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환 감독 “윤석열 계엄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재연”

4월 2일 영화 ‘장흥1950: 마을로 간 전쟁’ 개봉··· 국가의 외면 속에 학살된 수많은 이들

영화 ‘장흥1950: 마을로 간 전쟁’ ⓒ화면 캡쳐

어릴 적 기억이다. 아버지 고향이던 경북 영덕에서 마을 어르신에게 뒷산에 있는 작은 연못을 가리키며 많은 이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엔 그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면서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됐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전국의 거의 모든 마을에서 크고 작은 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지난 2003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출간한 책 ‘다 죽여라, 다 쓸어버려라’의 첫 장 제목이 ‘온 국토가 무덤’이었던 것도 이런 역사 때문이다.

전국의 마을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전쟁
온 국토는 무덤이 되었다


‘온 국토가 무덤’이 될 정도로, 광범위한 학살이 벌어졌지만, 학살의 진실을 제대로 아는 이들은 드물다. 그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죽어갔지만, 그 죽음이 억울하다고 말하는 이들까지 빨갱이로 몰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을 돌며 감춰졌던 학살의 진실을 파헤쳐온 구자환 감독이 오는 4월 2일 영화 ‘장흥1950: 마을로 간 전쟁’을 개봉한다. ‘레드툼’, ‘해원’, ‘태안’에 이어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을 다룬 네 번째 영화다.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구자환 감독 ⓒ구자환 감독 제공

구 감독은 그동안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입체적으로 취재해 영화로 만들어 왔다. 2013년 제작한 영화 ‘레드 툼’에선 경남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중심으로 다뤘고, 2017년 작 ‘해원’에선 한국전쟁 당시 정부에 의해 전국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과 이 학살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근원을 추적했다. 2020년 작 영화 ‘태안’에선 같은 마을 사람들이 좌우로 나뉘어 서로 죽고 죽였던 비극과 그 비극의 뒤에 숨어있는 권력의 문제를 해부했다.

1948년부터
전남 장흥서 이어진
좌익과 우익, 군인과 인민군
서로가 서로를 죽인
학살의 도미노


이번 영화에서 그는 전남 장흥에서 벌어진 학살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마을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고, 인민군과 국군이 번갈아 점령하며 마을 주민이 서로를, 군경과 인민군에 의해 벌어진 참혹한 학살을 영화는 고발하고 있다.

전남 장흥의 민간인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훨씬 전인 1948년부터 시작됐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 전인 1948년 이승만 정권은 남한 단독선거를 치르려 했고, 이에 반대하는 투쟁이 이어졌다. 제주에선 4월 3일 단독선거 반대 여론을 진압한다면서 학살이 자행됐고, 이에 반대하는 군인들이 여순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후 산속으로 숨어든 좌익세력을 소탕하겠다며 군경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펼쳤다.

전남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근교에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가 설치될 정도로 장흥에선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고, 이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들이 함께 죽어야만 했다. 살육전은 도미노처럼 이어졌다. 군경은 빨치산 협력자 또는 부역했다는 혐의로 주민을 집단 학살했다. 빨치산은 경찰과 그의 가족, 우익인사를 학살했고, 이를 빌미로 우익청년단이 또다시 주민을 학살했다.

영화 ‘장흥1950: 마을로 간 전쟁’ ⓒ화면 캡쳐

이런 비극의 도미노는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더욱 거세게 이어졌다. 전쟁이 시작되자 적에게 협력할 수 있다는 이유로 국민보도연맹원이 학살됐다. 인민군이 전남 장흥 등을 점령한 뒤엔 우익인사들을 색출해 학살했고, 이후 경찰과 군인이 다시 지역을 수복한 뒤엔 인민군에 부역했다며 주민을 학살했고, 이 과정에서 엉뚱한 마을을 찾아 빨치산을 토벌하겠다면서 학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국가가 국민의 목숨을 책임지지 않았고, 국민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살육의 현장에 내버려 졌다. 구 감독은 “사람의 목숨이 짐승만도 못했다”고 말했다. 사람 목숨이 짐승만도 못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이승만과 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나라를 세우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처럼 미화됐다.

윤석열의 12.3 내란
“저들은 74년 전의
민간인 학살을 다시 계획하고 있었다”


성스러운 투쟁으로 미화된 학살의 과거는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윤석열이 저지른 12.3 내란이 바로 그것이다. 12.3 내란의 비선 기획자로 알려진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수첩엔 정치인은 물론 법조인, 종교계, 시민사회, 연예계 등 인사 500여 명을 체포·구금·살해하려던 계획이 담겨 있었다. 이런 무차별 학살 이후 ‘대통령 3선’ ‘후계자’ ‘선거권’ 등 선거제도를 무력화하고 장기집권을 하려는 구상이었다.

마을로 간 전쟁’ 예고편

이런 끔찍한 구상이 알려진 뒤에도 윤석열 탄핵을 반대하는 집회에선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손팻말이 등장했고, 한 노년의 집회참가자는 “내가 젊고 총이 이었었다면 저들을 쏴 죽였을 것”이란 말을 서슴없이 하는 모습을 보며 섬뜩했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학살을 독려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많은 이들이 섬뜩함을 느꼈다. 영화 ‘장흥1950: 마을로 간 전쟁’을 제작하고, 공동체 상영을 하며 개봉을 준비하는 구 감독도 그러했다.

구 감독은 자신의 SNS에 올린 글에서 “윤석열의 비상계엄은 한국전쟁 초기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의 재연”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흥1950: 마을로 간 전쟁’ 개봉을 준비하면서 쏟던 민간인학살의 트라우마는 노상원의 학살계획을 보고 급기야 분노에 달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염원하며 민간인 학살 다큐 영화를 만들며 보낸 세월이 20년이다. 그럼에도 저들은 74년 전의 민간인 학살을 다시 계획하고 있었다”고 꼬집었다.

“반공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민간인 100만 명이 학살됐지만
책임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윤석열 구속영장이 발부됐던 지난 1월 19일 서울서부지법엔 윤석열 지지자들이 난입하는 폭동이 벌어졌다. 윤석열 탄핵을 심판하는 헌법재판소를 향해서도 윤석열 지지자들은 폭력 행사를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윤석열은 2월 25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최후 변론에서 “저의 구속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청년들도 있습니다. 옳고 그름에 앞서서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며 폭도들을 감쌌다.

구 감독은 자신의 영화 마지막에 “한국전쟁을 전후해 전국에서 자행된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 학살은 극우 반공문화를 남겼다. 반공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민간인 100만 명이 학살됐지만, 책임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적었다. 국회와 선관위를 침탈한 내란을 애국으로 포장하고, 법원을 침탈한 폭도들을 격려하는 윤석열의 모습은 학살에 무책임했던 이승만을 비롯한 독재권력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구 감독의 이번 영화는 국가는 과연 무엇을 했는지 묻고 있다. 그의 그런 질문은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이다. 과거의 비극을 반복하려던 윤석열 내란 앞에서 구 감독의 영화는 비극을 반복해선 안 된다는 절실한 호소로 다가온다.

영화 ‘장흥1950: 마을로 간 전쟁’ 포스터 ⓒ레드무비

기사 원소스 보기

기사 리뷰 보기

관련 기사

기사 원소스 보기

기사 리뷰 보기

관련 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