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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홍의 원전 없는 나라] ‘사고 금지 구역’을 권한다

4월 8일 주민 공청회에서 필자는 “월성 2·3·4호기 냉각수의 방사능 농도 측정은 했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이에 한수원 연구원은 “당연히 측정을 다 하고 평가를 한다”라고 답했지만, 이는 거짓 답변이다. ⓒ필자 제공

최근 안동 길안면에 있는 처가 어른 묘소에 성묘를 다녀왔다. 묘소를 비롯해 주변 산들이 모두 검게 그을려 있었다. 뉴스로만 접하던 경북 지역 산불 피해를 조금이나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산불 관리를 산림청이 아니라 한수원에 맡겼더라면, 산불은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거나, 발생했어도 신속하게 진화되어 큰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이재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멧돼지, 고라니, 노루, 산새들도 무사했을 것이다. 만약 한수원이 맡았다면 “화재 금지 구역” 설정 하나로 간단히 해결했을 것이다.

국가적 재앙을 두고 말장난을 한다며 나를 야단치는 이들도 있겠지만, 지난 4월 8일 경주에서 실제로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한수원이 주최한 ‘월성 2·3·4호기 수명연장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 초안’ 주민 공청회에서, 어느 주민이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자포리자 원전 피격 사태를 언급하며 항공기 충돌 대책을 질문했다. 이에 대해 한수원 측은 “비행 금지 구역”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답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공청회였지만, 허탈한 순간이었다.

월성 2·3·4호기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 초안에 제시된 방사선원 자료는, 1994년 월성 1호기에서 측정된 수치를 근거로 하고 있다. ⓒ필자 제공
제111회 원자력안전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핵연료 변경 이후 사고 발생 시 주민 피폭량이 약 2배 증가한 것으로 평가되어 있다. ⓒ필자 제공

더욱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이미 주민 공람까지 마친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 초안’(이하 평가서)이 사실상 조작된 문서라는 점이다. 평가서 작성에서 가장 핵심은 핵발전소 사고 시 방사능 누출량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다. 방사능 누출량에 따라 주민들의 피해 규모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평가서는 무려 30년 전, 1994년 월성 1호기의 방사능 측정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 드러났다.

평가서 제출 시점이 2024년 12월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제대로 된 평가서라면 아무리 이르게 잡아도 2022년경 월성 2·3·4호기 원자로 냉각수의 시료를 채취하여 방사능 농도를 직접 측정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한수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도 다른 호기인 월성 1호기의 30년 전 자료를 가져다 쓴 것이다. 이는 단순한 부실을 넘어선 평가서 조작으로밖에 볼 수 없다.

같은 석유라도 경유와 휘발유의 유독가스 배출량이 크게 다르듯, 원자로 역시 핵연료에 따라 방사능 방출 특성이 달라진다. 한수원은 2020년대에 들어 월성핵발전소 원자로의 성능 개선을 위해 기존 핵연료를 새로운 연료로 교체했다. 이로 인해 원자로의 성능은 향상됐지만, 사고 발생 시 방사능 누출량은 훨씬 많은 것으로 평가됐다. 그렇기 때문에 30년 전 월성 1호기의 측정 자료를 현재 월성 2·3·4호기의 평가에 적용하는 것은 공학적으로도 부적절하다.

한수원은 도대체 왜 이러는가? 번거롭게 돈 들여 방사선환경영향평가를 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월성 2·3·4호기를 ‘사고 금지 구역’으로 지정하길 권한다. 훨씬 간단하고 명쾌하지 않은가? 설계 수명이 끝난 핵발전소는 무리하게 더 가동하지 말고, 제때 폐쇄하면 될 일이다. 그것이 바로 ‘사고 금지 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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