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 법정에 한껏 멋을 부리며 등장한 여성의 사진이 신문을 장식했다. 뉴욕의 상류층과 사교계에 접근하기 위해 수백만 유로의 독일 상속녀로 사칭하여 각종 범죄를 저지른 애나 소로킨이다.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애나 만들기’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이 기상천외한 범죄자 애나 소로킨의 이야기는 2021년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됐다. 그리고 이 작품은 2025년 한국 초연 무대를 갖고 있다. 바로 연극 ‘애나 엑스’이다.
이 연극은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실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작품이 아니다. ‘애나 엑스’는 애나와 아리엘, 두 사람이 등장하는 2인극이다. 애나 소로킨은 애나 엑스라는 새로운 인물이 되었으며, 아리엘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거대한 휴대폰으로 꾸며진 모던한 무대 위로 아름답고 당당해 보이기까지 하는 애나와 기술 스타트업 창업자 아리엘이 등장한다. 이제 연예 기사에서나 볼법한 애나와 아리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화려한 뉴욕의 밤, 자신을 프랑스의 부유한 상속녀라고 소개하는 애나와, 이제 막 ‘제네시스’라는 프라이빗 데이트 매칭 앱 론칭에 성공해 부자가 된 아리엘이 만나게 된다. 애나는 고급 호텔에 머물며 명품 쇼핑을 하고 화려한 파티에 참석한다. 팁으로 100달러를 줄 만큼 풍부한 재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늘 예술가와 기업가들을 만나는 애나의 삶은 역동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현대 사회의 뒤틀린 욕망과 허상에 집중한 이야기
관객들은 애나가 진짜 상속녀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객관적인 정보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SNS를 가득 메운 화려한 애나의 일상을 보며 어떤 의구심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아리엘 역시 마찬가지다. 화려해 보이는 삶과 애나의 매력에 빠진 아리엘은 애나의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만다. 재단을 설립하고 건물을 인수해 사업을 확장하려는 애나의 본 모습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연극 '애나 엑스' 공연 사진, 애나 최연우 아리엘 이상엽 ⓒ(주)글림컴퍼니
‘애나 엑스’의 실존 인물인 애나 소로킨은 2019년 사기 등의 혐의 등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애나는 체포되어 구치소에 있으면서도 화려한 의상을 입고 법정에 나타나기도 했으며, 2024년 가택연금인 상태에서도 전자발찌를 찬 채로 유명 TV 쇼에 출연하기도 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연극은 실제 애나의 사건을 그대로 극에 투영하는 대신, 애나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의 뒤틀린 욕망과 허상에 집중한다.
애나의 거짓말에 막대한 재산을 날린 아리엘은 어떨까? 아리엘 역시 남과 차별화된 삶을 원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파고들어 상류층 사회에 입성한 인물이다. 아리엘은 SNS 속 화려한 애나의 모습에 현혹되었고 상류층으로 보이는 애나의 삶에 매료되었을 뿐이다. 수감된 애나를 찾아간 아리엘과 애나의 대화가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화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반칙해서 들키면 범죄자, 안 들키면 사업가
아리엘은 말한다. “우리가 파는 건 높은 곳을 향한 동경과 부러움이야.”라고. 사기 혐의로 잡혀가는 애나도 말한다. “이 나라는 놀이터야. 반칙해서 들키면 범죄자, 안 들키면 사업가인 나라.”라고. 극 속 애나와 아리엘은 광란의 하룻밤을 보내고 잠시 녹초가 된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이것으로 누구도 다치거나 상처입지 않은 것처럼. 그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서 보고 싶은 것을 봤을 뿐이고, 자신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줬을 뿐이라고 말이다.
연극 '애나 엑스' 공연 사진, 애나 최연우 아리엘 이상엽 ⓒ(주)글림컴퍼니
연극을 본 관객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을 것을 들었을 것이다. 필자가 그러했듯. 하지만 연극이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무대 위의 애나와 아리엘이 너무 매력적인 인물로 보인다는 함정이 있고, 젊은 세대들의 단편적인 모습을 그린 해프닝이라는 잔상을 남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애나 엑스’는 포장되고 가공된 허상이 진실을 가려, 각종 혐오와 차별을 양산하는 현대 사회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고 요구한다.
애나 역에 배우 최연우, 한지은, 김도연이 무대에 오르며, 아리엘 역의 배우 이상엽, 이현우, 원태민이 각기 다른 신선한 매력을 선보인다. 연극 ‘애나 엑스’는 3월 16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에서 공연된다.
연극 ‘애나 엑스’
공연 장소 :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 공연 날짜 : 2025년 1월 28일(화) ~ 3월 16일(일) 공연 시간 : 화~목 20시/금 16시, 20시/주말, 공휴일 15시, 18시 30분/월 공연 없음 * 3월 16일(일) 15시 1회 공연 러닝 타임 : 100분(인터미션 없음) 관람 연령 : 14세 이상 관람가(2012년생 포함 이전 출생자) 원작 : 조셉 찰턴 Joseph Charlton 창작진 : 번역 황석희/연출 김지호/음악 강하님/움직임 홍유선/무대, 조명, 영상, 소품디자인 이모셔널씨어터/음향 디자인 이대원/의상 디자인 홍문기/분장 디자인 정지윤/기술감독 김형배/무대감독 권은지 출연진 : 최연우, 한지은, 김도연, 이상엽, 이현우, 원태민 공연 예매 : LG아트센터 서울, 인터파크 티켓 공연 문의 : LG아트센터 서울 1661-0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