2012년 주민참여예산위원으로 공공영역에 첫발을 뗐다. 그때 참여예산제 위원은 별도의 수당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참여예산제 뿐만 아니라 주민자치회 등 여러 민관협치 성격의 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이에 대한 참여수당 지급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수당 지급이 필요하다는 쪽은 참가율을 높일 수 있다고 했고, 반대하는 쪽은 그렇게 되면 순수한 참여의식이 훼손된다 했다. 양쪽의 의견을 듣고 꽤 오래 고민해봤지만 정확하게 어떤 결론을 내리긴 어려웠다. 수당이 유혹적이라 본질을 훼손시킬 수도 있다는 말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 그렇다고 정말 그 수당만 바라고 참여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수당 지급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던 모양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위원회는 회의수당이 지급된다. 위원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적게는 3만원부터 10만원까지 다양하다. 이런 위원회는 민관협치를 표방하며 만들어진다. 단체장에 따라 위원회 구성에 대한 적극성은 다르지만, 선출직 단체장으로서는 자신의 옹호세력으로 위원회를 구성해 차기 선거를 준비하는 조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한국 사회에 직접민주주의를 확대하자는 시민들의 욕구가 높아지는 것과 참여민주주의를 확대하려는 정치권의 움직임이 함께 맞물렸다. 어떤 지자체에서는 위원회 활동이 유명무실하며, 단체장의 선거조직이라는 비판도 있다. 어떤 위원들은 참석해서 발언을 한 번도 안 하기도 한다. 그래도 수당은 나간다. 늦게 오거나 일찍 퇴장하며 사인만 하고 가는 사람도 있다. 수많은 위원회에서 각종 역할을 맡으며 불성실한 참석자에게 수당을 주는 게 정당한지 고민되었다. 내가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매번 입을 꾹 닫고 앉아만 있다 가는 사람에 비해 의안서를 작성하고 매번 발언하기 위해 사전자료를 찾고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워 의견을 내는 내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화도 났다. 한국 사회에서 일이라는 건 제안하는 사람이 해결하는 거고, 일 많이 하는 사람에게 일을 보태주는 형국이라 이미 익숙해졌다 하더라도. 때때로 불쾌했다.

사람들의 토론과 협력 ⓒpixabay


반면에 교육청에서 진행하는 학교 밖 교육을 진행하는 활동가들은 공모사업 예산 규정 때문에 늘 힘겨워했다. 강사비 규정도 다른 공모사업에 비해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는데 실무자는 인건비를 받을 수 없는 규정이 생겼다. 인쇄물은 2건 이상 한곳과 거래할 수 없고, 간식비는 교육일 당일에만 지출해야 하는 등 운영자의 편의를 봐주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오랫동안 이 공모사업에 참여한 이들은 갈수록 교육청이 자신들을 ‘도둑 취급’하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물 샐 틈 없이 예산을 감시하겠다는 게 결과적으로는 일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몰아세웠다.

마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다종다양하다. 제도권으로 다 포괄되지 않는다. 마을공동체와 관련한 중간지원조직이 갖춰진 곳에서 공모사업을 비롯한 사업 참여자는 적어도 행정기관에서는 활동가로 인지하게 된다. 허나, 앞서 말한 교육청 등 지방자치단체 외의 행정기관에서 진행하는 사업을 수행하면서 마을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분야가 중첩되지 않으면 제도권 내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경기도의 경우 경기행복마을관리소를 운영한다. 비아파트 주거지역에서 이웃을 돕고 마을네트워크를 확장하는 역할을 하는 마을지킴이들을 선발해 마을활동을 돕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급여를 받는 직원으로 여겨져 활동가로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마을에서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을 발굴하거나 자영업을 하면서 자발적인 모임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상인회나 체육동아리 등 이권과 취미에 관련된 모임을 꾸려가는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사회에 봉사도 하고 공익적인 활동에 관심을 보인다. 앞서 말한 민관협치 성격의 위원회 참가자들도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들이 모두 마을활동가인가. 활동가의 개념은 여전히 관념적이다.

누구는 활동가고 누구는 아니고. 구분이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마을활동가의 역할이 보다 선명해진다면 활동가의 사회적 인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 경기도의 마을활동가 사회적 인정체계 연구다. 경기도 마을공동체지원센터에서 시작했다.

경기도 마을공동체지원센터 관계자에 따르면, 마을활동의 지속가능발전 방안을 강구하는 과정이 있었고, 지속가능한 발전이 제도권의 보장으로 가능한 것인가를 궁리했다 한다. 마을활동은 사실 개인의 노력봉사로 거둘 수 있는 성과의 한계가 있다.

수년 전 일이다.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위치한 고립된 마을이 있었다. 마을 주변에 개천이 흐르고 그 바로 옆에는 발암물질을 내뿜는 것으로 의심되는 산업시설이 있었다. 3천 세대쯤 되는 단지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주체로 마을축제까지 수년간 기획한 사람이 있었다. 지역에서는 그를 우수한 인재로 여겼고 이런저런 토론회와 발표회에 초대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그의 충실한 자료를 보며 이야기를 세 번쯤 듣고 나자, 이 사람은 저 일로 인해 아무런 경제적 이득을 취하지 못했다는 게 확실해졌다. 게다가 마을은 그에게 점점 의존하게 되어 동료마저 잃은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그에게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거의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음 해에 그가 사라졌다. 이후로 그 지역은 ‘발암물질을 풍길 것 같던’ 바로 그 산업시설에서 진짜로 발암물질이 뿜어져 나왔다는 게 증명되었다. 혼자 수년간 마을축제를 준비했던 그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나는 그의 이름도 몰랐다. 그는 ○○마을, 무슨 공동체 대표이고 누구의 엄마였다. 그의 전화번호 하나 제대로 갖고 있지 않던 나는 대체 그를 누구라고 생각했던 걸까. ○○마을의 ●●엄마가 사라진 이후, 마을은 전쟁과 같은 투쟁에 돌입했다. 광역단체장까지 나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마을이 생기기 전에 들어선 산업시설이 깔끔하게 물러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경기도 마을공동체지원센터에서 진행한 마을활동가의 사회적 인정체계 연구1)는 그저 연구로 그치지 않고 이들의 사회적 활동을 인증하고 보상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손에 잡히는 수치로 만드는 과정에 여러 갈등이 있었다. 대체로 그 갈등은 언어로 가늠되었다.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보다 말로 결정하는 사람들이 한 개인의 삶을 좌지우지했다. 내가 아는 많은 활동가들은 말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찾고자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에 어떤 자원을 투입했는가, 지속가능한 발전에 어느 정도 시간을 보냈는가, 그 시간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숙고하고 기준을 만들어냈다.

경기도 의정부시의 한 청년단체는 마을의 노인들과 시간을 교환하며 상상해 본 적 없는 교환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물론 이런 사례가 꿈같은 이야기일 수 있고, 지속가능하지 않은 일시적 이벤트로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렇게 종결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크나큰 손해를 가져오거나 누군가를 멸실시키지 않는다면 도전해보는 것이 뭐 그리 나쁜가? 우리는 언제까지 성공가능성만 염려하며 시도해볼 것인가. 그렇다면, 첫 시도에 성공하는 행정사례는 몇 건이나 되는가?

앞에서 언급한 각종 민관협치를 표방한 위원회는 과연 마을활동만큼의 가치를 추구라도 하고 있을까? 한 번의 회의에 50명을 부르고 그들에게 수당을 지급하느라 1회에 수백만 원을 쓰는 회의는 가치를 측정할 수 있을까?

또는, 시간제 일자리라 계속해서 시간을 쪼개고 있는 마을관리소의 마을지킴이들의 활동은 어떻게 환산할 수 있는가? 외로운 이웃을 찾아 아는 체를 하는 주민은, 눈 내린 아파트 단지 사잇길을 혼자 쓸고 있는 어떤 선량한 사람의 삶을 과연 화폐로 측정할 수 있을까?

마을 ⓒpixabay

마을활동가의 사회적 보상에 대한 연구와 정책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 배경엔 헤아릴 수 없는 헌신과 봉사, 공익활동에 대한 진심을 담고자 하는 기관과 연구자, 활동가들의 노력이 있다는 걸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시민들의 활동을 바탕으로 시민기본소득이나 시민수당 등 다양한 보상제도가 시도되고 있고, 일부는 정착하는 모양새를 갖추기도 한다. 그 본질은 진심에 대한 보답이다.

이 판에서 활동한지 10년을 넘기면서 어쩌면 세계는 언어가 지배하고 있으며, 세상은 언어로만 조종당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지난 한 달간 한 인간의 세 치혀로 경제가 침몰하고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 걸 목도했다. 말 한마디 없이 서명만 하고 수당을 받아 가는 위원회와, 말 한마디 전달 못 하고 실무만 하다가 예산착복자로 의심받는 마을교육활동가와, 사회적 보상 따위 상관조차 안 하고 손발이 바쁜 마을의 일꾼을 어떻게 구분하고 보답해야 할지. 아마 우리 사회가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그 답을 얻을 거라 생각한다. 노력하는 사람은 노력하겠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여전할 테니까.

곧 올해의 새로운 사업들이 시작될 것이다. 예산이 절반으로 줄었다지만 어쨌거나 그 줄인 자들도 모두 의회에서 혀로 결정했을 것이다. 취약계층 일자리의 예산 문제도, 마을공동체를 지원하는 문제도, 마을교육활동가들이 10원 한 장 허투루 쓰는지 바늘 끝으로 헤아리는 규정도 모두 혓바닥에서 나왔다.

그놈의 세 치 혀가 언제나 문제다.

필자주
1)이에 대한 구체적 기준은 경기도 마을공동체지원센터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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