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 정혜경 의원이 시민들과 함께 폭설을 맞으며 윤석열 체포를 촉구하는 밤샘집회에 참여했다. ⓒ정혜경 의원 페이스북
엄마아빠 하는 일엔 무심하고 게임과 유튜브와 벗하는 아들에게 간단히 말했다. “지난번에 윤석열 계엄한 거 알지? 그대로 됐으면 엄마아빠 다 잡혀갈 뻔했어”
윤석열 파면 선고가 늦어지면서 공기는 확 바뀌었다. 지난해 12월 14일 탄핵 즈음과는 정반대다. 파면이 되기는 하는 것인지, 풀려난 야수가 권좌에 다시 앉는 것은 아닌지 불안과 공포가 사회를 짓누른다. 시신을 담는 비닐백 3천개를 계엄 직전 추가 비축했다는 기사는 많은 이들이 애써 기억 밑으로 눌러놨던 ‘노상원 수첩’을 다시 일상으로 끌어올렸다.
설혹 파면이 되더라도, 저 거리에 넘실대는 극우의 광기는 더하면 더하지 수그러들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헌재 주변 스피커에 종일 울려대는 소리는 쌍욕과 함께 “빨갱이” “죽여” “밟아”다.(여기에 맞서 흥분한 소수 탄핵 지지자들의 맞대거리도 있긴 하다.) 군복과 선글라스 차림에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고, 경찰이고 기자고 공무원이고 눈에 거슬리면 “중국인 아니냐”며 삿대질이다. 집회에선 사실관계나 법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주장이 쉴 틈 없이 쏟아진다. 윤석열이 파면되면 폭동으로 비화할 것이라는 점은 예고된 바다. 주유소와 지하철역을 폐쇄하고, 총기 반출을 불허하고, 인근 기관과 기업의 휴업과 재택을 권고하고... 헌재 앞은 흡사 종말론이 창궐하는 듯하다.
윤석열이 파면되고,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지면 극우 광기는 잠잠해질까. 역시 전망은 어둡다. 박근혜 때와 가장 다른 점은 국회 108석의 2당이 극우로 깊숙이 빨려 들어간 것이다. 국민의힘은 12.3 내란 이후 100일 동안 ‘환골탈태’ 했다. 초기 김민전, 윤상현 등 극소수의 돌출행동에서 이제는 나경원, 김기현 등 당의 주류 중진이 극우의 물결에 올라탔다. 김문수가 보수 대선후보 지지율 1위라는 점은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극우의 양대 산맥이라는 세이브코리아 무대엔 국회의원들이 거침없이 오른다. 이쪽은 국민의힘을 정치적 스피커로 삼는 데 우호적이다. 그에 비해 광화문의 전광훈은 독자적인 자유통일당을 키우려 한다. 국민의힘을 기회주의적이고 유약하다고 비판하고 ‘선명성’으로 승부한다. 내용에서는 양측이 부정선거론, 혐중, 반북색깔론, 계엄과 군대 동원 지지 등 비슷하다. 80년을 헤아리는 보수엘리트 정치집단이 이들에게 멱살 잡히고, 대선후보와 당권을 바라보며 아부하는 형국이다.
이들은 설혹 대선에서 패배한다 해도 부정선거라며 불복하고 더욱 거칠게 사회혼란을 부추길 것이다. 국민의힘이 쥔 108석은 대통령의 거부권이 없다면 소용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 확인하듯 법원, 검찰, 경찰, 군대, 종교계 등 기득권 연대는 강고하다. 이들이 국민저항권의 이름으로 사회혼란을 일으키고 정부를 흔든다면, 108석은 이를 정치적으로 증폭시키는데 충분하다. 또한 그들이 내란 후 강하게 개헌을 주장하는 이유는 개헌을 막을 수 있는 의석수를 판돈으로 권력의 지분을 늘리려는 것이다. 이렇게 버티다 보면, 조국사태와 부동산 폭등으로 결정적으로 민심 이반을 겪은 전 정부처럼 경제난이나 불공정 이슈 등으로 정치적 역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런 기획이 성공한다면, 극우와 기득권이 결합한 정치세력이 정권에 근접하게 된다.
극우 정권이 들어선다면 국정목표는 계엄 포고령 1호 실행이라 할 수 있다. 윤석열과 극우세력은 포고령을 통해 정치활동은 물론 집회와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그리고 노동권을 강탈하겠다는 내심을 드러냈다. 이는 비판세력 제거(요즘 말로는 수거)를 전제로 한다. 노동자와 진보세력이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결사항전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루하루 피 말리듯 3개월을 넘긴 투쟁, 그 뒤에 또 대선, 그리고 또 극우세력 진압. 표현은 않지만 분노와 공포 못지않게 피곤과 짜증이 느껴진다. 과연 우리는 내란의 바다를 온전히 건널 수 있을까. 망가진 국가와 공동체를 더 나은 상태로 만들 수 있을까.
지금 하나 더 생각할 것은 내란의 바다 저 건너에 무엇이 있는가이다. 한국의 극우세력은 어느 날 땅에서 솟거나 최근 외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다. 일제의 파시즘이 친일부역세력과 함께 생존해 군사독재와 결탁하고, 이어 신자유주의, 극우개신교와 결합했다. 그래서 극단적 색깔론이자 폭압적 군사주의고, 종교적 망상이자 불평등과 양극화의 책임을 자본이 아닌 약자와 소수자에 돌리는 분열적 이념이다. 이제 정치권의 웰빙보수 상당수는 전투적 아스팔트 극우와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운명도 함께 할 차례다.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극우세력과 그에 동조한 정치세력에 퇴장 선고가 이뤄져야 한다. 지역의 뿌리도 잘려 나가고, 중앙무대에서도 밀려나 더는 집권도, 재선도 어려운 암담한 미래가 확고해질 때 다 함께 죽자는 옥쇄세력과 나는 좀 살자는 이탈세력이 갈라질 것이다. 그들의 아름다운 이별을 촉진할 길도 넓혀야 한다. 선거제도와 국회제도가 중요하다. 아울러 검찰 등 권력기관의 대대적 수술도 가능한 초기에 이뤄야 한다.
극우가 몰락하고, 민주당이 중도로 제자리를 찾아가며 열릴 진보의 공간에 선명하면서도 유능한 진보세력이 서야 한다. 국민이 권력집중을 우려할 상황이라면 진보세력에게는 더 좋은 외부 환경일 수 있다. 내란의 바다를 건너면, 극우라는 해적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족쇄를 차고 제 땅보다는 남의 논밭을 더 갈던 진보세력이 처음으로 맘껏 제 농사를 짓길 기대해본다.
젊은 시절부터 격동기, 전환기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지금은 혼돈기가 적당할 듯싶다. 윤석열의 내란도, 석방도 예측 밖이었기에 다른 여러 예상도 아마 대부분 틀릴 것이다. 무엇보다 윤석열 파면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한국사회는 1987년 6월 이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부디 하늘이 돕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