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임시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 나선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주4일제’를 제안했다. 획기적이다. 언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가 없었지만 화두를 던진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미 경기도에서는 주4.5일제를 제시하면서 판교 IT사업장들에게 노동시간 단축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도의 재정을 지원해서라도 해 보겠다는 의지이다. 이제 시작이지만 두 손 들어 환호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지난 3일 반도체특별법 정책토론회에서 이재명 대표는 ‘몰아서 일하기’가 왜 안 되냐고 주장하면서 심지어 반도체 산업 종사자의 ‘주52시간 근무 예외’ 적용이 필요하다고 우겼다. 오늘의 연설에서도 ‘원하는 것은 유연화지 총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수미일관하게 쏟아냈다. 결국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얘기인가? 세계 최장시간 노동지표를 보여주는 것은 부끄러우니 일단 총량은 줄여 국제적인 수준에 부합하게 만들고 대신 재량노동시간제, 탄력근무제와 같은 유연 제도를 최대로 활용해 인간의 몸을 기계처럼 사용하고 자본은 더 많은 인건비 절감을 이룰 수 있게 한다는 의미렷다. 반도체 같은 ‘수출효자’ 산업에서는 아예 노동시간도 덤으로 늘려주고.
교언영색(巧言令色)한 것인지 권모술수(權謀術數)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면 아직 입장이 없는 것인지. 이즈음에서 정치가들이 애써 외면하거나 뭘 모르는 것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은 사실상 주당 52시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야당이 정신 차려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주52시간제도가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상이 되는 노동집단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우선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근로기준법에서 노동시간 규제 대상이 아니다. 전체 취업자 2천8백만 명 중 9백7십만 명, 즉 35%에 이른다. 다음으로는 비임금근로자이다. 6백4십만 명이다. 소위 자영업자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가짜 프리랜서,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시 노동시간 규제 대상이 아니다. 다음으로 재량근무제 적용대상 노동자들이다. PD, IT산업 개발자들, 전문직종 종사들이다. 그리고 1차산업(농업, 임업, 수산업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역시 노동시간 규제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몇몇 업종이 남아 있다. 육상운송 및 파이프라인 운송업(여객자동차운송사업은 제외), 수상운송업, 항공운송업, 보건업 등이다. 자, 보시라.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시간 규제에서 벗어나 있다. 노조가 없는 곳이라면 규제대상이어도 노동시간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노조가 있는 일부 대기업에서만 노동시간 규제가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가 공개한 정슬기 씨와 쿠팡CLS 관리자의 메신저 대화 내용 ⓒ전국택배노동조합
둘째, 재량근무제, 탄력근무제도는 노동자 건강의 적이다. 재량근무제는 노동시간을 규정하기 애매한 창발적인 노동을 수행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노사가 적당한 수준에서 노동시간을 결정하는 제도를 말한다. 여기에서 ‘노’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노동시간은 ‘사’가 주장하는 대로 계약되고 결국 장시간 노동을 피할 수 없다. 탄력근무제는 연중 6개월까지 필요할 때 장시간 노동이 가능하도록 규정한 제도이다. 물론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는 구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계도 몰아서 돌리고 한동안 안 돌리면 탈이 나는 법인데 인간은 어떠할까? 인간은 수십만 년 동안의 진화를 거쳐 왔지만 아직 이런 노동방식에 적응되지 못했다. 그래서 탈이 날 수밖에 없다. 몰아서 일한 만큼 쉰다고 해서 회복력이 쉽게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다양한 건강장애를 낳게 된다.
셋째, 반도체 다음으로 조선, 석유화학, 자동차, 전자, 기계 등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산업체들(역시 효자 수출기업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그나마 주52시간을 적용받는 대기업들이다. 이들이 형평성 문제를 주장하면서 노동시간 규제 제외를 요구하게 된다면 정치권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무제한 노동, 과로사 천국(!)이 되고 말 것이다.
노동자 삶을 대상으로 장난치지 말자. 신기술 혁명의 시대이다. 기술혁신의 이익을 왜 자본만 가져가야 하는가. 일하고 소비해 주는 노동자들이 없다면 혁신은 존재할 수 없다. 잉여가치는 기술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비가 없다면 자본주의는 굴러갈 수조차 없다. 맹점에서 벗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