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 학교가 겨울잠을 깨고 새로운 학년도를 시작했습니다. 뉴스에는 올해 달라지는 학교의 모습으로 일제히 고교학점제를 소개했습니다. 자녀가 고등학교에 입학했거나 조만간 들어갈 학부모님들에게는 굉장히 궁금한 문제일 것 같아 고교학점제에 대해 알려드릴까 합니다.
고교학점제란 대학처럼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골라서 듣고 192학점을 채우면 졸업하는 시스템입니다. 고교학점제는 2018년부터 추진되어 올해 전면 시행에 들어갔는데요, 정부는 학생들이 획일적으로 과목을 이수하지 않고 자신의 진로에 따라 개성과 적성에 맞춰 수업을 선택할 수 있으므로 학교 교육이 행복해질 거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정말 그렇게 될까요?
14일 오후 경기 수원시 영통구 경기도교육청에서 '2025 고교학점제 지원 방안 마련을 위한 정책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올해 3월부터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1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될 예정이다. ⓒ뉴스1
고교학점제가 전면화되기 전에도 학생들에게 과목 선택권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권이라는 게 예전에 하나였던 과목을 몇 개로 쪼개는 겁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를 예로 들자면, 기존의 국어를 ‘독서’, ‘문학’, ‘화법과 작문’, ‘언어와 매체’, 이렇게 4개로 쪼개고 여기에 ‘실용 국어’, ‘심화 국어’를 덧붙여 학생들에게 선택하라고 합니다. 수학도 ‘확률과 통계’, ‘미적분’, ‘기하와 벡터’로 쪼개고 여기에 ‘경제 수학’, ‘수학 과제 탐구’를 덧붙여 선택하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고개가 끄덕여지나요? 기자가 되고 싶은 학생은 수학·과학은 조금만 공부하고 국어와 사회과목을 많이 선택해서 배우고, 엔지니어가 되고 싶은 학생은 사회과목은 조금만 공부하고 수학·과학을 많이 선택해서 공부하니 학생들이 좀 더 행복해질까요? 그렇다면 원래 학점제로 공부하는 대학생들은 언제나 행복했어야겠죠? 대학생이 행복해지는 방법은 대학에 좀 더 많은 흥미로운 과목이 개설되는 게 아니라 졸업 후 취직이 잘 되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공부해도 취업이 안 되는 대한민국에서 다양한 과목을 개설하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요? 그걸 따져보겠습니다.
올해 입학한 고등학교 1학년부터 내신은 9등급제가 아니라 5등급제입니다. 과목별로 1등급은 상위 10%, 2등급 34%까지입니다. 기존의 9등급제에서는 상위 4%가 1등급, 11%까지 2등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2등급까지가 1등급으로 되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전 과목이 1등급인 학생이 수두룩하게 나옵니다. 작년에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내신이 1점대인 학생이 전교에 5명이었습니다. 2023년 기준으로 전국에 일반고가 1,666개이고 한 학교에서 전 과목 1등급인 학생이 5명이라면, 전국에 8천 명 정도는 내신으로는 변별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대학은 수능에서 판별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학교 내신은 내신대로 철저히 하고, 수능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학교에서 아무리 많은 과목을 개설해도 수능에 있는 과목을 선택하게 됩니다.
고교학점제 도입은 절대평가를 전제로 합니다. 기계공학과를 가려는 학생은 물리를 이수해야 하는데, 상대평가 체제에서는 물리 신청자가 적으면 불이익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택과목들은 모두 절대평가입니다.
절대평가를 하면 40점 이하는 미이수(I학점)가 됩니다. 대학으로 치면 ‘F’학점인데요, ‘F’가 ‘Fail’(실패, 낙제)이라는 부정적 의미라서 ‘Incomplete’(불완전, 미완성)의 머리글자로 ‘I’로 쓰라고 합니다.
대학에서는 “그 교수가 F 주는 바람에 졸업 못 하고 1년 더 다녔다”가 말이 되는데, 현재 대한민국에서 “그 교사가 I학점 주는 바람에 졸업을 못 하고 1년 더 다녔다”, 이게 가능합니까? 그래서 교사들은 절대로 ‘I학점’을 주지 않을 편법들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문제를 아주 쉽게 내거나, 수행평가에서 기본 점수를 왕창 주고 지필고사에서 난이도를 조절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교육부 지침에도 ‘I학점’ 대상자들을 구제할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대학에서 일반고 학생의 ‘A학점’을 신뢰할까요?
고교학점제 이야기가 길어졌는데요, 이 이야기의 끝은 무엇일까요? 학생과 학부모의 관심은 “그래서 특목고·자사고 가는 게 유리해요? 일반고 가는 게 유리해요?”입니다. 그동안 특목고·자사고 학생들이 가장 걱정하는 게 상대평가로 인한 내신의 불리함인데, 이게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작년 10~11월 특목고, 자사고 입시 설명회가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지금도 소위 ‘인 서울’ 상위권 대학은 특목고·자사고 출신 학생들이 ‘싹쓸이’를 하고 있는데, 고교학점제가 전면화되면 중학교에서 우수한 학생들의 쏠림 현상이 심해지겠죠. 그렇게 되면 대학에서 일반고의 절대평가를 신뢰할까요? 우수한 학생들이 특목고·자사고로 더 몰려서 일반고의 학력 저하 현상이 지금보다 더 심각해질 텐데 말입니다.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과학도서관에서 열린 미리보는 고교학점제 및 대입진로, 진학설명회를 찾은 참관객들이 자료집을 살펴보고 있다. 2023.11.25 ⓒ뉴스1
고교학점제는 이런 문제도 있습니다. 제가 올해 3학년 담임인데, 우리 반 학생들 주당 32시간 수업 중 같은 교실에서 수업하는 게 4시간, 나머지는 모두 선택과목을 따라 교실을 옮겨 다니는 수업입니다. 같은 학급이라고 해봐야 조회, 종례 빼고 하루 1시간 같이 수업하고 모두 돌아다니며 수업합니다. 학급이라는 공동체는 완전히 해체됐습니다. 그런데 과거와 같은 담임제도를 운영합니다. 저도 제가 담임 맡은 반 학생 중 절반은 수업하지 않고 조회, 종례 시간에만 만납니다. 그런데도 과거와 같은 담임 역할을 똑같이 해야 합니다.
고교학점제로 학생들이 행복해지고 학교 교육이 효율적으로 될 것이라는 기대는 교육 관료들의 환상입니다. 세상에 다양한 평수에 다양하게 꾸며진 집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 있는 사람에게는 집에 대한 선택권이 넓어진 것이지만, 돈 없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합니다. 고교학점제도 그렇습니다.
OECD 국가들을 보면 대부분 고등학교에서 학점제를 합니다. 대학 진학률이 50%를 밑도는 유럽은 고등학교의 절반 정도는 직업계, 절반 정도가 대학 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인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직업계(특성화고, 마이스터고)가 19%이고, 81%가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한 인문계인데, 그중 특목고와 자사고를 빼면 ‘일반고’가 71%입니다. 문제는 일반고입니다. 기초가 없어 고등학교 수업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로 채워진 우리나라 일반고에서 고교학점제는 의미 없는 선택권의 확대에 불과합니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하게 될 3년 후쯤 되면 ‘고교학점제, 학교는 무엇이 변했나?’와 같은 부정적 기사들이 난무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